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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ly Jan 01. 2016

새생명

물에 잠긴 것들이 다시 나와서 생명을 얻기 바라며

4월에 대서양 횡단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로, 마님은 독감으로 열이 나고 기관지염 때문에 기침이 심해서 항생제까지 복용했지만 기침만 조금 덜할 뿐 감기는 몸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도 열이 나고 가래가 끓지만 약 안 먹고 그냥 버티는데 오늘 낮에도 기운이 없어서 밀어 두었던 공사는 재개하지 못하고 겨우 집에 쌓인 잡동사니들만 꺼내어 치웠다.


그 와중에 많은 책들이 서가를 떠났고 정성 들여 모아 두었던 논문들도 전부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이제 집이 많이 정리되긴 했는데 섭섭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뭐 하나 이룬 것이 없 대단한 발견은 앞으로 더욱더 힘들 것이라, 인생 마치는 날에 남들이 업적을 기려주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별로 정리할 것도 없을 테니 가볍게 떠날 수 있겠다.


세월호 사고 난 날에 네 아버님께서 타개하셔 진이가 장례식에 갔었다고 하더라. 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빈다. 작고하신 네 아버님이 아흔둘이셨다니 14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보다 12년을 더 사셨구나. 내가 5년 전에 댁에 찾아뵈었을 때는 허리도 곧으시고 정정하시던 많이 앓고 돌아가시지나 않았으면 다행이겠다. 곁에 계시던 어머님도 몸이 불편하시지는 않으신지, 작년에 서울 갔을 때는 안부 전화도 못 드렸다. 그분께서 절에 가보라고 하셔서 마님을 만났으니까, 내 인생에 큰 은인이신데 내가 너무 소홀했던 것 같다.


네 아버님의 장례식에는 빚 갚으러 오신 사장님들과 교수님들이 많았을 것이라 소홀하지 않게 잘 치렀겠지? 내가 올 초에 어느 장례식에 갔 자식들도 부인도 모두 생시의 고인에게 불만이 많았던 연고로 장례식에 조문객도 몇 안되고 무척 썰렁해서 고인이 아주 불쌍하다는 생각이 다 들더라. 애도하는 이도 없이 의례도 간단하여 화장터에서 10분 안에 끝난 장례식을 보고 났을 때, 인정이 느껴지지 않는 장례식이 무척 슬펐다.


아버님 돌아가셨다는 친구로서 봉투도 안 보내고 달리 따뜻한 위로의 말도 건네주지 않으면서 글줄만 길게 늘어놓는 것이 좀 미안하지만, 마음의 봉투에 보이지 않는 시간과 들리지 않는 염원 말고 내가 줄 게 뭐가 있냐? 밥이나 더 안 얻어먹으면 다행이지.


어제 집 정리 막바지에 옛날 CD들을 체크하다가 네 가족이 우리 집에 왔을 때 편집해 둔 비디오를 발견했다. 그게 벌써 꼭 10년 전의 일이라 다시 보고 나니 기억에 새롭다. 당시에 네가 본 것으로 기억하고는 있지만, 그때의 컴퓨터로는 영상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 같아서 내 유튜브에 올려놓았다.


공교롭게도 저녁에 설거지하면서 싱크대 벽에 태블릿을 비스듬히 세워 놓고, 유튜브에 연결하여 비디오를 체크해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태블릿이 설거지 물에 다이빙을 하더니 기절해 버렸다. 곧장 태블릿을 해체하여 흡수제와 함께 밀봉하고 물을 말리려고 하룻밤 거실에 놓고 잤다. 오늘 아침에는 햇볕에 두었는데 낮에 보니 봉지에 물방울이 맺혀있더라.


태블릿 속에는 다른 곳에 옮겨 놓지 않은 문서와 사진들도 많기 때문에, 꼭 다시 살아나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작긴 하지만 적어도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의 기다림을 이해할 정도는 된다. 태블릿이 물 먹기 전에 메뉴 화면에 4월에 대서양 항해 중에 마님과 함께 찍은 예쁜 사진을 하나 띄워 두었는데, 꼭 살아나서 우리 얼굴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세월호 사고 바로 직전에 대서양을 횡단하면서 '대서양'이라는 글을 적어 보낸 메일 끝에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라는 가사의 답이 뭐냐고 질문을 했는데, 그때 나는 물에 잠기는 것에 대하여 바로 죽음을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이제 보니 물에 잠긴 것에 생명이 붙어있기를 희망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측은함도 있지만, 삶을 함께 나누려는 기대가 더 크기 때문인 것 같다.


이제 오월에 접어들어 나무에 물이 다 올라 생명력 넘치게 가지를 뻗으며 푸른 잎이 돋아나 만개한 꽃들을 덮어 가리고 있다. 물이 비록 주위에서 생명을 삼켜버리기도 하지만, 나무의 물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니, 우리에게도 물처럼 생명을 주는 것을 가슴에 채워 힘차게 살자.


- 2014년 5월 3일, 물에 잠긴 것들이 다시 나와서 생명을 얻기 바라며




집 앞 마로니에에 꽃이 만발하니 완연한 봄이로구나.


우리의 여행길은 늘 그랬듯이 거리가 멀고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짙어서, 지쳐 피곤할 정도로 바쁘게 다니니 잡생각 할 여유도 별로 없다. 카라이브와 대서양을 지나는 15일간의 항해 끝에 프랑스의 마르세이유 항에 도착했는데, 그 전날 밤에 둘 다 독감에 걸려서 항구에서부터 신열이 나고 피로해 감기약을 다 사 먹었다. 그 참에 그냥 좀 쉬었으면 좋았을 텐데, 박물관과 전시회부터 시작해서 시내와 주변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또 4박 5일을 마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당장 정돈해야 할 게 많고 건강 회복은 물론 일상생활로 복귀하는 일이 급하여, 쌓인 메일에 답장을 적지 못 하였다. 오늘 날씨가 좋아 베란다에서 낡은 전과 잡동사니들을 추리다가 싸늘한 감이 돌아서, 다시 들어와 컴퓨터를 켜고 몇 자 적는다.


이제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정리를 끝내야 하니 베란다에 다시 나가 봐야겠다. 굳이 골프채를 들고 멀리 나가지 않더라도, 봄날에 아지랑이 피어나는 들판에 가서 시원한 바람을 가슴에 넣자.


- 2014년 4월 11일, 3주일간 동반 가출한 후에 귀가하니 우리 강아지가 반겨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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