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국립공원 여행 - 4주 4천 마일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지만 모뉴먼트 밸리 공원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좀 늦어서 우람한 바위들이 산같이 솟아 있는 평원의 저녁 풍광을 즐기며 천천히 차를 몰아 나아가니, 기단 위에 조각된 거상처럼 우뚝 선 바위산도 각자 다가와 생명력을 과시한다.
멀리 언덕에는 작은 집 한 채가 있어 올라가 보니 박물관이라고 쓰여 있다. 아무도 없는 박물관을 지키는 귀신의 목소리... "여기가 원래는 1928년에 세워진 인디언과 백인들의 교역소(Trading Post)였어. 주인님이 1929년의 대공황으로 폭삭 망해서 빈털터리가 됐어. 존 포드(John Ford) 알지? 주인님이 그 영화감독을 여기로 모셔와서 영화를 찍게 했는데... 앗싸! 그 후 모뉴먼트 밸리는 거의 모든 서부극의 촬영장이 되었단다."
박물관은 닫혀있지만 뿌연 유리창 너머로 낡은 사진들을 보고 마당에 놓인 마차에 들어가 사진도 찍고 나서 금빛 물든 평원을 바라보노라니, 뉘엿뉘였 서산에 해가 기울고 땅에 쓰러진 바위 그림자도 가물가물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아차! 저녁 놓칠 뻔한 어제 일을 벌써 까먹고 또 온종일 구경만 했으니... 누가 뱃속에서 창자를 잘록잘록 쥐어짜며 피리를 부니, 밥통이 꼬록꼬록 합창을 한다. 음악에 맞춰 발도 춤을 추며 가속페달에 펌프질 하니, 차도 흙먼지를 일으키며 쌩쌩 달린다. 그런데, 우리는 숨도 안 쉰다. 그러다가... 휴-우!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묻는다.
"식사 시간 끝났나요?"
날이 새자 바로 일어나 아침 먹고 서둘러 모뉴먼트 밸리 공원(영어명: Navajo Nation's Monument Valley Park 또는 Monument Valley Navajo Tribal Park) 입구로 차를 몰았다.
지도상에 애리조나주에 있는 모뉴먼트 밸리의 공원 진입로는 유타주에 있다. 미국의 서부지역에는 정부의 행정과 치안에서 독립된 인디언 자치구가 있다. 자치구라는 것이 뭐냐 하면? 미국 땅에 주인 허락 없이 맘대로 들어온 백인들이 주인들을 몰아내고 집을 지었다. 마을이 생기고 도시가 건설되고 나자, 마음씨 고운 백인들이 남은 지역을 인디언들에게 내어 주며 말했다: "너희들 맘대로 써!" 하지만, 거기에도 미국 법은 적용된다.
인디언의 자치구역인 나바호 영지(Navajo Nation) 안에 있는 모뉴먼트벨리 공원은 미국 정부가 관활하는 국립공원이 아니라서 국립공원 패스가 있어도 입장료를 따로 받는다. 얼마 안 되는 입장료를 따져서 미안한데, 저절로 돈 들어오는 장사니까 설비투자를 안 해서 공원 입구에서부터 도로가 엉망이다.
완전 비포장도로이기 때문에 조금만 가속해도 길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인다. 자연 그대로의 멋을 살리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랄까? 길바닥에는 뾰족한 돌도 박혀있고 큰 돌까지 굴러 다닌다. 주행 제한 속도가 시속 15마일이지만, 단속하는 경찰도 없다. 그걸 넘겨서 망가져 움직이지 못하는 차에 벌금 딱지만 붙이면 될 테니까.
우리의 포드 세단차는 차체가 낮고 타이어도 얇아서, 바퀴가 터질 것 같은데... 그걸 알고 차도 살금살금 기어 나간다.
입구에서 받은 지도에는 순환코스와 코끼리암 낙타암 세 자매 바위 등등 바위들의 이름도 표시되어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그 바위들의 이름과 모양을 확인하기보다는 멀리서 보는 경치가 볼만하기 때문에 우리는 근처에 이르러 사진만 찍고 지나간다.
기암들을 보면서 달리다 보니, 모뉴먼트 밸리의 이색적인 경치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고 해서 영화감독 존 포드가 제일 좋아했다는 곳, 바로 존 포드 포인트가 우리를 기다린다. 안내서에는 이곳에서 일출과 일몰의 사진을 찍으라고 권고하지만,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길을 달리는 건 위험할 것 같다.
모뉴먼트 밸리 내에는 지정 상가가 있는데도 상가 밖 외딴곳에 인디언 부부가 차를 세워 놓고 기념품을 팔고 있다. 아마 무허가 장사꾼 같은데, 좌판을 보이며 꿈을 잡아두는 드림 캐처라든가 화살 액세서리 등을 집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나바호 영지 내에서는 흔한 물건이지만, 특별히 이 좌판에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값을 깎아준다는 말을 들으니, 귀가 솔깃해져서 돌을 갈아서 만든 목걸이와 귀걸이를 산다. 그 후 우리 마님의 모습이 달라진다. 어떻게? 디즈니 만화 영화에 나오는 포카 혼타스! 귀엽네요.
