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gether (2025) 리뷰: 접착의 문법

사랑과 공포가 살과 뼈의 언어로 서로를 조향하는 순간, 무의식과 의식이

by Moon

마이클 섕크스의 장편 데뷔작 투게더는, 감정이 살과 뼈의 언어로 번역될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따라간다. 두 사람의 감정은 미세한 떨림에서 피부의 접착으로, 말하지 못한 마음에서 근육의 경련으로, 오래된 서운함에서 뼈의 맞물림으로 변해간다. 영화가 보여주는 시작을 알 수 없는 제의와 플라톤의 인간 신화는 단순한 배경 설화가 아니라 두 사람의 일상 속으로 스며드는 작은 떨림으로 작동하고, 멜로드라마의 온기와 신체 공포의 냉기가 한 프레임 안에서 번갈아 숨을 쉰다. 실제 부부인 배우들의 호흡은 화면 바깥의 시간까지 불러들이며,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붙잡고 또 어떻게 놓치는지를 한 호흡, 한 신체로 밀고 들어온다.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설득되는 것은 줄거리의 친절함이 아니라, 감정이 물질로 변환되는 그 낯선 문법이다. 새 집, 서늘한 숲, 비를 피해 들어간 동굴, 그리고 밤. 고인 물을 마신 팀의 기억은 죽음의 냄새와 부패의 장면으로 되살아나고, 공포의 결은 ‘밖에서 들이닥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솟는 것’ 임을 예고한다. 동굴에서 빠져나온 다음 날 아침, 둘의 다리가 얕게 붙은 채 깨어나는 장면은 이 영화의 규칙을 또렷이 제시한다. 설명할 수 없는 접합은 두 사람을 하나로 가두려는 충동처럼 작동하고, 그 접착을 떼어내려는 시도는 곧 감정의 분투가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공포를 보여주기보다 신체의 언어로 ‘떨어지지 못함’의 고통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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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초반부터 밀리 윌슨(앨리슨 브리)과 연인 팀 브래싱턴(데이브 프랭코)의 관계적 리듬이 어긋났음을 보여준다. 오래 만난 연인답게 둘은 익숙하지만, 그 익숙함 속에서 미세한 틈이 자라났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못한다. 밀리는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고, 팀은 꿈과 불안을 함께 챙긴 채 밀리를 따라 먼 곳으로 이사 간다. 송별 파티에서 밀리가 먼저 청혼을 꺼낼 만큼 관계의 방향을 정리하고 싶어 한 쪽은 밀리였지만, 팀은 망설임으로 그 순간을 어색하게 만든다. 밀리와 팀의 익숙하면서도 거리감 있는 모습, 그리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일상을 얻기 위해 애쓰는 몸짓들까지—버릴 것 없는 디테일과 함께 영화는 중반까지 전형적 공포물의 문법을 비교적 성실하게 밟아간다. 이사 간 지역 근처 숲에서 한 연인이 실종되고, 수색견 두 마리의 기괴한 행동이 이어진다. 알 수 없는 동굴 안에서 고인 물을 마신 개들이 밤에 서로의 살을 물컹하게 나눠 갖듯 붙는 장면은 선명한 전조로 작동한다. 다소 이질적인 잔상처럼 어른거리는 개들의 형상이지만, 그럼에도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르기에 충분한 시작이다. 오래 함께해 멀어진 거리감, 서로에 대한 불만, 자신에 대한 불안, 새로운 곳에서의 시작과 날카로워진 언행. 미지의 동굴에 떨어져 분투하고 그곳에서 밤을 보내며 속내를 털어놓는 주인공들, 마음을 나눈 뒤 잠깐 부드러워지는 공기. 그러나 팀의 몸은 곧 자신을 배반한다. 이상한 동굴에서 돌아온 이후, 혼자 집에 남아 샤워를 하던 팀은 정신을 잃는다. 이 장면에서 긴장감이 응축된다. 보이지 않는 힘이 신체적으로 드러나는 첫 순간이자, 팀의 신체가 밀리에게 반응하는 가장 강렬한 감정의 신체화로 두 사람의 움직임이 한 덩어리가 되어 화면 위에서 요동친다. 그리고 의식을 잃은 팀의 동작이 도로 위 핸들을 잡은 밀리의 팔과 리듬을 맞추는 찰나, 남자의 삶이 차의 궤도와 포개어지며 마치 그의 몸이 조종되는 듯한 섬뜩한 농담이 완성된다. 감정의 충돌이 신체에 곧장 연결되어 공포와 감정이 물질화되는 모습—이 지점이야말로 이 영화가 가장 빛나는 곳이다.


