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국립공원 여행 - 4주 4천 마일
뜨거운 광천수를 뿜어내 천지간에 거대한 물기둥을 세우는 가이저들이 곳곳에 퍼져 있고 서식 동물도 다양하여, 1872년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옐로스톤 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은 우리 여정의 하이라이트이다.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에 발을 들이고서부터 해발 2100미터 고지에 이르기까지 60마일을 달려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남쪽 문에 들어서니, 차도 양쪽으로 치워진 눈이 가슴 높이만큼 쌓여있다. 마치 냉동실에 들어온 것처럼 300미터 더 높은 곳의 르위스래이크(Lewis Lake) 호수는 6월 초인데도 전체가 꽁꽁 얼어붙어 있다.
냉동실 길이를 약 20마일이라고 할까? 해발 2518미터에 있는 고개(Craig Pass)를 넘어가니, 눈 녹은 봄 나라에 아직도 두꺼운 털옷을 걸친 큰 사슴(Elk)이 새 풀을 뜯는다.
산기슭으로 내려가며 보니 산불이라도 난 듯이 흰 연기가 뽀얗게 피어오른다. 연기를 따라가니, 공원안내소 근처에 있는 평지에서 올드 페이스풀 가이저(Old Faithful Geyser)가 공중에 수증기를 내뿜고 있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데스밸리 국립공원의 2/3에 달하는 9000평방 킬로미터의 방대한 공원이라, 관광안내서에는 공원 안에 있는 로지 호텔(Old Faithful Lodge)에 숙박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로지 호텔은 비싼 데다가 적어도 1년 전에는 예약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30마일 떨어진, 공원 서문 근처의 웨스트 옐로스톤(West Yellowstone)에 호텔을 예약해 두었다.
공원안내소에서 호텔까지는 약 30분 거리니까, 우리는 천천히 가도 될 걸로 예상하고, 근처에 있는 가이저들도 둘러보면서 즐거움을 만끽한다. 해가 질 때쯤에 다시 차를 타고 호텔로 내려가는데, 앞에 가는 차 옆으로 들소 한 마리가 뛰어나온다.
다행히 충돌은 없었지만, 그걸 본 후부터는 가속페달을 밟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길을 건너 간 들소는 갑자기 가속장치가 고장 난 차 한 대가 천천히 기어가는 걸 보며 혀를 내민다. 어둡고 썰렁한 시내에 도착해 호텔 안에 들어가니 배가 고프다.
다음날 아침, 공원의 서쪽 문을 지나 메디슨강(Madison River) 옆의 도로에 이르니, 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사람들은 차 안에서 강 건너 관목 숲을 향해 열심히 사진도 찍는다. 망원경으로 강 건너편을 보니 큰 사슴들이 나뭇잎을 뜯어먹고 있다.
생태체험에 금세 재미가 붙어서 다시 천천히 달리며 좌우를 살피니, 늑대처럼 생긴 코요테 한 마리가 늪지에서 조심조심 거위 뒤로 다가가 몸을 감춘다.
이런 흥미로운 광경은 얼마 안 가 들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시냇가에 이르렀을 때 또다시 생생하게 눈앞에 나타난다.
죽은 들소의 머릿뼈 앞에서 묵념을 올리는 듯 조용히 서 있는 존엄한 생명체! 늪지에서 본 코요테 같지만, 그의 몸집은 곰처럼 크고 까맣다.
잠시 후 그는 느긋하게 뼈를 갉아먹고 트림을 한다. 그는 누구일까?
옆에서 나처럼 숨 죽이고 사진을 찍고 있는 분에게 옐로스톤의 곰은 좀 다른 것 같다고 아는 척을 하니까, 정답을 알려준다. 곰이 아니라, 옐로스톤 국립공원 안에서 보기 드문 검은 늑대라고...
