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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ly Mar 24. 2019

등대수(灯台守)

등대지기 가사의 일본어 원곡 해설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70년대에 처음 유행가로 불려졌던 '등대지기'는 가사나 악보를 본 적이 없었지만, 몇 번 듣고 쉽게 외워지는 부르기 쉬운 노래여서 다른 많은 노래처럼 오랜 세월 흐르도록 혼자 많이 흥얼거렸습니다. 어떻게? 한 번 들어 보세요.


 피아노 반주에 따라 부른 '등대지기 1절' 노래 동영상 - 크기(3.6메가바이트) 길이(1분 6초)

이제 한 번 '등대지기'를  제대로 불러보려고 찾아보니 분명히 2절까지 있는데 곡조는 비슷하지만 가수마다 조금씩 다른 가사로 노래하네요. '등대지기'는 모르는 사람 없고 많이 따라 불렀을 텐데 모두의 소원 중의 하나가 통일인 우리나라에서 만인이 부르는 노래마저 다르게들 부르니 도대체 웬일일까요?


어떤 분이 40년 동안 이 노래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노력하여 적어 놓은 글('등대지기의 원곡을 찾아서' - http://online4kim.net/xe/9734 )에 보니, '등대지기'가 원래 일본에 'The Golden Rule'이란 찬송가로 소개되었는데 여기에 제목과 내용이 전혀 다르게 일본어로 가사를 붙여 여박(旅泊, 1889년), 조선(助船,1929년) 등으로 불려졌답니다. 2차 대전 후에는 1947년 일본 문부성이 발간한 초등학교 5학년생의 음악 교과서에 시인 勝 承夫(かつ よしお, 1902-1981)가 '등대수(灯台守)'란 제목으로 작사한 것이 실리게 되었는데, 유경손(1943년 일본고등음악학교 성악과 졸업)씨가 번안해 한국에서도 불려지게 되었다는군요.


제가 부른 노래는 유경손이 번안한 가사의 1절인데, 요새 악보까지 찾아가며 노래 공부하다 보니 알쏭달쏭한 게 많아요.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한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밝은 건지 어두운 건지 조차 아리송한 달그림자는 어디에 얼어붙고 작은 섬은 또 뭘 모으는지? 말뜻을 우려내려 순하고 착한 머리 쥐어짜며 한없이... 우옵니다!


일본어로 된 가사 '灯台守(とうだいもり)'를 파헤치면 답이 나올까요?


-일본 문부성에서 발간한 음악책에 수록된 가사-

灯台守     作詞 勝 承夫, イギリス曲

こおれる 月かげ 空に さえて
真冬の 荒波 よする 小島
想えよ とうだい まもる 人の
とうとき やさしき 愛の 心

はげしき 雨風 北の 海に
山なす 荒波 たけりくるう
その夜も とうだい まもる 人の
とうとき 誠よ 海を 照らす


'등대지기'의 제목인 灯台守는 일본식 한자인데 우리나라 한자로 쓰면 燈臺手입니다. '등대'는 일본의 약식 한자와 우리 한자 간 표기상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것이지만, '지기'에 해당하는 일본 한자는 '守: 지킴(지키는 사람, もり로 읽음 - 동사 守(も)る의 연용형에서 파생)'이고 한국식으로는 '手: 손(조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두 언어의 표기와 뜻이 좀 다르지만 별 차이 없네요. 하지만, 말조심! 등대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지기'라고 부르면 혼납니다. "등대지기가 뭡니까? '항로표지관리원'이란 전문직인데..." 화나서 등댓불 꺼버리시면 어쩌시게요?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아니면 자고?'로 번역된 원문은 "こおれる 月かげ 空に さえて"인데, 이걸 한자로 다시 쓰면 "凍れる 月影 空に 冴えて"입니다.


月影(월영: つきかげ) 影은 '그림자'니까 月影을 우리말로 '달그림자'라고 하면 수면에 비친 달이나 달빛으로 인해 생기는 그림자를 뜻하지만, 일본어로 月影(つきかげ)은 月光(월광) 즉 '달빛'을 의미하지요. 日影(일영: ひかげ)이 한자어로는 해의 그림자지만 일본어로는 햇빛이듯이...


달그림자가 달빛이면 '얼어붙은' 달빛은 또 뭐죠? 빛이 언다니?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꼼짝 못 하는 빛인가요? 이걸 이해하려면 달이 내는 부터 따져 봐야겠어요.