둘의 감정은 격해지고 멀어지며, 또 밤이 되어 몸이 지배를 빼앗겼을 때는 누구보다 가까워진다. 자신의 미래와 앨범 활동에 대한 걱정으로 더욱 의기소침해진 팀은 여러 가지 문제와 밀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루 연주 공연을 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도시로 향하려 한다. 그러나 역에서 그는 알 수 없는 힘에 휘말려 다시 밀리에게로 밀려온다. 목을 태우는 갈증과 함께 밀리의 학교로 찾아온 팀과, 그를 숨기려는 밀리는 화장실 장면에서 욕망과 당혹, 수치와 공포가 한 덩어리로 몰아치며 충돌한다. 절정 이후 붙어 버린 육체는, 감정의 물질화를 시각적 거리로 번역해 보여준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보이지 않는 손은 둘을 서로에게로 밀어붙인다. 밤이 오면, 끌림은 다시 명령으로 격상된다. 팔은 붙고, 통증은 소리를 지우고, 몸은 뒤틀리며 접합되는 듯한 변형 속에서 근육이완제는 신체를 잠깐 잊게 만든다. 붙어 버린 두 사람의 팔보다 아침의 톱질 장면이 더 잔혹한데, 동시에 어떤 비극적 의식처럼 담담하다. 서로에게 붙은 살을 직접 갈라내는 행위만큼 이 영화의 주제를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미지는 드물다. 익숙한 듯 강렬하게 붙어 있다가, 언제나 그랬듯 다시 멀리 떨어져 음식을 권한다. 영화의 중반에 이르러 밀리의 학교 동료가 들려준 신화가 떠오른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두 개의 얼굴과 두 쌍의 팔다리를 지녔으나 그 힘을 경계한 신에 의해 반으로 나뉘었고, 그로 인해 평생 자신과 하나였던 짝을 찾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다고 한다. 로맨틱하게 들리는 이 이야기는 두 사람의 일상 속으로 스며드는 공포의 배경으로 작동하고, 멜로드라마의 온기와 신체 공포의 냉기가 한 프레임 안에서 번갈아 숨을 쉰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둘은 더 이상의 유예를 기다릴 수 없다. 밀리는 차 키를 가지러 제이미의 집으로 향하고, 팀은 다시 동굴로 잠입한다. 제이미의 집에서 밀리가 보게 되는 홈비디오와 팀이 내려가는 지하 동굴의 모습이 교차 편집으로 제시된다. 동굴에서 팀은 실종 커플의 결말을 목격한다. 한쪽은 이미 죽었고, 다른 쪽은 반쯤 결합된 채 생존을 강요받는 형상. 한편 밀리는 동료의 집에서 우연히 한 편의 비디오를 본다. 관계가 뚜렷한 두 남자의 결혼식, 손목을 그어 피를 맞대는 의식, 그리고 밀리의 뒤, 어둠 속에서 말끔한 복장을 한 현재의 제이미. 영화는 동굴의 과거—뉴에이지 교회 혹은 히피적 제의의 공간—를 동시에 암시한다. 커플을 다른 동선으로 흩어 서로 다른 시점을 보여주는 이 분리는 다소 노골적이지만, 동시에 질문을 남긴다. 밀리가 우연히 보게 되는 영상은 미리 켜 둔 것인가, 밀리를 위해 준비한 재연인가, 매일 혼자 반복 재생하는 자기 최면인가. 그가 실제로 ‘하나가 된’ 존재라면 학교에서의 일상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결합 이후 교사가 되었나, 아니면 그 이전의 삶이 멈춤 없이 이어진 것인가. 왜 어떤 결합은 어설프게 남고, 어떤 결합은 단일 인체로 귀결되는가. 물 때문인가, 의지 때문인가, 제의의 정밀도 때문인가. 인간 내장을 닮은 우물의 디자인, 에일리언의 페이스허거를 연상시키는 유기체적 형상 등은 서늘한 밑줄을 긋지만 더 멀리 나아가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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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곧이어 다시 폭발한다. 모든 원인과 비밀을 알아버린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의 끌어당김은 재개된다. 필사적으로 몸을 지탱하려 하지만 이제 둘에게는 버틸 힘이 부족하다. 