지하 암반에 갇힌 물이 지열에 뜨겁게 데워져서 증기가 팽창하면, 땅 위로 물을 분출하는 샘을 가이저(Geyser)라 하는데, 옐로스톤에서 주기적으로 뜨거운 광천수를 뿜는 300여 개의 가이저들 중에서도 관광객이 가장 붐비는 곳은 단연 올드 페이스풀 가이저(Old Faithful Geyser)이다.
사람도 아닌 가이저를 Faithful(성실한)이라 부르는 건 물을 분출하는 주기가 시계처럼 늘 일정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사실은 이곳이 제일 크고 주기가 정확해서 찾는 인파가 많은 것이 아니라, 큰 가이저들 중에서 분출이 잦은 곳이기 때문이다. 십분 정도의 오차 범위 안에서 한 시간 반마다 분출해서 높이 50미터 정도의 물기둥을 세우는 이 가이저 근처에 가보니, 대단한 인파가 곧 분출할 가이저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
예측시간이 조금 지나 가이저가 드디어 물을 뿜기 시작하는데, 물줄기가 십 미터도 못 올라가고 금세 모락모락 김만 피운다.
사람들은 실망해 모두 흩어지지만, 곧 다시 돌아와서 50분쯤 후로 예고된 다음 분출을 기다린다. 드디어, 예고된 분출 시간에 맞추어 가이저가 조금씩 물을 토해 내기 시작하더니, 흰 연기를 뿜으며 작은 물줄기를 공중으로 쏘아 올린다. 그에 이어 굵은 물기둥이 땅을 박차고 튀어나와, 공중에서 폭죽처럼 터지며 구름 가루를 뿌린다. 몇 분인가 계속 물 폭탄이 터지는 동안, 하늘에서는 구름이 뭉쳐지고, 땅에서는 여기저기 수증기가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올드 페이스풀 가이저에서 순환도로 동쪽으로 해발 2357미터에 있는 옐로스톤 레이크(Yellowstone Lake) 호수는 도로에 접한 호수 둘레의 길이가 20마일 정도인데, 중간에 내려서 보니 가까운 물가에는 커다란 얼음장이 차갑게 달라붙어 있고, 멀리 푸른 물 위에는 두 섬이 나란히 떠 있다.
우리가 옐로스톤강(Yellowstone River)을 따라 계곡 길을 달리다 보니 머드 볼카노(Mud Volcano)라는 진땅의 가이저에서 거품이 끓어오르며 고약한 유황 냄새가 난다.
가이저 주변을 산책한 후에 다시 강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어느덧 황혼이 물들어 계곡 아래 아득히 먼 곳까지 초록으로 덮었던 강가의 풀들이 휘어진 강줄기에 감싸여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옐로스톤에 발을 들인 지 셋째 날, 매디슨(Madison) 근처의 갈림길에서 올드 페이스풀 방향으로 올라가니 파이어홀 캐니언(Firehole Canyon) 초입에 폭포가 있는데, 높은 곳에서 수직으로 낙하하는 거대한 폭포는 아니지만,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계곡 아래로 사납게 흘러 내려간다.
파이어홀 캐니언을 나와 다시 파이어홀강(Firehole River)을 따라 순환도로를 가면서 보니, 강가 풀밭에서 들소들이 모여서 풀을 뜯고 있다. 갓난 송아지 한 마리가 털북숭이 어른들 옆에서 잘 걷지 못하고 자꾸만 쓰러지는 것을 보니, 귀엽기도 하지만 가엾기도 하다.
올드 페이스풀로 올라가는 길에는 미드웨이 가이저 베이슨(Midway Geyser Basin)이라는 넓은 평지에 큰 가이저들이 모여 있다. 그중에는 그랜드 프리즈마틱 스프링(Grand Prismatic Spring) 온천이 옐로스톤에서 제일 넓은데, 가운데가 에메랄드처럼 짙은 파란색이 가장자리로 나오면서 옅은 하늘색으로 변하고, 온천 주변으로 물이 넘쳐 갈색으로 보이는, 이름 그대로 색깔이 현란해서 기념사진에 많이 등장하는 가이저이다.
