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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ly Nov 02. 2017

삼성인(三省人)

친구 웃기려고 실없는 장난하고 나서 반성문 썼어요.

자네가 보낸 사진에 대한 답례로 내가 년 전에 모로코에서 권법 전수할 때 찍은 동영상을 첨부했네.


- 2017년 10월 8일, 조갯살이 통통 주황인가 등황인가?



신혼여행 가서 찍은 사진 보고 깜짝! 잘 보니... 석쇠 위에... 선홍의 바다 과실!... 보낸 자네 속을 알 길 없네만 영탄!... 얼핏 모로코의 옛 수도 마라케시에서 레크리에이션팀 훈련시키던 동영상이 떠올랐네. 당시 요원들에게 권법을 지도했는데, 이게 숫자는 적지만 고대 중국의 손자가 궁녀들 모아서 병법 시범 보이던 것보다 못할 게 없었지. 대열 같은 건 없어도 등황색 유니폼 입고 사부님 따라 복창하는 소리... 그 열기를 상상해 보시게.

 ...


내가 답장으로 동영상 보낸 동기를 밝혔는데 중요한 건 듣는 이의 이해와 상상력이네.

부디 유쾌한 상상을...


- 2017년 10월 9일, 이거 읽고 나서 동영상이랑 메일 다 지워버리게.



나이 먹을수록 고상한 품행을 유지해야 하는데 자칫 지난 메일에 젊은 여자에 대한 유치한 말장난 적어 보낸 것이 후회스럽네. 품위 없는 언행은 친구에게라도 삼가는 것이 진정한 교양인의 도리인데, 자네 웃기려고 권법 전수라는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엮어 보냈으니 인격이 추락해 고꾸라진 거지.


인생의 멋은 도덕과 예절을 존중하면서 찾아야 할 것이네. 범절을 무시하고 개성만 추구하는 것은 남 보기에 좋지 않지. 제 인생 멋대로 살 자유는 있지만 남 보기에도 좋게 살면 서로에게 이롭지 않은가?


이제라도 나이에 어울리는 성숙함을 갖출 뿐 아니라 가식 없이 그것을 보여주도록 더욱 노력하겠네.


어제 여행 중에 찍은 사진 좀 보게.

영국 Salisbury 북쪽에 있는 Stonehenge(스톤헨지) 전경


- 2017년 10월 14일, 반성하며 고적지를 걷다 -영국 Salisbury에서



조언 고맙네.


지난 메일에 나의 말장난을 후회한 것은 자책이 아니라 반성이네. 옛날 어느 성현이 일일삼성했다니, 범인에겐 하루에 반성할 게 수 없이 많지만, 그래서 깨달은 잘못은 후회하고 고치려는 마음만 있으면 되지 굳이 꾸짖을 게 뭐람? 우선 자신에게 관대해야 친절이 몸에 배어 성심으로 남을 대할 수 있네.


반성도 때를 가려서 해야 되네. 안정된 상황에서 심리상태가 온전해야 자신의 행위가 어떠했던지 현명하게 따질 수 있고 때론 운 좋게 영감이 떠올라 발견되기도 하니, 정신없을 때나 고된 일로 지쳐있을 때는 반성하는 것보다 차라리 생각 없이 조용히 쉬는 게 낫지.


어떤 작가가 어린 시절 자신이 주인 몰래 가게에서 사과 한 개를 훔쳐 달아나 한 입 무는 순간 반성하며 크게 후회를 했다네. 두 개 가져올 걸! 반성도 심성이 바르게 서 있어야 유익하지, 욕심 못 채운 걸 아까와하는 정도로는 좋은 길로 갈 수 없네.


우리의 인생은 멀리서 보면 시간 위의 여정이고 운명이 미리 정해진 게 아니므로, 모르는 길에 들어설 때마다 살펴보고 방향을 잡는데, 본의든 타의든 순간 선택해서 지나간 길이 인생행로가 되는  아닌가?


타고난 유전자에 의해 성격과 생의 방향이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그게 평생을 좌우하지는 않지. 부모에게서 아무리 좋은 유전자를 받고 태어난다 해도 부족함 없이 양육되고 교육받고 스스로 수양하지 않으면 올바른 인격을 갖출 수가 없네.


나무나 돌덩이처럼 깎고 다듬고 문양을 더해 조각품 만들 듯이 벌거숭이로 태어난 인간에게는 교육과 수련으로 인격을 형성할 뿐 아니라 격에 맞게 치장도 해야 보기 좋지. 인격과 성품은 언행으로 드러나므로 고운 말 쓰고 착하게 살면 칭찬받네. 외관도 중요하므로 의상 또한 소홀히 할 수 없지. 의상 식음 거처 모두가 생활의 필수 요건이니 골고루 잘 갖추고 살아야 할 것이네.


