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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ly Dec 31. 2016

비인간(非人間)

별천지에서 세상 도인의 말 없는 웃음을 배우다

유난히 무덥던 올여름이 가기까지도 안부를 제대로 묻지 못하여, 수목이 나신을 드러내는 늦가을에나마 차분히 절후 인사를 적어 보내려 했네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새 코 앞에 동지가 왔네. 그간 어디 다친데 없이 잘 지내셨는가?


나도 그럭저럭 바쁘게 사는데, 유럽에 밀어닥친 테러의 위험과 지진 홍수 등 대형 자연재해, 거기에 가을에 영국이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하고 이어서 미국이 트럼프를 뽑는 어이없는 선택에 심기가 몹시 불편했네. 한국에서도 질세라 대통령 탄핵을 불러일으킨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사건으로 세계의 매스컴을 울리니, 정신이 혼란하여 갈피를 못 잡았네. 이런 세태를 피해 이제 멀리 대서양의 작은 화산섬으로 날아와 보니 심신에 금세 기운이 돋네.

...

스페인령 카나리아제도의 란자로떼(Lanzarote)섬에는 화산이 널려있는데 마치 공룡이라도 뛰어나올 것 같네


- 2016년 12월 15일, 분화구가 월면처럼 널려있는 화산섬에서



여행 중에 한 친구에게 엊그제 화산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한 장 첨부하여 연말 안부인사를 전하니, 자신도 일본에 가서 볼 것 없는 화산에 올라가 유황 냄새만 맡고 왔는데, 그 삭막한 곳에 뭘 보러 갔느냐고 물었네.


웬걸? 거칠지만 원시적인 자연의 숨결을 고스란히 보여 주려고 애써 찍어 보낸 사진을 보고 던진 의외의 반응에 내가 여행한답시고 또 잘난 척한 것 같아 좀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다네. 어떻게 대꾸하지? 그냥 가만있을까? 그러던 차에 갑자기 '별유천지비인간'이란 시 한 줄이 생각났지.


이 싯구는 알겠지만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 701 - 762)이 지은 '산중문답'의 마지막 구절인데, 기승전결(起承轉結)로 구성된 시의 결구 하나는 마치 전원 풍경 속에 그려진 나무 한 그루 정도일 뿐 배경 없이는 그 진정한 의미가 살아나지 않을 것이라, 제목부터 펼쳐 친구에게 답장을 썼네.


여보시게,


山中問答(산중문답) - 젊을 때 산에 은거하여 살던 이백의 시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왜 산속에 사느냐 묻기에,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말없이 웃으니 속 편하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 멀리 물 따라가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인간 아닌 딴 세상이 있네.


윗글은 주해가 딸린 한시 전문을 인터넷에서 찾아 인용한 것인데, 우리말 해석이 아주 고전적이라 나름대로 의역해서 고쳐 적었네. 혹여 틀리게 해석했더라도 내 주관적 관점을 시를 빌어 적었으니 이해해 주게.


몇 년 전에 유럽 여행 다녀오신 누님께 즐거운 추억을 상기시켜 드릴 요량으로 여행 소감을 물었더니, 관광버스 타고 돌아다니면서 옛날에 부서진 집들만 지겹게 봐서, 그런 해외여행 다시는 안 가신다고 언성까지 높이셨는데, 갑자기 뭔가 좋은 생각이 나셨는지 웃으시며, "차 안에서 먹은 김밥은 참 맛있었다"고 끝을 맺으시더군. 기대와 달리 누님이 너무 딱딱하게 잘라서 말씀하시기에 나는 그 밖에도 볼만한 것이 많다고 얘기하지 않고, 그나마 보셨으니 다행이라고 말씀드린 후에 외국 여행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고 위로도 해 드렸지. 하지만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알게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체득하는 것이 있으니, 누님께서도 거기서 뭔가 얻은 것이 있을 것이네.