이 온천을 멀리서 보니 비취색의 푸르름과 주변의 짙은 갈색이 어우러져 환상적이라, 수증기를 헤치고 중심 근처에 들어가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나와서, 사진을 보니 찬란한 푸른색은 얄미운 수증기에 가려져 있고, 오물만 돋보이는 하수처리장 같아서 가슴이 찢어진다.
온천을 넘치는 물은 수량이 많아 급한 물살을 일으키며 언덕 아래로 떨어져, 바로 옆에 흐르는 파이어홀강에 합류한다. 고열의 온천수가 흐르는 물길에는 광물질을 섭취하며 광합성하는 호열균(Thermophile)이라는 황색의 미생물이 붙어있어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수증기와 어우러진 물가 풍경이 장관(壯觀)이다.
그런데 경치 구경은 안 하고 물에 들어가 낚시만 즐기시는 아저씨가 계시다. 순간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미국에 그렇게 먹을 게 없어요? 핫도그도 있고 햄버거도 많잖아요!" 이렇게 쏴 주고, 낚싯대를 빼앗아서 부러뜨리고 싶은데, 아저씨의 팔뚝이 너무 굵다. 귀여운 내 주먹을 쳐다보고 있으니, 온천에서 목욕하다가 재수 없이 걸려든 송어들이 너무너무 불쌍하다.
점심때가 지나도록 파이어홀강변을 따라 올라가며 가이저들을 보고 나서, 오후 두 시쯤에 세계 최대의 통나무집이라는 올드 페이스풀 인(Inn: 여관, 호텔)을 보러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홀에는 회색의 커다란 굴뚝이 1층부터 4층 천장까지 닿아있는데, 백열등이 촛불처럼 밝혀져 있고 식당도 있어서 그런지 분위기가 훈훈하다.
전날처럼 공원에서 밤늦게 나가면 호텔 옆 트럭에서 파는 햄버거로 밤참을 먹어야 할 것 같아, 식당의 점심 메뉴를 보니 송어 튀김이 있다. 아침에 검은 늑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낚시에 걸려 잡혀와 접시 위에 누운 녀석 앞에 묵념을 올린 후에 가시를 발리고 살을 뜯는다. 끓는 기름 속에서도 용감하게 헤엄 친 송어의 장렬한 최후를 기리며, 그리고 강에서 경치도 못 보고 고기만 잡으신 아저씨께도 감사드리며...
식사 후에는 가이저들이 많이 밀집해 있는 어퍼 가이저 베이슨(Upper Geyser Basin)에 가서, 크로마틱 풀 가이저(Chromatic Pool Geyser)와 뷰티 풀 가이저(Beauty Pool Geyser)를 보러 가니, 온천 가운데 푸른 물이 호열균의 노란 색깔과 어울린 진풍경이 우리를 맞는다.
메디슨 쪽으로 파이어홀 레이크 드라이브(Firehole Lake Drive) 길을 따라 내려가니, 마침 분출 주기가 뜸해서 하루에 두세 번만 물을 뿜는 그레이트. 파운틴 가이저(Great Fountain Geyser)가 넓은 평지에서 거대한 포문을 열고 하늘 높이 포탄을 발사한다.
연이어 로어 가이저 베이슨(Lower Geyser Basin)에 있는 화이트 돔 가이저(White Dome Geyser)도 유방처럼 부풀어 오른 분출구에서 거품 맛이 짜릿짜릿한 지구유를 펑펑 짜 올린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대표하는 가이저가 올드 페이스풀 가이저라면, 야생동물의 대표는 모든 미국 국립공원의 심벌 마크인 미국 곰이다. 곰에도 종류가 많은데,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대표하는 건 등에 혹이 난 얼굴이 둥근 그리즐리(Grizzly)이다.
