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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May 22. 2021

9살 연상 영국인 아내와 삽니다 - 2

결혼과 배움의 기록

예전엔 연애란 두 사람이 만나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좋은 시간 사이사이로 끼어드는 각자의 불만과 슬픔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자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상대방에게 애써 좋은 모습만을 보이려 했다. 골칫거리를 나눠 봤자 한 사람이 고통스러우면 될 것을 두 사람이 고통받는 것밖에 더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웃고 있는 모습, 쾌활한 모습만을 보이려 했고 내 근심 걱정은 묻어 두었다. 물론 나 자신을 억제하고 검열한 만큼 상대방에게도 그만큼 냉엄한 잣대를 들이댔다. 그가 자신의 근심 걱정을 토로하는 것이 귀찮았고 짐처럼 느껴졌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다 듣다 내가 허용하는 임계치를 넘어가면 모든 공감을 거두고 오히려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나는 너를 위해 이만큼 배려하는데 넌 왜 그리 못해?' 식의 심보였다. 돌이켜보면 내가 관계를 대하는 자세는 매우 계산적이었다. 줬으면 받아야 했고, 받지 못하면 내 호의를 생색냈고 불만을 표했다.


아내를 만나고 나서 내가 관계에 임하는 자세가 굉장히 소모적이고 구질구질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연애는 죄다 반쪽짜리 연애였다. 누구든 좋은 모습이 있고, 그 이면엔 반대의 모습이 있기 마련이다. 좋은 모습이 있기 위해선 그 반대의 모습 또한 있어야 한다. 두 면은 서로를 지탱하는 구조이기에 한 면만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난 평소 낙관적이고 쾌활하다는 소리를 잘 듣는다. 아마 내가 큰 기복 없이 감정선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낙관적이고 쾌활한 사람 주변에 있는 건 편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 곁에 있는 것보다 감정 소모가 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경우 이 감정선 유지에는 대가가 따른다. 나는 어떤 중요한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그것의 전체를 보려 하지 않고 증상만 후딱 일단락하려 한다. 머릿속에 미해결 사안이 들어앉아 있는 걸 못 견디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향곡선을 그린 감정선을 재빨리 원상 복귀시켜 미해결 딱지를 떼려 하는 나만의 항상성 유지기제인 셈이다. 하지만 여기엔 굉장히 큰 허점이 있다. 애초에 충분한 데이터를 고려하지 않고 해결하는 시늉만 했기 때문에 해결책은 금방 구멍이 보이고 문제는 곧 재발한다. 그럼 또다시 이 모든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 내 일처리는 주로 이런 식이다. 굉장히 피곤한 삶이다.


반대로 아내는 나와 완벽한 대척점에 있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매사에 신중하고, 일과 관련된 모두의 입장을 일일이 고려하며, 당장 어떤 결론을 도출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해 하지도 않는다. '알아서 잘 되겠지' 식의 자위 또한 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내는 내게 한번 이런 말을 했다. "난 혼란 속에 있을 때 마음이 편해져."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로선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세계였다. 물론 아내는 고통을 즐기는 사디스트가 아니다. 아내도 여느 사람과 다를 것 없이 소소하고 큰 탈 없는 일상을 좋아한다. 하지만 문제에 봉착했을 때 발동하는 소프트웨어가 나와는 천양지차이다.


이런 아내 곁에 있는 건 때론 굉장히 피곤하다. 난 빨리 얘기를 덮어 두고 내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아내는 이제 발동이 걸려 본격적으로 이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려고 한다. 연애 초기엔 이 때문에 많이 다퉜다. 난 왜 긁어 부스럼이냐고,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냐면서 아내를 타박했고, 반대로 아내는 어떻게 이런 것도 고려하지 않냐고, 왜 노력하지 않냐면서 나를 타박했다. 서로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이해하기까지 많은 대화와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아내의 이런 점이 동시에 나를 지옥에서 구원해주는 동아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도저히 나 혼자 해결할 깜냥이 안 되는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문제를 아내에게 넋두리하면, 아내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묵묵히 듣다가 내 얘기가 끝나면 이미 외운 대사를 읊듯이 일목요연하게 요점만 정리한 후 앞으로의 행동 방안을 제시해줬다. 이럴 땐 내 아내가 아니라 베테랑 정신과 의사한테 상담을 받는 기분이다. 내 두서없는 칭얼거림을 세상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얘기처럼 들어주는 아내. 나였으면 '나도 내 하루를 사느라 충분히 힘든데 왜 네 몫까지 나한테 떠넘기냐고' 하고도 남았다. 역시 아내는 나보다 그릇이 큰 사람임이 틀림없다. 나와 결혼해줘서 감사하다. 또 동시에 미안하다. 또 이럴 때 보면 9살 나이차가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의 무언가가 동시에 내 삶의 질을 눈에 띄게 향상할 수도 있다는 사실. 참 사람은 복잡하고 관계는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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