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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ly Oct 03. 2017

한가위

초가을에 뜨는 보름달을 보면 왠지 배부른 느낌이 드네

한여름 따가운 햇살도 축축한 무더위도 데려 오지 못한 이곳의 칠팔월이 선선한 가을님만 모셔와 놓고 몰래 도망가 버렸는데, 낼 모레가 추석이라 살찐 달덩이 아줌마가 구름 걷힌 밤 하늘에 밝은 얼굴 내밀고 웃고 계시네.


일요일이 겹친 올 추석 연휴가 짧지는 않지만 가족들 모두 모여 돌아가신 분들께 성묘하고 제사 올리느라 바쁘시겠구먼. 봄에 돌아가신 어머니께 상주(喪主)인 나는 한국의 추석에 맞추어 제를 올리는 대신 마음 속으로 추도하는 것만으로 예를 지키려 하네.


이곳 유럽에서는 추석 같은 명절은 없지만 가톨릭 전성도일 축일인 11월 1일이 성묘하는 날이라, 가족과 친지가 묘지에 가서 꽃을 꽂거나 이끼와 잡초가 침범한 비석을 닦는다네. 일전에 어머니 영정 사진을 장인 어른 묘소 옆에 소각해 묻었는데, 11월 성축일에 다시 가서 머리 숙여 인사 드려야겠네.


어머님께도 만수무강하시라고 추석 인사 전해드리게.


- 2015년 9월 26일, 멀리서 달 보며 ...



작년 말에 집수리의 첫 삽을 뜨던 순간에는 보지 못했던 청사진이 시간이 갈수록 거창하게 짜여서, 초기에 공들여 만든 구조물을 철거하고 새로 짜 맞추는데 시간을 보내고, 어렵게 모셔온 미장공님의 자재 주문 착오로 공사가 중단되어, 집안 환경뿐 아니라 마음도 어수선하여 여름방학 중에도 일순간의 망중한조차 누리지 못하였네.


오늘 모처럼 일요일에 시내 나가 장 보고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앉아 맥주 한 잔 기울이니, 멀리서 구경 온 관광객들 담소하며 웃는 소리가 뭇 새들의 지저귐 같고 나뭇잎 사이로 내려오는 하늘의 광명이 푸르러, 여름내 억수로 쏟아진 장대비에 젖은 마음이 다 마른 듯 상쾌했다네.


날이 저물어 시내 성당 옆 레스토랑에서 저녁 먹으며 지붕 위를 쳐다 보니, 꽉 찬 달이 옅은 구름 사이로 부어 오른 얼굴 내밀며 금빛을 쏟아내고 있었네. 행여나 서울 가시는 한가위 보름달님이 내게 인사하러 오셨나? 그참에 반쯤 남은 포도주 잔을 기울여 달님 편에 추석 인사 보냈네. 


작년 이맘때 로스엔젤레스의 한국 식당에서 중추절의 한식 먹던 기억을 떠올리니, 탕기에 수북히 담긴 잘 익은 김치에 젓가락을 대던 느낌이나, 백반 위에 얹힌 저민 불고기에 기름이 지글거리는 모양이 눈에 선하여, 성찬뿐 아니라 만남의 기쁨도 누리는 한국의 가족 친지 모두가 부럽구먼.

 

마음 한편에는 아버님을 비롯하여 돌아가신 분들께 제를 올리지 않는 것이 미안하고, 병드신 어머니도 못 찾아 뵙는 것이 부끄럽지만, 내가 멀리 산다는 핑계를 받아주시는 가족들의 아량에 깊이 감사하고, 철 바뀔 때마다 보내는 내 소식을 반갑게 들어주는 친구들에게도 고마움 전하고 싶네.


집안 일에 여러모로 신경 쓰시는 마님께 미안하여 컴퓨터를 켜 본 지 오래인데, 시내에서 돌아와 컴님 앞에 앉아 달 밝은 밤에 마음 고요히 추석 인사를 대충이라도 적었으니, 마침표 얼른 찍고 잠든 마님 옆에 슬쩍 누워 단 꿈을 꾸어야겠네.


추석에 온 가족이 모여 행복 나누시고 추수 또한 넉넉하길 기원하네.


-2014년 9월 8일, 송편과 토란국 대신 정감을 담았어요.


 

Happy Chuseok!


추석이라 한국밥 먹으러 천리만리 집을 떠나 미국의 로스엔젤레스까지 왔는데, 한인 슈퍼 마켓에 추석에 쓸 식재료와 음식이 엄청 쌓여 있네. 그림의 떡이지만 그것으로 성찬을 차려 보내니 추석에 사모님과 정답게 나눠 드시게.