이상 흔히 들어서 다 아는 얘기를 적었네만, 내게는 이런 자경문(自警文: 스스로 경계하는 글귀 )이 참 유익하다네. 먼 나라에서 초야에 사는 인생이니 조언해주는 스승이나 친구가 별로 없는 고로 혼자라도 반성하고 교정해야 바로 가지.


어제 한 엔지니어의 삶에 대해 배웠네. 화낼 줄 모르고 상스런 말도 쓰지 않았으며 유쾌하게 살면서 아이들 즐겁게 해 주었다는 그 사람의 이름은 Isambard Kingdom Brunel(1806 - 1859),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난 후 거대한 증기 기관이 돌아가던 시절에 건축과 기계 설계했던 영국인이라네. 그가 세운 브리스톨(Bristol)의 클리프톤 현수교(懸垂橋: Clifton Suspension Bridge) 건너편에 기념관이 있는데, 거기 다녀오는 길에 다리 위에서 사진도 많이 찍었네. 그 아래 흐르는 강은 썰물이라 물이 빠져서 흙바닥이 보이지만 상류로 한참 올라가면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곳이 나오지. 강 이름 한 번 맞춰보게!


Brunel이 설계한 Clifton Suspension Bridge


- 2017년 10월 17일, 어느 장인의 아름다운 삶을 생각하며...




영국의 남서부를 바쁘게 여행하던 중에 자네의 메일 받고 장난기 어린 답장 써 보낸 후에 철 없이 농담한 것 같아서 반성의 메일을 두 번 보냈는데, 오히려 매 번 격려하는 회신을 받으니 집에 돌아와 내용을 다시 확인해 보았네.


- 일일삼성(一日三省)에 대하여


일일삼성의 원전은 논어(論語)의 학이편(學而編) 4장이네. 曾子曰(증자왈): 吾日三省吾身(오일삼성오신: 나는 하루 세 가지에 대해 반성한다). 為人謀而不忠乎(위인모이불충호: 남 위해 하는 일에 정성을 다 했는지)? 與朋友交而不信乎(여붕우교이불신호: 친구 사귀는데 신실했는지)? 傳不習乎(전불습호: 스승의 가르침을 복습했는지)?


논어의 기술이 성서의 구절처럼 비유가 많고 축약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는 데다 중국어는 문법 자체가 애매해서 '傳不習'의 뜻이 '스승께 배운 것을 남에게 바르게 전하다', '가르침을 복습하다', '배운 것을 실천하다' 등 유학자마다 해석을 달리하지.


한나라 때의 고서에 대한 주석서인 고주(古注)에 따라 傳을 동사로 보면 '전하다', 習이 목적어라 '傳不習乎?'는 '제자가 배울 것(習)을 잘못 전하지(傳) 않았나?'로 해석되고,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 1130 - 1200)가 지은 사서집주(四書集註)에 따르면 "傳, 謂受之於師. 習, 謂熟之於己." 즉, 傳을 목적어로 보아 '스승으로부터 받은 것', 習은 동사로서 '몸에 익히다'로 풀이하여, '傳不習乎?'는 '스승의 가르침(傳)을 실천하지(習) 않았나?'가 되네.


증자가 공자 사후에 제자들이 제각기 흩어진 후에 공자님 자리에 남아서 공자 대신 자신의 제자들에게 배운 바를 전수하면서 '傳不習乎?'라 한 것은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배울 것(習)을 잘못 전하지(傳) 않았나?'로 보나 공자의 제자였던 자신이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했는가?'로 보나  "모르면 가르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정확한 해석이 어쨌든 일일삼성의 요지가 '날마다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개선하는 일의 중요성'이니까, 증자가 말한 반성의 주제가 구체적이지 않더라도 "오늘 사는데 성의를 다했나? 운 걸 잘 익혔나?"에 대한 순환적인 성찰을 통해 하루하루 자질을 높이면 충분히 일일삼성 한 거지.


논어의 태백(泰伯)편 4장에 보니 증자가 아플 때 문병하러 온 노나라 정계의 실력자 맹경자(孟敬子)에게 군자(이 경우엔 된 사람이라기보다는 공인)가 중시할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시네.


