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옛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vely Dec 26. 2015

활빈당(活賓黨)

소자본 고수익의 벤처사업  계획

모두가 가난해서 보릿고개에 풀뿌리 나무껍질 가리지 않고 캐 먹고 벗겨 먹던 시절에 창궐하여, 굶주린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었던 빈대들이 1940년대부터 살포한 DDT의 살충력 앞에 거의 전멸해, 한국에서는 전설의 곤충이 된 지 수십 년이 되었다.


옛날 내가 대학 다닐 적에 친구에게 귀찮게 붙어서 얻어먹는 행위를 일컬어 ‘빈대 친다’고 했는데, 해충인 빈대를 말로만 들었지, 본 적도 물린 적도 없어서 나는 그 의미 심장한 말의 뜻을 전혀 몰랐었다. 이제는 나라가 좀 살만하니까, 젊은 세대는 보릿고개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운치 있는 전원 풍경을 떠 올리는 데, 드디어 그들에게도 보릿고개 시대의 빈대 맛을 체험할 기회가 왔다.


해외여행이 바로 그것인데, 내가 경험한 바에 비추어 그 빈대 맛이 어떤 건지 실상을 밝힌다.


작년에 플로리다를 여행하다가 허름한 모텔에서 하루 묵으며, 어둠 속에서 밤새도록 손톱으로 눌러 터뜨린 벌레 수가 삼십을 넘는다. 다음날 아침에 피로 얼룩진 침대 시트를 보고 놀라신 마님께 간 밤에 목격한 벌레들의 사진을 보여 드리며 밤새워 대군을 무찌른 영웅담을 들려드렸더니, 감격하여 내 덕분에 벌레에 안 물리고 잘 잤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며칠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님 다리 전체에 두드러기가 줄줄이 드러나며 부풀어 올라 영문을 모르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피부과 전문의도 증상을 보고 확실히 몰라서 대충 미세한 곤충이나 알레르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하고, 범용 알레르기 치료제만 처방을 해 주었다. 그때까지도 두드러기를 일으킨 것이 침대 시트 위를 기어 다니던  벌레였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옻이 오른 거라고 믿었다.


몇 달 전에 우연히 신문에 게재된 큼직한 곤충 사진을 하나 보았다. 자세히 보니, 플로리다의 모텔에서 밤에 목격한 벌레들의 기록사진과 똑같이 생긴 놈이 버젓이 나와서, 피를 빨아먹고 있는 모습, 순간 경악했다. 꺄-악! 그게 바로 말로만 듣던 전설의 곤충 빈대라니! 신문 기사를 다시 면전에 대하자, 점점 마님을 괴롭혔던 두드러기가 몸에 솟는 기분, 스멀스멀 가렵고 소름이 끼치는 짜릿한 느낌이 얼굴에서 경련을 일으켰다.


기사의 내용에서 대충 그 무서운 빈대의 정체를 파악하게 된 후에 당장 인터넷에 '빈대'치고 검색을 해서 내력을 알아보니, 유럽 여행 중에 빈대에 물렸던 한국 배낭여행자들의 눈물 나는 실화들이 즐비했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빈대 때문에 여행을 잡친 커플들의 법정투쟁, 뉴욕에서 빈대에 스트레스받는 호텔들과 문 닫은 옷 가게들, 그리고 값싼 월세 집에서 빈대에 물려가며 고생하시는 캐나다 동포들의 서글픈 이야기가 두 눈을 적셨다. 


빈대와의 동거가 비록 뼈에 사무치게 슬프긴 하지만, 남들의 이야기라고 자위하며 피해자들의 이야기보다는 빈대 자체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좀 더 학문적인 설명을 찾아 봤더니, 상상도 못 할 끔찍한 사실이 또 있었다. 플로리다의 빈대들이 뉴욕 시에 사는 빈대들 보다 진화를 덜해서 살충제에도 약할 뿐만 아니라 성질도 훨씬 온순해서, 이들에게 처음 물린 사람들에게는 항체가 생기지 않아 가려움증도 없고 물린 부위가 부풀어 오르는데도 일주일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재수 없게도, 작년에 내가 처치한 불쌍한 빈대 군단이 그냥 죽은 게 아니라, 나에게도 항체를 남겨 주고 갔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지난 삼 주일 동안 독일 북부와 폴란드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잠을 잤다.  정확히 새벽 세시 삼십 분에 온 몸이 스멀거려서 잠을 설치며, 혼자서 열심히 간지러운 부위에 연고를 바르고 있었는데, 잠을 깬 마님이 발가락이 가렵다고 해서, 모기가 있는 줄 알고 불을 켰는데, 우악! 배가 통통한 빈대 한 마리가 침대 시트 위를 기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름이 끼쳤지만, 우선 증명사진을 한 장 찍으려니까 날개도 없는 놈이 요리조리 잘도 도망간다. 시트를 계속 뒤지며, 용케 초점을 맞추어 쓸 만한 기록사진이 나오자마자, 시트 천 사이에 잡아 누르니 붉은 피가 퍽 터져 나오며 동작을 멈추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도 몸에서 피가 쭉 빠져나가서, 혈압이 쫙 내려갔다.


