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국립공원 여행 - 4주 4천 마일
어둠 속에 먼 길을 달려 나바호 인디언이 경영하는 호텔에 도착하니, 웨이터는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키며 식사를 마감한단다. 우리 시계는 8시인데, 왜 벽시계는 9시일까? 인디언 자치구인 신리(Chinle)가 애리조나주에 있지만, 지방시는 지리적으로 같은 자오선 상에 있는 애리조나주보다 한 시간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그걸 모르고 저녁을 먹기 위해 어둠을 헤치고 달려왔던가? 아!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접시에 남은 귀한 음식들뿐이다.
우리는 아침 먹고 나서, 바로 인디언 자치구 내에 있는 공원안내소로 들어간다. 공원에는 남북 양쪽으로 갈린 길을 따라 전망대와 계곡 진입로가 있는데, 두 길을 모두 가서 보기에는 시간이 없고, 벼랑 아래의 풍경도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는 남쪽 길을 따라가기로 한다.
다른 국립공원들의 레인저(Ranger)처럼 여기서도 인디언 자원봉사자들이 공원을 소개한다. 옛날에 이 계곡의 부족 이름이 나바호 인디언 말로 TSEYI(바위들 사이란 뜻 즉 캐니언)였는데, 주민들이 뉴멕시코의 스페인어 사용 지역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와서부터는 인디언 고유의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Chelly라고 썼단다. 요약하면 '캐니언 디 셰이'는 'Chelly 인디언이 사는 협곡'이란 뜻이고, 스페인어로 적으면 Canyon de Chelly인데, 영어로 발음하면 '캐니언 디 셰이'처럼 들린다.
이곳에 아나사지(Anasazi)라는 선조 인디언들이 벼랑에 집을 짓고 살다가 떠났는데, 옛날 집터가 아직도 캐니언 안에 남아있다. 현재는 계곡 안에 40여 가족이 살고 있다는데, 집터가 보일 때마다 망원경으로 확인해 봐도 힘들게 벼랑에까지 올라가서 사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계곡 안의 토착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제법 비싼 인디언 가이드를 동반하고 가야만 볼 수가 있고, 일반 관광객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White House라는 옛날 집이 있는 벼랑 아래까지만 자유롭게 가 볼 수 있다.
계곡 진입로 안으로 들어가는 산행길은 보호철책도 없이 울퉁불퉁 거칠게 바위를 깎아서 만든 가파른 길인데, 바위에 까칠까칠한 줄무늬가 있다. 마치 붉은 모래가 굳은 듯한 이 사암은 공룡이 살던 200만 년 전에 애리조나주와 유타주 및 텍사스주에서 형성된 신리 퇴적암(Chinle Formation)이다.
하산 장비도 없이 험한 길을 내려가다가 가끔씩 서면, 둥글둥글한 황갈색의 바위들이 따뜻한 느낌을 주고, 눈앞에 우뚝 선 검붉은 바위산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얼굴에 뜨거운 열기를 반사한다.
위에서 보기에 그리 멀지 않던 계곡을 한 시간 동안 내려와서 보니,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어렵게 걸어 내려와 계곡 아래에 이르니, 긴 통나무들을 가로로 쌓아 육각형으로 지은 호간(Hogan)이라는 인디언의 집이 하나 있고 그 주변에 작은 밭이 있다. 하지만 풀도 별로 없고 동물도 안 보이는데 인디언은 무얼 해서 먹고살까? 나중에 알고 보니, 놀랍게도 그들은 주로 정부의 배급을 타 먹고 있었다.
이정표는 없지만 더 내려가 개울을 건너니, 노점상이 즐비한데, 계곡에 사는 인디언들이 길가에 상을 펴고 앉아서 열심히 수공예품을 만들거나, 갈대 같은 붓으로 잉크를 찍어서 평평한 돌 조가리에 도마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
기념품 상가를 지나고 나니, 나바호 인디언의 조상들이 살다가 버리고 간 옛날 집들이 머리 위에 나타난다. 바로 계곡에서 제일 유명한 White House다. 저기에 미국 대통령이 살고 있을까? 이렇게 상상하고 있으니까, 대통령 전용 헬리콥터가 벼랑 아래로 날아온다.
계곡에서 다시 비탈길을 걸어 올라와 캐니언의 남쪽 테두리를 따라 차를 몰고 올라가니, 계곡 아래에 시냇물이 흘러가고 물길 따라 나무들도 자라고 있어서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다. 간혹 염소들도 떼를 지어 풀을 뜯고 말을 탄 사람들이 지나가기도 한다.
캐니언 주변도로를 더 올라가니, 계곡 바닥이 점점 더 깊어지며 건너편 벼랑의 가파른 바위틈에 가끔씩 제비 집처럼 붙어 있는 인디언들의 옛날 집들이 보인다. 그걸 좀 자세히 보려고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니 발아래에 사람이 있다. 나는 떨어질까 봐 겁이 나서 절벽 근처에서는 난간을 붙잡고도 못 서 있겠는데, 그 사람은 벼랑 끝까지 기어가서 사진을 찍고 있다.
겁은 나지만 절벽 가까이에 다가가서 내려다보려는 순간, 거대한 쌍봉이 눈앞으로 불쑥 올라온다. 거미 바위(Spider Rock)가 내 눈을 찔렀나? 나는 얼른 눈 감고 얼른 발을 빼고 뒤로 물러나 호흡을 가다듬는다.
우리가 한 동안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지평선 가까이 내려온 태양이 반대편 벼랑을 등황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이제는 어둠이 오기 전에 길을 떠나야 한다. 모뉴먼트 밸리를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