動容貌, 斯遠暴慢矣(동용모, 사원폭만의: 바른 몸가짐은 거칠거나 게으르지 않고). 正顏色, 斯近信矣(정안색, 사근신의: 곧은 성품은 신뢰감을 주며). 出辭氣, 斯遠鄙倍矣(출사기, 사원비배의: 말하는 기품은 비속하거나 도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주의: 이 구절은 고서의 주석과 달리 내 주장대로 해석했네.


증자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높았으면 고관의 병문안까지 받나?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 숭앙받은 것은 아무래도 일일삼성 덕이려니, 우리도 본받아 실천하세.


증자(曾子: BC 505 – BC 435)는 성이 증(曾) 이름은 삼(參: 병음으로는 shēn이라 표기함)인데, 16세에 공자 만년(62세)의 제자로 입문해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BC 483 - BC 402?)에게 정통 유학의 맥을 전수했음. 효경(孝經)의 저자인 그는 유교 성인 중 종성(宗聖)으로 숭앙받고, 자사는 성인 술성(述聖)으로서 중용(中庸)의 저자임.
 文廟(문묘: 공자 사당) 대성전에 모신 공자와 성인/2006년 9월에 중국 平遥古城(핑야오 고성) 방문 때 찍은 사진이야



- 자경문(自警文)에 대하여


잘 알려진 자경문으로는 신라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고려 보조국사 지눌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등 불자의 규율이 담긴 것과 조선 시대의 유학자 율곡 이이(李珥: 1537 - 1584)가 어머니 삼년상 치르고 나서 불자가 되려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와 자신의 생활 태도에 대한 결의를 적은 것이 있네.


불가의 자경문은 종단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인 반면 율곡의 자경문은 유교적 자계(自戒) 지침인데, 내가 지난 메일에 밝힌 반성의 의지와 어울리는 것이 율곡의 자경문이라, 11개 항목 중 특히 언행에 대한 2항 '과언'과 4항 '근독'에 대해 살펴보겠네.


2. 과언(寡言):  心定者言寡(심정자언과: 마음이 안정한 사람은 말이 적다)  定心自寡言始(정심자과언시: 안정함은 스스로 말을 아끼는 데서 비롯된다)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시연후언 즉언불득불간: 말할 때가 된 뒤에 말하면 반드시 말이 간단하다).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자연히 쓸데없는 게 들어가고 건더기 빠진 긴 대화에 지루해지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네. 또한 대화 상대와의 말 수는 들은 것을 너무 초과하면 실례될 때가 많지. 개그맨도 아닌데 남을 너무 웃기려고 하다 보면 체면도 깎이기 십상이지.


앞으로는 떠버리는 말을 적게 하고 글도 과장 없이 써서 장황한 서술 대신 짧은 말로 정곡을 깊이 찌르도록 더욱 공부하고 연습하겠네.


4. 근독(謹獨): 常以戒懼謹獨意思(상이계구근독의사: 항상 조심하여 근독한다는 뜻을) 存諸胸中(존제흉중: 가슴에 두고) 念念不怠(념념불태: 꾸준히 생각하면), 則一切邪念 自然不起(즉일체사념 자연불기: 전혀 그릇된 생각이 일지 않는다) 萬惡皆從不謹獨生(만악개종불근독생: 수많은 악은 모두 근독하지 않으므로 생긴다) 謹獨然後(근독연후: 근독하고 나면) 可知浴沂詠歸之意味(가지욕기영귀지의미: '기하에서 몸 씻고 시 읊으며 돌아옴'의 뜻을 알 수 있다).


근독이란 신독(愼獨: 삼갈 愼, 홀로 獨)과 같은 말인데, 여러 문헌에 '혼자 있는 것(獨)을 삼간다(愼)'라고, '獨'은 명사 ''을 동사로 해석하지만, 중용(中庸)의 제1장(혹은 天命으로 시작하므로 천명장)에 나오는 '故君子愼其獨也'중 '愼其獨'의 준말이므로 원전에서 뜻을 알아봐야겠네.


제1장: 天命(천명)... 是故君子(시고군자: 그러므로 군자는) 戒愼乎其所不睹(계신호기소불도: 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恐懼乎其所不聞(공구호기소불문: 듣지 않는 곳에서 몹시 두려워한다).  莫見乎隱(막견호은: 어두운 곳보다 잘 보이는 데 없고), 莫顯乎微(막현호미: 희미한 것보다 더 뚜렷한 게 없다). 故君子其獨也(고군자신기독야: 그러므로 군자는 이(其: 대명사)를 홀로(獨: 부사) 경계한다).


