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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ly Dec 25. 2015

부활절

어느 목수의 아들이 신분증을 천당에 두고 왔다고 하면 어떻게 믿지?

크리스마스는 매년 12월 25일로 머릿속에 박아둔 날짜에 오는데, 부활절은 왜 매년 같은 날짜에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성탄절 축하 인사나 연하장은 제 때에 돌릴 수가 있지만, 부활절 인사는 꼭 때를 놓쳐 다음 해로 넘겨야 한다.


"교황 성하! 가톨릭의 일관성 없는 날짜 관리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당장 제3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서 십자가의 못을 뽑아 부활절을 같은 날짜로 못 박아 주세요!"


어라? 가톨릭도 프로테스탄트도 아닌 데다 불자도 아닌 내가 부활절 축하 인사를 제 때에 못 해서 불만을 표시할 이유가 뭐지? 오늘이 양력 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인데, 마침 부활절과 겹친 것이 일식 일어난 것처럼 천지의 조화라 믿고, 역법(易法)과 사주를 따져 오늘을 기념하자고 토하는 방성(放聲)인가?


실은 내가 32년 만에 너를 다시 만난 날이 작년 4월의 부활절이었는데, 기념하여 인사를 하려고 하니 작년 부활절에 맞추면 4월 24일이 되고, 교회력(敎會曆)에 맞추면 4월 8일 오늘이 된다. 나는 아내를 처음 만났던 날을 연중 최고의 기념일로 삼고, 결혼한 이래 매월 한 번씩 기념행사를 하는데, 너와의 새로운 만남을 기리기 위해 24일과 부활절을 모두 기념일로 잡으면, 365일이 조만간 기념일로 꽉 차서, 내 삶의 기록이 기념행사 일지가 될 것이다.


너를 위한 기념일로는 딱 하루만 잡아야겠는데, 날짜를 기억하기가 좀 불편하지만, 공의회가 열리기 전까지는 가톨릭 신자인 네가 기념하는 부활절을 우리가 다시 만난 날로 기념하기로 하자.


작년 부활절은 화창한 봄 날씨가 상쾌하여, 약속 장소에 가기 한 시간 전에 해운대에 도착해서, 청결한 바닷바람 쐬면서 동백섬 주변을 돌아다녔다. 우리는 그곳을 산책하며 즐거워하는 다른 행랑객들처럼 수평선을 향해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해안을 떠가는 배들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으며, 만남을 기다렸다. 이윽고, 해안가 산책로를 따라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한식당의 문을 열어보니, 네가 아직 안 왔기에 급히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았다. 설레는 감정이 얼굴을 붉혔다. 나는 회우(會遇)의 감동을 보이지 않으려고, 침착하게 나를 달래며 표정을 다듬었다.


- 만남의 순간은 어땠지? 기억이 안 난다.


우리가 보낸 그날 하루의 이야기를 작년에 생각나는 대로 간추려 네게 보낸 후에 뭔가 빠진 느낌이 들어서 다시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지만, 더 나올 게 없더라. 이제 다시 부활절이 왔어도 기억을 짜내어 더 길게 쓸 수 없는 작년 부활절의 일은 희미하나마, 내 인생에 오래 두고 기념할 의미가 있는데, 그날을 회억(回憶)하는 동안에 언젠가는 재회의 추억을 노래하는 장편의 마하바라타(힌두교의 대 서사시)가 나올 것이다.


내가 안부를 묻지 않고 편지를 마무리하는 것이 늘 딱딱하게 여겨지지만, 짧은 문자 통신에 익숙한 바쁜 일상의 주인공들에게서 시간을 빼앗는 일이 더욱 미안하여, 안부의 물음표를 건너뛰어 끝 줄에 마침표를 찍는다. 늘 냉랭한 편지가 되지만, 너에게만이 아니니 섭섭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안부 적을 자리를 못 찾아 그러려니 생각해라. 이 점을 사모님께도 전하고, 옥토끼와 귀둥이에게도 알리면, 가족 모두가 누군가의 축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겠지?


- 2012년 4월 8일, 부활절에 옆구리를 창에 찔린 긴 수염 아저씨가 - "내가 다시 왔어! 재림했다구! 못 믿겠으면, 여길(옆구리) 만져봐!" - 믿음의 근거 = 주민등록증, 꼭 가지고 다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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