우선 송편부터 맛 보시고 토란국도 끓여 잡수시게.

...


소화 잘 되게 식혜도 마시고 선녀님의 권주가 들으며 흥겹게 건배하세.


성찬에 현혹되어 혼자 까먹지 말고 사모님께 추석 인사 꼭 전해 드리게.


 - 2013년 9월 19일, 로스엔젤레스에서 추석 음식 보내옵니다.


외국에 살다보니 추석 때가 되면 한국 생각을 많이하게 되요. 올 추석에는 특히 북한의 핵 위협으로 인한 불안감과 사드 배치에 따른 대 중국 경제 문제 등 주로 정치적 위기에 관심이 쏠려요. 이곳 언론에서도 트럼프와 북한의 미사일맨 간의 언쟁을 거의 매일 보도하고 있지요.


추석인사를 아직 적어 보내지 못해서 지난 추석에는 어떤 인사를 했나 살펴 보니, 정치나 경제에 관한 우려가 없고 다만 근황을 알리는 안부 인사와 즐거운 농담 정도였어요. 오늘도 라스베가스에서 총기 난사로 무수한 인명이 살상 당했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추석 인사에 정치 경제 문제와 사회 불안이 끼어 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올 추석 인사는 간단히 이렇게 쓸까봐요.


잘 있니? 나도 잘 있어. 추석 잘 보네!


며칠후 ...


실험 삼아 친구들에게 딱 한 줄로 "잘 있니? 나도 잘 있어. 추석 잘 보네!"라고 메일을 보냈더니 기적이 일어났어요. 답장을 잘 안 쓰던 녀석한테 몇 초 후에 이런 메일이 왔네요.


답장: "바쁘게 잘 지내고 있다. 너도 잘 지네!"


이후 "카카오톡 깔았냐?" "스마트폰 하나 장만하게!" 등등 친절한 질문과 권고의 메시지가 뒤를 이었어요. 말 없이 사진만 온 것도 있구요. 이런 빠른 답장이 반갑긴 하지만, 한편 생각하니 친구들에게 그간 골치 아프게 긴 편지와 메일을 보낸 노력이 무색하네요.  


언젠가 "문자로 소식을 전할 수는 있지만 감정을 보낼 수는 없다"고 하신 누님 말씀이 생각나는데, 그분도 지금은 휴대폰에 카카오톡을 설치해 놓고 문자로 소통하고 계세요. 저도 전화가 안될 때는 누님께 '카톡'으로 문자와 사진을 보내고 있지요. 하지만 음성으로 통화할 때 만한 정담을 나누지는 못해요.


추석같이 휴가가 긴 명절에는 문자보다는 통화와 만남으로 정을 나누는 게 어떨까요?


- 2017년 10월 6일, 문자시대 다음이 인정시대이길 바라며 ...



추석 전에 미리 인사 드리지 못한 손윗 분들께는 '차가운 한 줄 인사'를 차마 보낼 수가 없어서 에전처럼 '평소의 관심과 기원 근황'을 담아 좀 더 예를 갖춘 인사를 드렸습니다. 역시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예절 바른 생활인 것 같아요. 나이가 들수록 실천하지 못한 도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올 추석 연휴가 아주 길다는데 명절 잘 보내셨어요?


한국 소식은 큰누나와 매주 통화해서 잘 듣고 있습니다. 덕분에 지애가 피아노 치며 그룹과 함께 공연하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았는데 가창력이 좋아서 감탄했습니다.

  ...


저희 생활엔 변한 게 별로 없어 집 앞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하고 집 고치고 책 읽고 처와 같이 살림살이하다가 가끔씩 여행도 하지요.

...


연휴가 끝나면 곧 찬 공기가 몰려 올텐데 한기를 이기시려면 피부 탄탄하게 비타민 합성해 주는 가을 햇빛 넉넉히 받으시고 산책과 여행으로 체력단련하시며 건강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근황을 자세히 적어 설명 드리기 어려워 요새 찍은 사진 두 장 첨부했습니다.


사진 1: .../ 사진 2: ...


-2017년 10월 6일, 한가위 하늘에 달빛이 차고 땅도 차고 밤 공기 차니 가슴에 가득 찬 온정 덜어 드리옵니다.



이 가을에는 인생의 과육이 차고 익어가는 걸 좀 더 느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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