하늘로부터 받은 걸 성(性)이라 하고 이를 따르는 게 도(道)라 정의하며, 수도(修道)하는 자세를 밝힌 이 구절로 보면, '신독(愼獨)'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그릇된 생각과 행실이 나오므로 혼자 있어도 남이 보고 있을 때처럼 바른 태도를 갖도록 경계하고 조심한다"는 뜻이네.


자경문의 '浴沂詠歸'의 출전은 논어의 선진(先進)편의 마지막 장인데, 공자가 제자들에게 "평소에 너희들이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들 하는데, 행여나 누가 알아준다면 무슨 말을 하겠느냐?"라고 묻자 제자 세 명이 각자 '실력을 보여 주고 한 자리하겠다'는 식으로 대답하지만, 증석(曾皙: 증자의 아버지)은 슬(瑟: 거문고 같은 25현의 고대 악기)을 타다가 줄을 탕 튕겨 멈추고는 "莫春者, 春服既成, 冠者五, 六人, 童子六, 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 했지. 이에 공자가 그런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도 그렇게 대답하겠노라"라고 칭찬했다네.


자경문에서 '浴沂歸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바로 위의 증석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인데, 도대체 얼마나 의미심장하기에 공자가 감탄하고 율곡이 근독연후(謹獨然後)에야 알 수 있다고 했을까? 증석의 대답에 대한 해석 또한 학자에 따라 각양각색이므로 여러 문헌 참조해서 의역해 보았네.


莫春者(모춘자: 늦은 봄에) 春服既成(춘복기성: 봄 옷을 입고) 冠者五, 六人, 童子六, 七人(관자오륙 동자육칠: 어른 대여섯에 애들 예닐곱이랑) 浴乎沂(욕호기: 기하에서 몸 씻고) 風乎舞雩(풍호무우: 무우대에 가서 바람 쐬고) 詠而歸(영이귀: 노래하고 놀다가 돌아옵니다).


春服既成은 대체로 주희의 역주에 따라 穿上春天的衣服(천상춘천적의복: 봄 옷을 입고)라고 해석을 하는데, 모춘이라면 벌써 늦은 봄이니 그냥 '봄 옷은 이미 지어졌다'로 해석하고 싶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처럼 봄 되면 들에 풀이 나고 꽃과 나무가 산을 덮고 물도 시원하게 흘러가는 풍경, 즉 산수에 봄 옷이 입히지. 삼천 명이나 됐다는 공자 문하생 중에 공자의 강연에 반주하고 대화를 나눌 정도의 제자면 수제자인데 나이 지긋한 증석이 '浴乎沂...'란 술부(術部) 앞에 시기와 풍경(莫春...)을 봄 옷에 비유해 묘사한 것은 아닐까? - 이런 해석을 여기에 빼다가 적은 건 접속사가 없는 본문을 여러모로 짜 맞춰 봐도 영 마음에 안 들기도 하고, 특히 이걸 보고 유가들이 구박할까 봐 경계하는 마음에... 하지만, 주희도 대충 넘긴 게 많다네.

 

공자강학도(수업 장면)/平遥古城의 文廟

舞雩(무우)라는 곳은 원래 주(周)와 노(鲁)나라에서 기우제 지내던 기하(沂河) 북쪽의 토대(土台: 흙으로 쌓아서 만든 제단)인데, 공자님은 곡부(曲阜)에 있는 자택에서 남쪽 2킬로 밖에 있는 이곳에 종종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바람 쐬고(乘凉) 노래하며 노셨다네(歌詠). 참고: 浴沂之樂(제자 데리고 교외에 가서 노는 즐거움)


沂(기)는 주로 기수(沂水)로 번역되어 있는데, 지도를 보니 沂水는 무우에서 170 킬로미터 밖에 있고, 기하(沂河)가 무우 바로 남쪽에 흐르고 있네. 주석에 온천이 있었다니(地志以為有溫泉焉) 음력 3월(莫春)에도 물에 들어갈 수 있었겠지?


원문에 공자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시며 말씀(曰: 왈, 불가로 치면 설법)하시는 동안 제자 증석이 계속 슬을 타고 있지? 이걸 보면 공자님 수업 장면은 악기 반주에 맞춰 노래하면서 노는 거구먼. 노래방 같은 수업 분위기에서 "소원 들어주는 사람 있으면 무슨 말 할 거냐?"라고 물었을 때, 증석은 바로 스승인 공자가 평소에 제자들과 하던 대로 "이제 봄이 완연하니 옷 차려 입고 저도 제자들 데리고 기하에 가서 몸을 씻고 무우대에 올라가 바람도 쐬고 시 읊고 놀다 올래요."라고 답했으니, 공자 선생님이 제자가 자기를 '본받아 따라 하겠다'는 평소의 소원을 듣고 감탄한 거겠지. 어찌 보면 스승에 대한 '아부'지만 듣기 즐거운 대답 아닌가? 이 대답은 결국 증석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 같네. 아들인 '증삼'이 공자 사후에 맥을 이어 곡부에서 공자처럼 제자들 데리고 강연해서 후에 유교의 성인으로 모셔졌으니까.


