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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Oct 04. 2021

왜 난 아들이라는 소식에 실망했을까?

임신 제17주

보통 20주가 지나야 태아의 성별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초음파 검사 중 얼결에 알게 되었다. 모니터를 주시하던 아내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자, 의사선생님이 다리 사이를 확대해가며 기어코 아이의 고추를 찾아내셨다. 녀석의 고추는 일반인의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있고 없음의 차이는 분명했다. 두 다리 사이엔 조그마한 돌출부가 있었고, 그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고추였다.


솔직히  딸을 원했다.  딸을 원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딸은 마음껏 쪽쪽대고 껴안을  있지만, 아들에겐 그만큼의 애정표현을 해선  된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 당황스러웠다.  이런 전근대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 들여다보니, 자라면서 부지불식간에 내면화해온 아빠상에 다다랐다.  아빠상은 딸과 아들을 다르게 대했다. 이는 아들에게만 “ 이놈!” 하고 딸에겐 마냥 다정다감한 아침드라마식의 노골적인 차별대우라기보다, 아주 미세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수준의 이중잣대였다. 예를 들면,  아이와는 얼굴도 비비대고 뽀뽀도   있지만, 아들과는 포옹이나 하이파이브로 그치는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이중잣대가  안에 들어섰는지 모르겠다고 아내에게 하소연하니, 아내는 같은 수컷끼리 서로를 잠재적 경쟁상대로 인지하고 경계하기 때문이지 않겠냐고 말했다. 일리가 있었다. 예전에 형이랑도 비슷한 얘기를  적이 있다. 우리 형제는 별로 친하지 않다. 형이 30대가 되고 나서야 제대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전엔 가족 단톡방에서 생사만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때 형과 얘기한 바로는 성격 차이도 한몫했겠지만, 서로를 경쟁상대로 여긴 점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으리라는 데에 의견이 모였다.


난 곧 태어날 아들과 평생 살을 비비고 쪽쪽대고 껴안고 싶다. 내가 백발의 노인이고 아들이 희끗희끗한 중년이 되어서도 말이다. 아들이라서 애정표현을 사리고, 경쟁상대로 보아 경계하고 싶지 않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부자지간 말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되고 싶다. 하지만 내가 자라면서 내면화한 편견과 이중잣대가 걸림돌이 될 것 같아 겁난다. 머리로는 옳고 그름을 알지만 이미 내 무의식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이 소프트웨어를 거스를 수 있을까? 사실 내가 가진 편견은 이뿐만이 아니다. 만약 내 아들이 게이라면, 트렌스젠더라면, 중증 장애인이라면, 난 과연 아들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세상이 보낼 곱지 않은 눈초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 다 같은 인간이고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내 밀레니얼 감수성은 말하지만, 내 자식만은 피해갔으면 하는 마음 역시 거부할 수 없다. 내 아들이 게이든, 트렌스젠더든, 장애인이든, 오로지 사랑으로 보듬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백번이고 천번이고 알지만, 과연 이를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지, 이 편견들을 극복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며칠 전 친구와 만나면서 이런 걱정을 털어놓으니,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넌 네 부모님이 편견이 없다고 생각해?”

“장난해? 편견투성이지. 내가 결혼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외국인이어서 싫다, 나이가 많아서 싫다, 왜 그리 남들과 다르게 사냐, 어휴…”

“근데 지금 결혼해서 잘 살고 있고, 부모님이랑도 사이좋잖아?”

“그렇지…?”

“결국 서로 받아들이려는 마음, 대화할 마음이 있어서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친구는 내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선 꾸준한 공부와 남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 없이는 결국 나 혼자만의 무인도에 고립되어 세상과의 소통이 단절된 쓸쓸한 최후를 맞을 것이다. 하지만 노력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과 대화하려는 의지다. 지금 나와 내 부모가 그렇듯, 나 역시 내 자식과 의견차이가 생길 것이다. 이는 서로 다른 세대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내 편견과 몰이해 때문에 내 아들은 마음 아파할 것이다. (아들아, 미리 사과한다.) 이때 마음의 문을 닫고 대화의 창을 닫으면, 그땐 정말 답이 없다. 하지만 친구 말대로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면, 상대방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분명히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일은 공부를 통해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편견을 극복하는 것이다. 아들과 쪽쪽대고 껴안으려면 꼭 필요한 공부다. 도서관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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