서로에게 끌려가는 힘을 더 이상 거부하지 못한 그들의 움직임은, 팀의 청혼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찰나에 멈춘다. 신체가 비틀리고 변형되며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을 만큼 묘사되던 그 힘이 과연 멈출 수 있는 성질이었나. 합쳐지기로 마음을 모으면 오히려 끌림이 잦아드는가. 그리고 영화는 갑자기—팀이 동굴에서 돌아와 더 끔찍한 결말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결심과, 제이미에게 입은 상처로 쓰러지는 밀리—를 병치한다. 두 사람의 사랑이, 공포의 원인이던 감정이 신체를 괴롭히다가 결국 신체를 통해서만 멈출 수 있는 형태로 도착한다. 거실에서 두 사람이 느리게 함께 춤을 추며 하나의 형상으로 천천히 변해가는 장면을 영화는 오래 보여 준다. 감정은 아름답지만 형태는 섬뜩하다. 밀리의 등으로 기어가는 듯한 팀의 팔과 손이 밀리를 휘어 감는다. 합체라기보다 삼켜버린다는 표현이 더 맞는 듯한 그들의 모습은 충분히 감정의 폭발로 이어질 수 있음에도 짧고 차갑게 느껴진다. 주말, 부모가 집을 찾는다. 문을 연 존재는 남녀를 구분할 수 없는 얼굴로 그들을 맞이하고, 등에 달린 종의 문양은 동굴로 향하던 길에 보였던 표식을 현재로 소환한다. 장면이 지나치게 깔끔해서, 오히려 앞서 방황하던 질문들이 되살아난다.


그들의 완전한 결합은 신화적 ‘완전성’의 논리를 동물과 다른 커플에게까지 확장하는 순간, 게다가 그 시각 효과가 다소 인공적으로 느껴지는 탓에, 섬뜩함은 설명되지 않는 어색함으로 전환된다. 왜 그 이미지가 반드시 필요했을까. 이 어긋남은 후반 동굴에서 발견되는 실종 커플의 한 몸 형상의 반복과 함께 질문을 되돌린다. 왜 어떤 쌍은 어정쩡한 결합으로 남고, 어떤 쌍은 끝내 하나의 인간 형상으로 귀결되는가. 같은 물을 마셨기 때문인가, ‘완전한 쌍’이 아니었기 때문인가, 혹은 제의의 정밀함 때문인가. 만약 플라톤적 완전함이 결말의 단일 형상이라면, 왜 얼굴 둘·팔 넷의 기괴함이 아니라 한 사람의 윤곽으로 환원되는가. 이 질문들은 영화가 호출한 신화적 도구의 작동 방식을 더 알고 싶게 만들지만, 동시에 해명되지 않은 공백을 남긴다. 사실 이 영화가 불러오는 질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를테면 팀이 물을 병에 덜어 담는 행위를 유달리 자세히 비추는 이유, 이웃집 TV에 미리 준비된 듯 재생되는 홈비디오의 출처, 제이미의 현재 직업과 ‘결합’ 이후의 일상 유지 가능성이 모든 것은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설명의 리듬이 씻겨 나가 설득이 끊기는 순간을 만든다. 팀의 샤워 장면 또한 그렇다. 긴장감이 가파르게 상승한 직후 곧장 병원으로 급전하는 전개는 설득을 잠시 풀어 버린다. 합리적으로는 맞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병원으로 간다. 하지만 영화는 내내 ‘팀은 운전을 못 하고, 도시는 멀고, 그는 밀리를 따라 고립되었다’를 밑그림으로 깔아 왔다. 그렇다면 병원 역시 둘이 함께 갔어야 리듬이 이어진다. 이 작은 어긋남이 호흡을 끊고, 밀리가 주변의 이상에 유난히 둔감하게 보이는 순간들이 누적되며 그녀의 시점과 감정선은 간헐적으로 끊긴다. 서로에게 끌려갈 때 팀의 복부가 우글우글 파동 치는 이미지, 인간 내부의 장기를 닮은 동굴과 겹쳐지는 그 감각들은 강렬하지만, 상징의 층위를 조금만 더 조율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물론 영화가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인생의 많은 것은 설명되지 않고, 필연으로 가장한 우연들이 우리를 찾아왔다가 말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짧은 단편들의 인상으로 직조되는 이 영화에서, ‘설명’이 명확하지 않은 잔향은 더 크게 남는다. 