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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May 22. 2021

9살 연상 영국인 아내와 삽니다 - 3

결혼과 배움의 기록

"난 우리 관계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안식처였으면 좋겠어." 집 근처 정릉천을 거닐다 말고 아내가 말했다. "다른 커플이나 부부 중에 그런 사람들 있잖아. 괜히 서로에게 밉보이기 싫어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다 꺼내 보이지 않는 사람들. 마치 두 개인이 하나의 합을 이루려면 어느 정도 자신을 억제해가며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는 게 당연지사인 것처럼. 그런 관계 너무 숨 막힐 것 같아. 온전히 나로 존재하지 못하고 함께한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억누르는 그런 관계 우린 하지 말자. 바깥세상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둘이 함께 있는 공간만큼은 온전히 너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안전지대로 만들자. 그 무엇도 숨기지 않아도 되고, 없는 걸 있는 체하지 않아도 되는, 서로의 모든 불안, 결핍, 그리고 상처를 다 드러내 보여도 되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공간. 우리 관계가 그랬으면 좋겠어."


어떻게 하면 그런 관계에 이를 수 있을지, 심지어 현실에서 그런 관계가 가능하긴 한지, 이런 의문들이 들었지만, 이 제안 자체는 나를 굉장히 흥분케 했다. 기성품 사듯 우리를 관계에 끼워 맞추지 말고 우리가 원하는 관계를 우리가 직접 정의 내리고 만들어간다는 것은 굉장히 아내다운 발상이었다. 한 마디의 말이 무한한 가능성을 여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어깨너머로 봐온 많은 관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어느 정도 서로 속이고 속는 것이 관계라는 게임의 불문율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상대방이 싫어할까 숨기고, 괜히 말할 필요 없어 숨기고,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숨기고, 상대방의 대한 배려랍시고 행하는 이런저런 기만적 행위들. 이런 사소한 행위 하나하나가 관계 자체를 위협하진 못하겠지만, 관계의 기저에 깔린 태도, 즉 이 관계는 내 모든 결함과 치부를 투명하게 내보일 수 없는 공간이라는 인식은 관계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치명적일 수 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는 것은 일종의 벽 쌓기이다. 이런 사소하고 미미한 벽돌을 한 장 한 장 옮기다 보면 언젠가 서로 닿을 수 없을 만큼의 높은 벽을 쌓게 되지 않을까. 아내가 제안하는 것은 이런 벽 쌓기를 애초에 하지 말자는 뜻이다. 벽을 쌓아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하지 말고 서로 방패가 되어 주자는 말이다.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탈탈 털어 태양 아래 꺼내 보이자는 말이다. 물론 꺼내 보이는 과정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나를 꺼내 보이기 위해선 우선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 사실을 직시했고, 인정했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가슴 깊이 꾹꾹 눌러 놓았던 아픔과 상처, 불안과 공포, 치부와 결핍을 스스로 마주하고 또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무모할 정도의 믿음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지금까지 내가 반쪽짜리 연애를 해온 이유가 바로 이걸 못해서이다. 나는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다 받아들이지 못한다. 부모의 기대, 사회의 기대, 친구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꿈틀댄다. 원래 내 모습을 부끄러워하고 내게 없는 것을 가진 체한다. 이런 자기부정의 행위들은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굉장히 불안한 상태를 초래한다. 나 자신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모습을 온전히 좋아하고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난 언젠가 꼭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자신의 모든 부족과 추악함을 다 포용하고 그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돌이켜보면 난 아내를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나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무심코 뱉은 말에 휘둘릴 때면 그를 탓했지 그가 건드린 부분이 왜 그리도 아픈지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누군가 무심코 뱉은 말이 아픈 이유는 그 말이 내 환부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아직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고 있는 아픈 곳 말이다. 누군가 내 진로에 대해, 내 관계에 대해, 혹은 내 미래에 대해 왈가왈부할 때 마음이 욱신거리는 이유는 나를 부정하고 의심하는 그 말들을 나 자신 또한 믿기 때문이다. 매달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버는 내 일이 떳떳하고, 9살 연상 외국인인 아내와 함께 삶을 일구어 나가는 게 자랑스럽고, 내 불확실한 미래가 정말 괜찮다면 그 누가 뭐라 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가 괜찮으면 그 누가 내 삶에 대해 어떤 해설을 늘어놓아도 내 마음은 미동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괜찮지 않다면 바깥세상의 잡음은 내 마음에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아내를 만나기 전 나에게 마음을 주었던 이들에게 가공되고 포장된 '좋은 모습'만을 내보이고, 나머지 모습은 숨기려 했던 이유도 나 자신이 아직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흐르는 정릉천 옆에서 우리 둘만의 관계를 정의한 날 이후 내가 가진 모습 전체를 아내에게 다 까발리려 부단히 노력한다. 내가 짊어지고 있던 타인의 시선과 기대,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없는 걸 있는 체한 거짓된 모습들을 떠오르는 족족 아내에게 꺼내 보였다. 친구들과 나를 비교했고, 형과 나를 비교했고, 아빠와 나를 비교했고, 건너 건너 아는 사람과 나를 비교했다. 그럴 때마다 난 모자랐고, 게을렀고, 작아졌다. 신기하게도 마음속으로 꽁꽁 싸매 숨기려 했던 것들을 한번 밖으로 꺼내 햇볕을 쬐이니 이것들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 난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야. 돈도 이 정도밖에 못 벌고, 하는 일도 누가 보면 변변찮다고 생각할 수 있어. 그리고 미래도 불확실해. 남들이 보기엔 미친놈처럼 살아. 근데 난 이 삶이 좋아. 나한테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아. 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 남들이 바라는 나 말고 내가 원하는 나로 사는 것 같아. 생겨먹은 그대로를 소중히 여기며 사는 이 느낌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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