농월(朧月:おぼろづき, 朧:흐릿할 농)은 '으스름달' 즉 봄철의 '희미한 달'이고, 명월(明月: めいげつ)은 추석 보름달 같이 밝은 달이지요. 한월(寒月: かんげつ)은 맑고 차가움을 느끼게 하는(寒そうな) 기나긴 겨울밤의 달(冬の月)입니다. 여름 달은? 땀나는 밤 나가면 모기가 와서 무는데... 다-알을 봐? 어쨌든, 달빛은 계절에 따라 흐리거나 환하거나 가슴이 시리도록 차갑고 맑은 느낌까지 많이도 주네요.


이제 달빛이 주는 느낌을 상상하며 "凍れる 月影 空に 冴えて"를 다시 볼까요?


凍れる는 '凍(こお)る(얼다, 차게 (느끼게)되다)'수동태니까 '凍れる 月影'는 '얼어붙은 달그림자'가 아니라 '차갑게 느껴지는 겨울의 맑은 달빛'이란 뜻이네요. 이걸 '싸늘한 달빛'이란 윤동주(尹東柱)의 시어(詩語)로 조미(助味)하면 '싸늘하고 맑은 달빛'이 되어, 다음 구절 '真冬の(한겨울의)...'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空(そら: 공중, 하늘)に(장소와 방향을 나타내는 격조사) 冴(さ)え(맑고 깨끗하다, 빛·소리 등이 선명하다)て(동작의 연속을 나타내는 접속조사)는 '하늘에 해맑게 비치고'라는 뜻인가요?


결국 "凍れる 月影 空に 冴えて"를 "싸늘하고 맑은 달빛 하늘에 비치고"로 해석하니, 지금까지 '물결 위에 찬 얼어붙은 달그림자'를 어둡게 내려보던 눈이 드디어 '맑고 밝은 달빛 은은한 차가운 겨울 하늘'을 바라보게 됐습니다.


두 번째 줄에 "한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이란 문장에서는 마치 '작은 섬이 자발적으로 파도를 불러 모으는' 느낌이 드는데, '모으는'으로 해석된 단어 'よする'는 일본어 고문(古文)에서 寄する波(밀어닥치는 파도)와 같이 쓰이던 옛 단어입니다. 현대 일본어로는 寄(よそ)る 또는 よせる로 쓰는데 뜻은 '부딪히다', '밀려오다'이지요. 그럼 두 번째 줄의 "真冬の(まふゆの: 한겨울의) 荒波(あらなみ: 거센 파도) よする 小島(작은 섬이란 뜻으로 おじま 또는 こじま로 발음되는데, 이 노래에서는 おじま로 불러요)"는 "한겨울의 거센 파도 밀치는 작은 섬"이라면 될까요? (국어사전 참고: 밀치다=힘차게 밀다, 놀치다=큰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다).


마지막 두줄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에 해당되는 가사는 "想えよ とうだい まもる 人の/とうとき やさしき 愛の 心"인데 이 문장을 한자를 섞어 다시 쓰면 "想えよ 灯台 守る人の/ 尊き 優しき 愛の 心"가 됩니다. よ는 명령형 격조사니까 想えよ는 "생각하라!"로 번역되고, 灯台(등대)(를) 守る(지키는) 人(사람)の(의: 소유격 조사)에는 '저'란 '관형사'가 없으니까 '어느 특정한 등대지기'가 아니라 '모든 등대지기'를 의미하도록 번역하면, 앞부분은 "생각하라!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가 되네요.


尊きき는 옛날에 썼던 형용사의 연체형인데 지금은 尊(とうと)い(신분이 높다, 고귀하다)와 優(やさ) し(이쪽이 부끄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형태로 쓰입니다. 번역 가사에는 '尊き'를 '거룩하고'로 해석했는데, 형용사 '거룩하다'는 원래 偉(위: 크다)라는 한자에 해당하는 순수 우리말로 지금은 '거룩하신 신의 은총'처럼 “성스럽고 위대하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등대지기는 밤새 불이 꺼지지 않도록 '불을 지키는' 야경꾼이고, 외떨어진 섬에서 고독까지 이겨내야 하는 고행의 수도자 같지만, 적어도 월급은 받고 일하는 공무원이었을 텐데, 그들의 마음이 모두 그렇게 '거룩하고 아름다울' 정도라는 칭송은 과한듯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해도 '거룩한' 사람으로 칭찬받으려면, 생명을 바치는 희생이나 신성한 능력을 보여 줘야 할 것이라, '尊き'를 '거룩하고' 보다 격을 조금 낮추어 '존귀하고/숭고하고/고결하고/하고/갸륵하고' 중에서 하나 골라야겠는데... 갸하고 아름다운!!(국어 사전 참고: 갸륵하다=착하고 장하다. 예: 정성(효성, 충성)이 갸륵하다)


다음에 오는 '愛の 心'를 보면 の는 모양이 소유격(-의)이지만 우리말에서 관형격(...으로 된)으로도 볼 수 있으니까 愛(あい: 사랑)の 心(こころ: 마음)는 굳이 '사랑하는 마음'이라 하지 않고 '사랑의 마음'으로 남겨도 되겠어요.