영화의 시점은 등장인물 누구에게도 온전히 빌려주지 않은 채 오롯이 프레임 밖에 존재하고, 이 지점은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프레임 밖 인물임을 더 또렷하게 자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공포 영화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가. 물론 공포스러운 장면들이 있다. 천장의 전등 뒤에서 발견된 쥐의 사체, 죽음의 냄새, 노인의 죽음과 그 곁에 눕는 노모의 환영,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가 꾸는 꿈들의 냄새와 온도. 그러나 이런 이미지들이 ‘투게더’라는 주제와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봉합되지 못한 채 붕 뜨는 느낌도 분명히 있다. 남자의 심리선은 과거 사진을 뒤적이는 영화의 시작부터 꿈에서의 형상, 그리고 신체적 변화들을 통해 비교적 촘촘히 따라가지만, 밀리의 관점은 갑작스러운 청혼, 설명 없는 교직 전환, 새로운 환경 속에서의 적응 등이 중간중간 끊겨 마지막 선택—초반에 먼저 청혼했던 사람이 다시 한번 ‘받아주는’ 구조—의 설득력이 흐릿해진다. 수업 중 우연히 보게 되는 반 학생의 그림에서 뒤섞여 버린 수색견 두 마리를 재차 보여주는 반복은 관객의 퍼즐에는 유용하지만, 밀리의 기억과 동선에서는 뜬금없이 끼어든 전조처럼 작동한다. 관객은 그 그림과 수색견, 그리고 이후의 사건을 이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밀리도 그 연관성을 감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동료의 집에서 전말이 갑작스레 공개되는 비디오의 순간까지 이어졌을까. 그 사이의 진동이 조금만 더 또렷했다면, 결말의 무늬도 지금보다 덜 흔들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장 잘하는 것이 있다면, 감정이 몸으로 번역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이다. 몸이 스스로를 배반하는 순간들, 거부, 뒤틀림, 끌림, 부착, 고통스러운 이별이 남기는 촉각의 잔흔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샤워 중 의식을 잃은 팀의 신체와 도로 위 핸들을 잡은 밀리의 팔이 리듬을 공유하는 그 짧은 교차에서, 영화는 말보다 빠른 속도로 핵심을 터뜨린다. 아마 나는 그런 것들을 이 영화에서 더 강렬하게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서로를 조향 하고, 또 얼마나 쉽게 서로에게 조향당하는가. 그러한 두려움이 증폭되고 변형되어 결국 괴물의 모양, 몸의 흔적으로 드러나는 히스테리의 장면들은 오래 머릿속에 가시처럼 걸린다.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작품은 한동안 체류한다. 다만 영화는 그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여 하나의 논리로 수렴시키기보다, 몇 차례 주춤하며 우회를 택한다. 그래서 더 불온한 여백이 생긴다. 완전히 하나가 된 그 존재를 마주한 부모처럼, 나 역시 문턱에서 잠깐 멈춰 선다. 안으로 들어갈지, 바깥에 설지 결정을 미루며, 영화가 남긴 경계의 감각 속에 아직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한 채 주변을 배회한다. 나는 끝내 이 영화와 합쳐지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 미세한 비동기, 완전히 포개지지 않는 호흡이야말로 영화가 남기고자 한 여백일지도 모른다. 강아지의 결합과 동굴의 형상, 제의의 표식과 학교의 일상, 샤워의 무의식과 운전의 의식, 병원의 이성적 대응과 동굴의 비합리적 탐사의 파편들이 완전히 봉합되지 않기에, 결말의 ‘완전한 한 사람’은 오히려 더 미지의 무늬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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