논어의 첫 장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화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는 제자들로 하여금 '남의 칭찬을 구하지 않고 소박하게 사는 된 사람의 태도를 갖도록 가르치고자 함'인데 이러한 생활 자세를 보여준 제자 증석의 대답은 율곡 선생이 보시기엔 근독(스스로 경계함)에서 나온 것이니까, "근독연후에야 이 뜻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바로 "자신도 신독이 몸에 배도록 수양하겠다"는 결심이지.



일일삼성의 주인공인 증삼과 자경문을 통해 등장한 주인공 증석에 관심이 더하여  찾아보니, "증석이 아들 증삼을 몽둥이로 쳐서 기절시키자, 효자 증삼이 깨어난 후에 자신을 구타한 아버지가 자신을 걱정하실까 봐 괜찮다는 듯이 거문고를 탔는데, 공자가 이 얘기를 전해 듣고 노하여 아버지를 살인자로 만들려고 도망 안 가고 맞고 있었느냐고 증삼을 꾸짖었다"는 일화가 . 인격으로 공자를 탄복시킨 증석이 효경을 저술할 정도로 착한 아들을 얼마나 심하게 때렸으면 기절까지 했을까?


이 일화의 출처는 서한(BC 206 - AD 9)의 유항(劉向: BC 77- BC 6)이 지은 설원(說苑)이라는 설화집의 제3장 건본(建本)편이라네. 曾子芸瓜而誤斬其根, 曾皙怒, 援大杖擊之, 曾子仆地; 有頃蘇, 蹶然而起, 進曰:「曩者參得罪於大人, 大人用力教參, 得無疾乎!」退屏鼓琴而歌, 欲令曾皙聽其歌聲, 令知其平也. 孔子聞之, 告門人曰:「參來勿內也!」曾子自以無罪, 使人謝孔子, 孔子曰:「汝聞瞽叟有子名曰舜, 舜之事父也, 索而使之, 未嘗不在側, 求而殺之, 未嘗可得; 小箠則待, 大箠則走, 以逃暴怒也. 今子委身以待暴怒, 立體而不去, 殺身以陷父, 不義不孝, 孰是大乎? 汝非天子之民邪? 殺天子之民罪奚如?」以曾子之材, 又居孔子之門, 有罪不自知處義, 難乎! - 한도 끝도 없는 공자 이야기...


이제 반성문 쓰느라 며칠 고생했으니, 공자왈은 여기서 멈추고 체력 단련하러 나가야겠네.


지난주부터 내가 다니는 헬스클럽의 Body Combat(격투기를 조합한 전신운동: 동영상에 나오는 '권법'이 바로 이거지) 코치로 새로 오신 선생님이 곁에 오셔서 손수 자세를 교정시켜 주셨는데 거의 기절했네. 몽둥이로 때린 것도 아닌데 웬 기절이냐고? 왼손으로 배를 누르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압착해서 등을 펴주시는데 몸이 납작해지며 가벼워지는 느낌, 다리의 힘이 확 풀려 몸을 가눌 수가 없었네.  게다가... 자세 교정하시며 가쁜 숨 내쉴 때마다 퍼지는 체취는 숨마저 멈추게 했다구. 하지만, 이 반성문 쓰면서 '浴沂詠歸의 의미를 알았으니까', 다시는 정신 잃지 않고 '권법' 수련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네.


오늘 반성의 주제도 간단히 하나로 정했지. 바로 '傳不習乎?'


- 2017년 10월 31일, 반성문을 마치며... 이게 끝이길 바래!


추신: 마님이 어제부터 나를 Confucius(프랑스어로 공자)라고 부르시는데, 이게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존칭이 아니라, 요즘 살림 팽개치고 공자왈만 한다고 벌주려고 경고하시는 것 같아서 스트레스 좀 받고 있었네. 내 한 몸 지키기도 어려운데 마님까지 '경계'해야 하니 결혼한 사람에게는 '신독'만으론 모자라지.


아! '신독 신독', 스트레스 해소하러 조금 전에 해우소(解憂所)의 문을 여니 마님이 웬 쪽지를 남기셨는데...

공자님이 물을 안 내렸어요!

꺄악! 화장실 사용자가 물을 안 내렸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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