이제는 앞에서 단어와 문법을 기초로 이해한 가사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서 시적 구조를 분석해 볼 차례입니다.


1. 싸늘하고 맑은 달빛 하늘에 비치고 - 공중의 정황

2. 한겨울의 거센 파도 밀치는 작은 섬 - 바다의 정황

3. 생각하라!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 작자의 심상

4. 순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 작자의 심상


가사의 구조는 1행과 2행에는 각각 공중과 바다의 정황이 묘사되고 3행과 4행에는 작자의 심상이 그려져 있네요. 일본어 가사 1절의 형식은 2절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있는데, 기존의 '등대지기' 번역 가사는 안 그렇지요?


일본어 가사 전문에 대한 해석은 2절에도 1절에서와 유사하게 하면 되니까, 장황한 설명은 피하고 결과만 모아서 적어볼게요. 일본어는 단어를 띄어 적지 않지만, 4.4.3.3 음절에 맞게 단어를 띄어서 썼습니다.


灯台守     - 作詞 勝承夫(등대지기 - 작사: 가츠 요시오)

こおれる 月かげ 空に さえて(싸늘하고 맑은 달빛 하늘에 비치고)
真冬の 荒波 よする 小島(한겨울의 거센 파도 밀치는 작은 섬)
想えよ とうだい まもる 人の(생각하라!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とうとき やさしき 愛の 心(갸륵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はげしき 雨風 北の 海に(비바람이 몰아치는 북-해 바다에)
山なす 荒波 たけりくるう(우람하고 거센 파도 사납게 밀치는)
その夜も とうだい まもる 人の(그 밤에도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とうとき 誠よ 海を 照らす(갸륵하고 깊은 정성! 바다를 비춘다)

2절에는 북해라는 일본의 지리적 상황이 나오므로 한국어 노래에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대체되어있어요. 원래 가사 내용인 '북-해 바다에'를 '어두운 바다에'로 고치면 지리적 제약 없이 원곡에 충실한 가사가 되지 않을까요?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등대가 모두 무인화(無人化)되었고, 음악책에서도 노래가 빠져서 일본의 젊은 세대는 옛날에 녹음된 음반이나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서 밖에 '灯台守'를 들을 수가 없게 됐답니다.  


유튜브에 검색어로 'とうだいもり'라고 치시면 기악곡이나 합창곡 등 많은 동영상이 나오는데, 가사를 똑똑히 들으시려면 '川田正子 - とうだいもり, 灯台守'를 검색어로 쳐보세요. 川田正子(가와다 마사꼬, 1934 - 2006)씨는 어릴 적부터 아동 합창단에서 노래하면서 기량을 닦아 한평생 동요를 부르다가 별세한 유명한 여가수입니다. 그분이 부른 노래의 유튜브 링크(https://www.youtube.com/watch?v=bBsRdGZhjlM)를 누르면  灯台守를 바로 들으실 수 있어요.


とうだいもり를 저도 일본어로 불러서 이글에 삽입했는데, 앞으로 더 공부해서 노래를 잘 부르게 되면 나은 걸로 교체해 올릴게요. 좀 늦었지만 동요로부터 시작한 노래 공부!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니군요.

피아노 반주에 따라 일본어로 부른 '등대수(灯台守, とうだいもり)' 노래 동영상 - 크기(7.9메가바이트) 길이(2분 18초)


한국에서는 '등대지기'가 중학교 1학년 음악교과서에 실려있는데 일본에서처럼 언젠가는 시대에 맞지 않는 노래로 취급받아 교과서를 떠날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 노래가 일본이나 한국에서 지나온 여정과 같이 누군가 가사를 새롭게 붙여서 계속 부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는 가사야 어떻든 살면서 제일 많이 불러 본 노래 중의 하나인 등대지기를 옛날처럼 부르렵니다.


이전 글에 소개한 윤극영의 '반달'("푸른 하늘 은하수... 은하수를 지나서 어디로 가나...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 다음에 무얼 또 공부해서 노래 부를까 생각하다가 노래 끝 마디의 '등대'라는 단어에 끌려 '등대지기'를 선택했는데... 그럼 다음엔?


커버 사진의 등대는 프랑스의 한 섬 벨일(Belle-Île-en-Mer, 바다의 예쁜 섬)에서 찍었는데, 관광가이드 말에 따르면 인근에 살던 우체부가 취미로 찍은 이 등대의 사진이 프랑스에서 제일 많이 팔린 등대 사진이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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