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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ly Dec 25. 2015

서생원

독서: 독 안에 든 책 - 서생원(書生員) 꼼짝 마!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에서 대구로 이사 간 후에 집을 많이 옮겨 다녔는데, 중학교 다닐 적에 살던 집 우물 곁에는 커다란 장독이 두 개 있었다. 배추도 간장도 담겨 있지 않은 그 독 안에는 이사할 때 정리되지 않은 잔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고, 책장이 달리 없었던 까닭에 교과서 이외의 책들 역시 그 삭막한 독 안에 갇혀서 딱딱한 물건들과 몸싸움하는 사이 귀가 접히고 살점이 뜯겨서 늘 탈출만을 꿈꾸고 있었다.


가끔 내가 독에서 꺼내 준 책들 중에는 표지가 낡아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진 잡지책도 몇 권 있었지만, 그들은 내가 묵직한 한국단편선집 중의 한 권을 손에 잡는 순간 여지없이 장독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운 좋게 장독을 탈출한 단편집을 꼭 왼팔 뒤꿈치를 마루 바닥에 대고 엎드려서 읽었는데, 집에 앉아서 공부할 책상이 없었던 나는 그런 자세를 불편하게 느끼지 않고 전집을 야금야금 다 꺼내 읽었다. 지금은 그렇게 읽은 소설의 내용이 거의 모두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슬픈 공명을 일으킨 것이 하나 있다 - '취미와 딸과'.


불현듯 그 소설을 다시 읽어 보고 싶어서 소설가의 이름에 '최태욱'이라고 써넣고 인터넷에 찾아보았더니, '취미와 딸과'는 최태응(崔泰應)의 소설이었다. 읽은 지 사십 년이 다 되는 소설가 이름이 기억과 다른 것은 작가와 작품에 대해 교과서에서 배운 적도 다시 들어 본 적도 없으니까 이상할 게 없지만, 오랫동안 작자와 제목을 뇌까리며 사춘기에 읽은 슬픈 사랑이야기를 기억 속에서 음미해 왔는데, 얼마 동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많은 생각에 밀려 소설에 대한 생각이 자리를 뜬 사이, 작자의 이름마저 바뀌었다. 이제는 생생하던 나의 기억도 많이 흐려진 것이 분명하다. 남들도 다 나이를 먹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노화에 따른 일종의 기억상실을 벌써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젊은 오빠에게는 말이다. 


한국을 떠나 온 지난 이십여 년 동안에 한국말 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나는 '과거 속에 그려진 나의 세계'를 통해서만 정감 어린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 그러니 만약 과거 사실에 얽혀 짜인 그 세계는 계속 기억에서 꺼내 주지 않으면, 줄이 끊긴 연처럼 멀리 날아가 다시는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한 올을 과거 속에 짜 넣으며 시간을 그리고 있다.


근자에 인터넷에 '취미와 딸과’의 전문(全文)을 실어 놓은 사이트에 들어가 다시 읽어보니, 박박 머리 시절에 기억 속에 박아둔 줄거리보다 훨씬 더 선정적인 느낌이 든다. 해방 전인 1941년에 발표된 이 소설이 우리의 국어 교과서에 소개되었던 황순원의 '소나기(1952년작)’에게는 십 년 선배 벌인데, 소설 속의 시대 배경은 해방과 전란을 겪은 격동의 십 년 속에서도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취미와 딸과’의 소년이 강주사의 딸을 사랑하는 데에는 '신분적 제약'이 걸림돌로 보이지만, ‘소나기’의 소년과 윤초시네 증손녀 딸의 순정 나누기에는 빈부와 반상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우리는 늙어가면서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을 병적인 노화현상으로 보면서도 감정이 무뎌져 가는 것은 병리적 현상으로 보지 않는데, 가끔은 낡은 순정 이야기라도 읽어서 마른 감정에 물을 뿌려 주어야 한다.


우리 늙은 마음을 순정으로 정화하자!


혹시 내 말에 정말로 순정소설을 읽고 슬퍼서 눈에서 잔 별들이 마구 떨어지거든, 알퐁스 도데의 ‘별’을 봐! 물이 모두 하늘로 올라갈 테니까.


- 2012년 4월 21일, 갑자기 옛날 옛적 독 안에 든 책들이 어디로 탈출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홧김에 손바닥으로 키보드를 털어 보니 ‘별’의 ‘*’ 얘기가 다 쏟아져 나오네. * 밝은 밤 * 속에서 *을 헤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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