벼룩이 간을 내 먹지 내 피를 빨아먹냐? 고얀 놈아! 화가 나서, 피 바다에 뻗어 있는 그놈의 사진을 한 장 더 찍고는 마님에게 우리를 문 벌레가 빈대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자 작년에 빈대에게 물려서 고생했던 마님이 당장 짐 싸서 호텔을 떠나자고 하신다. 한밤에 옷을 차려 입고 짐을 싸 놓고는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했더니, 빈 방이 없다고 1인실을 하나 내주었다. 그래서 아침에 2인실로 옮겨 하루 더 지내고, 어제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직도 몸이 가렵고 빈대 물린 자국들이 부어 있다.


빈대의 이야기가 슬프다고 울고만 있을 일은 아니다. 눈물 뒤에는 웃음도 있다. 바로 불경기에도 굳세게 버티며, 유망 사업을 키우고 있는 뉴욕의 빈대 해결사들이 들려주는 성공 사례들이다. 개 코에 빈대의 냄새를 맡게 한 후 97.5%의 정확도로 빈대를 찾아 내게 하는 그들의 사업비용은 그야말로 개 값인데, 빈대 퇴치로 받는 돈이 건당 600불은 된단다.


한국에도 해외 여행객들이 들여오는 빈대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자연히 빈대 해결사를 부르는 고객들이 늘 것인데, 이 부문에 투자를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 하드웨어 상의 버그를 잡아 내는 고가의 첨단 테스트 장비를 안 쓰고, 토종개 두 마리만 잘 훈련시켜서, 나와 베드버그(Bedbug: 빈대)들을 잡아 내면 근간에 수 억을 벌 수 있을 거다.


벤처사업 프로젝트 코드는 '활빈당'으로 이미 내가 정해 놨다. 활빈당(活賓黨)은 빈대로 먹고살자는 뜻이야. 홍길동전에 나오는 의적 활빈당(活貧黨)과는 빈(빈대의 賓) 자가 다르지. 우와, 벌써 돈 냄새가 폴폴 나네!


- 2011년 9월 13일, 개천 치고 가재를 잡았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빈대 몇 마리만 잡아 줘도 빈대떡을 오만 장 사 먹을 수 있을 거다.


추신: 빈대에 대해 알아낸 사실들이 좀 있다.


조선시대에 서울 정동에 빈대가 많아서 빈대골이라 불렀는데, 거기에 빈자떡 장수가 많아서 빈대떡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밥도 못 먹고사는 빈자의 피를 빨고 살아온 빈대가 얼마나 미웠으면, 씹어 먹는 떡 이름에까지 갖다 붙였겠냐? 설명이 좀 무식했나?


빈대를 유식하게 설명하면, 영어로는 Bedbug(침대 벌레), 일본어로는 トコジラミ(床虱)인데, 별명까지 있다 - 南京虫(なんきんむし/중국의 난징 벌레). 라틴어 학명은 Cimex lectularius. 흡혈성 기생 곤충이다.


한자로는 빈대(賓對), 손님 빈(賓) 자에 대할 대(對) 자다. '빈대 친다'는 말이 다 이유가 있다. 빈대는 아무것도 안 먹고서도 1년은 버틴다니, '빈대 친 녀석'을 굶겨서 죽일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자. 빈대 죽기 기다리다 홧병에 내가 먼저 간다.  패서 쫓아 내든 지, 힘없으면 어디서 DDT를 구해다가 친구 코에 바르는 게 상책이다. '빈대도 낯짝이 있지...' 코에 DDT를 바르고 어떻게 붙어 있겠냐?


DDT(Dichloro-Diphenyl-Trichloroethane)는 1939년 스위스의 과학자가 살충효과를 밝혀낸 후, 2차 대전 중반에는 말라리아와 티푸스 등 곤충으로 인해 일어나는 질병 구제에 쓰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농업용 살충제로 많이 사용됐는데, 몸속에서 내분비계 이상을 일으키는 DDT는 먹이사슬의 위쪽으로 갈수록 체내 축적이 심해져서 국내에선 1971년부터 사용을 금지했대. - 믿거나 말거나 인터넷을 이 잡듯 뒤져서 알아낸 사실이야.


매거진: 다시 쓴 편지 / 숨은 이야기

매거진의 이전글 부활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