유럽 여행 소감을 "차 안의 김밥이 맛있었다"는 결구 하나로 단정할 수 없듯이 화산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한 장을 보고 여행의 진가를 평할 수는 없는 일이네. 내가 지금 멀리 와서 열심히 돌아다니며 구경한 것도 남들에게는 누님이 보신 것과 같이 폐허로 남은 옛날 집들 같겠지만, 하루에 200장 정도의 사진들을 찍으며 흥미롭게 자연과 인간에 접근하는 이번 여행에 대한 자네의 물음엔 그냥 웃음으로 대답한 이백의 산중문답이 딱 어울리네.


대서양의 거친 파도가 바다에 뛰어든 검붉은 용암과 이곳에서 연상 몸싸움 하지

나이를 더 먹으면서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게 느껴지고 신체가 늙어 약해짐과 우글쭈글 외양이 추해지는 것도 보네만, 날이 갈수록 기억이 희미해지는 머릿속에도 새 지식이 쌓이고, 청춘은 갔지만 어린 천성에 겹겹이 싸인 내 사랑하는 마음은 아직도 시들지 않았네. 하지만 나이 들어 별로 실력 쌓은 게 없으니, 나도 잘난 척 좀 덜하고 바쁘게 경제활동하는 사람들 본받아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지? 며칠 후 집에 돌아가서...


어라? 태블릿 긁적이는 동안 어느새 구름 덮인 하늘이 개이고 햇님이 나와 웃고 계시네! 어서 밖에 나가 볕 좀 쬐야겠네. 부디 가족과 함께 즐거운 성탄절 보내고 희망찬 새해를 맞게나.


- 2016년 12월 21일, 동짓날에 지평선 저 멀리 아득한 화산도에서 '비인간'을 읊으며 ;)



집에서 잔일에 몰두하고 잡생각에 집착하다가 대낮에 햇빛이 좀 많이 드는 대서양의 화산섬에 와서 며칠 동안 산에도 올라가고 바다에도 들어가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배우는 게 인간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푸른 산속에서 도를 익히며 자연을 찬미하던 이태백의 삶만큼 고상하지는 않지만, 가족과 친지들에게 안부를 묻고 한가로이 즐거운 소식 전하며 성탄을 맞는 이런 사치스러움이 있으니, 그나마 우리 사는 도시에서 비일비재 일어나는 테러의 불안과 국가이기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정치경제적 혼란에 억눌린 정신에도 생기가 좀 도네.


내가 원래 장난하길 좋아해서 친구에게 위에 적은 것처럼 얄밉게 대꾸하고 나서 절교의 위험마저 느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이렇게 장난 섞인 진지한 연말 인사를 다시 보내니 좀 웃으게. 一笑一少(일소일소)/웃는 만큼 젊어지고, 一怒一老(일노일노)/성낼수록 늙는다네. 笑門萬福來(소문만복래)/웃는 집에 많은 복이 들어온다/하니, 새해에는 가족 모두  많이 웃고 복 많이 받으시게.


'별유천지비인간'으로 답글을 쓰고 나서 다시 보니 이태백은 '산중문답'에서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대꾸하지 않고 웃으니 마음이 편하네'란 도인의 태도를 뽐내고 있었던 거였네. 내가 언제 메일에 답장을 쓰지 않거든 도인 된 줄 알게나.


- 2016년 12월 31일, 연중 내내 큰 웃음으로 답하길 기대하며 연말에 안부를 묻다.


비인간(非人間): 人間이 人生世間(사람이 사는 세상)의 준말이므로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즉 속세를 벗어난 이상 세계란 뜻임. 




올 한 해 동안 브런치에 접속해서 많은 글을 읽고 댓글도 썼는데, 연말이 오니 문득 면식은 없지만 선배 작가님들과 독자님들께 인사드릴 생각이 났어요. 하지만 오늘 많은 인사를 마무리해야 하기에 한 친구에게 쓴 연말 인사를 빌어서, 한 해 동안 이루신 것들에 대한 축하와 희망찬 새해를 기원합니다. 무엇보다도 무시무시한 저의 댓글에 속상하셨을 작가님들께 해 넘기 전에 사과드리고 또 싱싱한 마음으로 신년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사과 한 상자 받으시고, 새해에 아주 많이 웃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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