순회코스를 다 돌고 나서 공원 입구로 다시 돌아와 식당에 들어가니, 나바호 브래드라는 인디언의 빵을 만드는데,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빈대떡처럼 넓게 펴서 기름에 튀겨 낸다. 접시에 올려놓은 모양이 꼭 구멍 안 뚫린 도너스 같은데, 조금 뜯어서 맛을 보니 고소하다.
나올 때 매점에서 나바호 브래드라고 쓴 것이 진열대에 있어서 튀김인 줄 알고 한 봉지 샀는데, 나중에 열어 보니 제빵용으로 배합된 밀가루였다. 다음에 도착한 호텔에서 인디언 닮은 미화원에게 선물로 주었더니 그게 뭔지 몰랐다.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들은 그 여자는 밀 입국해 호텔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멕시코 인이었다.
모뉴먼트 밸리를 떠나기 전에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나바호 드래드를 먹으며 돌아온 길을 바라보니, 흙길에 먼지를 일으키며 차들이 기어간다.
오후가 되어 공원을 빠져나와 백미러에 모뉴먼트 밸리의 거석들이 아지랑이에 가물거리는 것을 보며 우리는 북쪽 길로 들어간다. 도로는 잘 포장된 아스팔트 길이지만 기복이 심하고 구부러진 곳도 많은데, 먼 길가에 접시 같은 것이 하늘에 떠 있다. 지도를 보니 멕시코 모자(Mexican Hat)라는 기암이다.
30마일쯤 지나서 다시 거친 돌길이 나오고 이정표에는 신들의 계곡(The Valley of Gods)이라고 적혀있다. 벌써 오래전부터 뒤쫓아오는 차를 못 보고 달려왔는데, 멀리 앞을 봐도 달리는 차가 없다. 차가 고장 나면 어디에 도움을 청하지? 우리는 분명 모험을 하고 있는 거다.
모뉴먼트 밸리에는 구부러진 길이 많아도 좀 평평했는데, 여기에서는 내리막길 끝에서 바로 오르막이 시작되는, 파도처럼 굴절된 곳이 많다. 그런 곳을 지날 때는 차체가 꼭 땅을 긁으며 소리를 낸다. 그 잔돌이 으스러지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들으니, 꼭 차의 밑창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잘못 온 길 되돌아가려고 해도 멀리 앞을 보면 평지 같아서, 어쩔까 고민하는 동안에도 차는 잔돌을 튀기며 전진한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막한 길!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에도 새가 날고 하다못해 풀벌레가 기어가는데, 계곡에 들어와 한 시간이 넘게 달렸는데도 도로에 차가 없다. 지금껏 한적한 곳을 많이 다녀 봤지만, 이렇게 인적 없는 길을 불안하게 달린 건 처음이다. 게다가 차가 땅을 긁을 때마다 발 밑에서 돌가루가 튀어 오를 것 같은데, 경치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앞에 보이는 건 아름다운 경치가 아니라 단지 차의 밑창을 긁는 무서운 장치일 뿐이다.
짐작하건대 '죽음의 계곡'이라 하여도 좋을 이곳의 이름이 '신들의 계곡'인 것은 바로 이 안에 사는 주민들이 신상처럼 우뚝 선 거석들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의 경치가 모뉴먼트 밸리에 버금간다고 밝힌 선행자들의 권고에 속아서 들어와 도로 사정뿐만 아니라 인적이 없어 불안에 떨며 꼬박 두 시간을 달리다가 내비게이터를 보니 그럭저럭 나갈 때가 된 것 같다.
저만치 흙길이 끝나는 곳에서 포장도로로 곧게 올라가는 경사로가 있는데, 그 앞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웅덩이에 물이 가득 고여 있다.
이걸 건너야 경사로를 올라가는데... 하지만, 웅덩이에 돌진했다가 차에 물이 들어오면 꼼짝도 못 할 것 같아서 차를 세우고 다시 후진한다. 혹시 멀리에서라도 다가오는 차가 없는지 아스라한 희망을 걸고 온 길을 한참 둘러보아도, 자동차가 일으키는 흙먼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옛날에 누가 예수님도 왼발 빠지기 전에 오른발로 물을 차는 고속 동작으로 물 위를 가셨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혹시 속도를 높여서 질주하면 차가 물 위에 뜰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골을 때린다.
엔진을 시동하고 전속력으로... 붕-붕-붕! 철렁! 차창 양쪽으로 물이 갈라지더니, 차 앞으로 검은 것이 다가온다.
"아-아! 아스팔트!", 드디어 우리 차가 포장도로 위를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북방으로 200마일, 모압(Moab)을 향해 계속 길을 가는데... 어느덧, 어둠이 찾아와 우리는 길가에 있는 작은 피자 레스토랑으로 들어간다. 식당 안에는 수십 마일 밖에 있는 카페나 약국의 광고들이 있다. 그럼 우리가 커피 한 잔 마시고 소화제라도 사려면 과연 얼마나 돌아다녀야 하나? 미국은 정말 불편할 정도로 넓은 나라다.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 수직선 하나만 보여 주는 내비게이터를 따라 고속도로를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