그 그리즐리 곰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 공원 순찰대를 만나면 사람들은 어디에 곰이 있는지 귀찮게 캐묻기도 한다. 그런 것도 모르고 코 앞으로 다가오는 곰과 맞대면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운이 얼마나 좋은가? 매디슨에서 북쪽 순환도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산비탈에서 온통 김이 새어 나오는 로어링마운틴(Roaring Mountain)을 조금 지나서, 앞에 늘어선 차량에 막혀 뭔 일 났는지 보려고 내가 차에서 내렸을 때다.
"우리 집에 왜 왔니?"
둥근 얼굴 만면에 웃음이 가득! 공원 대표님이 내 앞으로 달려오시다가 갑자기 멈추어서 묵념을 올리신다. 으악! 뒤로 물러서며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얼굴에 대고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화가 나신 그분이 확 일어서서 점프하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방향을 돌리신 대표님이 차량들 사이로 빠져나가셨다. 덕분에 근접 사진도 한 장 찍고 생명도 보전할 수 있었는데, 그게 만약 나와 곰님 둘만의 다정한 만남이었더라면, 검은 늑대가 그랬듯이 느긋하게 내 갈비뼈를 빨고 계시는 그분 사진이 다음날 신문에 특종으로 나올 일이었다.
공원대표님과 헤어진 후 순환도로 따라 북쪽으로 다시 30 분을 올라가 산정의 고원에 도착하니, 주변에 또 작은 순환도로(Upper Terrace Lope Drive)가 있는 매머드 스프링스(Mammoth Hot Springs)에서 수증기가 올라온다. 벌써 해가 저물어 가고 있기에 순환도로 아래쪽 온천지(Lower Terrace Area) 의 산책로를 걸으니 산 아래에 비경이 펼쳐져 있다.
백악(白堊)이 층층이 쌓여 이룬 연못에서 비색의 광천수가 흰 거품을 일으키며, 고동색 황갈색 혹은 옅은 비취색으로 연못을 채우고는, 대리석이 백설처럼 곱게 쌓인 산비탈에 미끄러져 아래로 흘러내리는 풍경이다.
산책로를 따라 온천 아래로 더 내려가니, 화려하고도 서글픈 천지의 조화가 또다시 눈을 시리게 한다.
먹구름은 먼 산을 잿빛으로 물들이고, 한 줄기 일광은 죽은 나무의 슬픈 그림자를 백악 위에 흩뿌리니, 바닥을 기는 백사도 아픈 듯이 꿈틀거린다.
온천 순환도로를 계속 돌다가 지도를 보니, 왔던 길을 돌아가면 15마일, 순환도로를 계속 일주하면 50마일 밖에서 두 길이 다시 만나는데, 거기서도 공원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30마일을 더 가야 한다.
이미 해가 기울었지만, 계속 일주하기로 하고 곧장 가는데, 먼 데 있던 구름들이 초승달을 가리며 머리 위로 다가온다. 구불구불 돌아가며 올라가는 산길에는 인적이 없어서, 제한속도를 넘기며 가속 페달을 밟는데, 길가 쌓인 눈이 빙벽이 되어 눈부시게 번쩍인다. 가뜩 긴장해서 핸들을 꽉 쥐고 가속하며 곰이라도 갑자기 튀어나올까 봐 곁눈질해서 보면, 산불로 검게 탄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만 흔들고 있다.
순환도로 분기점까지 남은 거리는 조금씩 줄고 있지만, 빙벽에 둘러싸인 한도 없는 오르막 길의 고도는 해발 2700미터! 초등학교 때 외워둔 백두산 정상의 높이가 2750미터라는 사실이 공포감을 더 한다. 이러다가 아주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아닐까? 해발 2706미터인 던라벤고개(Dunraven Pass)를 넘고 나서도 오르내리는 산길을 한 없이 달리고 있노라니 간담(肝膽)이 서늘하다. 곧 귀신이 나올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