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vest (2024) 리뷰: 경계의 망설임 속

지도와 이름이 몸의 기억을 연기로 지워낸다.

by Moon

풀숲을 거닌다. 강에서 수영을 하고, 지긋이 바닥을 살피고, 풀을 매만지며 월터는 주변을 거닌다. 작은 미소들과 따뜻한 촉감이 스크린을 넘어 실려온다. 벌레의 작은 움직임이 거친 손 위에 머물고, 굵은 흙 알갱이 같은 시끄러움이 화면 위를 떠돈다. 그의 손과 상체, 얼굴이 컷마다 잘게 쪼개지고, 그의 눈은 나비를 응시하고, 숲의 감촉을 뜯어낸다. 각각 다른 직물이 화면의 외곽선을 감싸며, 카메라는 계속 어떤 남자의 뒤를 따른다. 월터 시어스크(케일럽 랜드리 존스)는 충만해 보인다. 그의 비틀거리는 몸이 공간을 흐르며, 평원 속에서 움직인다. 그 순간들은 짧지만 느리게 늘어나고, 손끝에 남은 촉감은 시선의 잔상보다 오래 남는다. 그는 풍경의 결을 더듬고, 풍경은 그를 잠시 품는다.

그의 움직임을 끊어내듯 마을 외곽에서 불이 치솟고, 외양간은 흙 속에서 함께 피어오른다. 깊은 연기가 화면에 가득 차오르고 그림자들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영주 찰스 켄트(해리 멜링)의 외양간이 불타오르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물을 길어 나른다. 그 사이로 월터의 감정도 함께 타오른다.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그들이 취해 있는지 월터만이 제정신인지 알 길이 없다. 이곳은 스코틀랜드의 한 작은 촌락이다. 어느 시기, 어느 위치인지는 사실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곳에 월터 시어스크가 있고, 그의 오랜 친구이자 영주인 찰스 켄트가 살고 있다. 같은 색상의 옷을 두른 사람들 사이에서 켄트만 붉은색 옷으로 치장하여 다름을 보여준다. 이곳은 그저 작은 마을이다. 그리고 마을에 불이 치솟아 오른다. 불길은 하나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선이 된다. 그 선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리와 저들 사이에, 땅과 말 사이에 경계를 그린다.

사람들은 모두 서로에게 익숙하다.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월터도 함께한다. 함께 타작을 하고, 함께 밀을 거둔다. 그도 함께 일하고 있지만, 영화 사이사이 월터의 보이스오버가 그의 마음이 마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바깥에서 들려오고, 그 바깥이 오히려 이 마을의 내부를 비춘다. 조용했던 마을에 불같은 감정들이 피어오르듯이, 새로운 사람들이 속속 마을에 도착한다. 강가 근처에서 발견된 외지인 세 명과 켄트에 의해 고용된 지도 제작자 필립 퀼 얼(아린제 케네)이 마을에 변화를 가져온다. 그들은 마을의 새로운 사건이고, 새로운 감정이며, 새로운 마을을 가져오는 사람들이다. 다른 말을 사용하고, 등장 처음부터 마을 사람들과 대립했던 외지인들은 두 명이 희생양으로 잡히고, 여자(미스트리스 벨댐)는 머리를 깎인 채 숲으로 내쫓긴다. 그들은 갑작스럽고, 마을 사람들과 영주는 당황해하지만, 이 마을 속에서 모든 일들은 간단하다.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인가, 외지에서 들어온 ‘저들’인가. 마치 마을에서 기르는 양의 털을 자르듯 여자의 머리털을 잘라버리는 모습에서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끼고, 누군가는 앞장서서 그녀의 잘린 머리털을 모은다. 그것은 양의 털처럼 털실이 될 뿐이다. 외지인의 위치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잘려 나가고, 묶이고, 분류되는 자리. 이름이 붙고, 실로 감기고, 품목이 되는 자리.

얼의 지도 제작을 도와주며 월터는 마을의 이야기를, 아니 사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에 자주 먹었다던 버섯, 평원의 풀들. 그러나 얼이 원하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사건을 원하지 않는다. 그에게 기억보다는 현재가 중요하고, 그들의 이름, 범주가 중요하다. 이름이 무엇인가. 무엇에 좋은가. 무엇에 사용하는가. 그의 지도에는 마을 사람들의 정확한 숫자가 그려지고, 마을의 모습이 담기며, 지역마다 월터가 알려준 이름들이 적힌다. 그에게 동서남북의 감각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들과 위치들의 이름이며, 이름 속에서 마을은 개념으로 축소되고 추상화되며 요약된다. 사실 얼에게 있어서 마을은 언젠가는 과거가 되어버릴 현재일 뿐이다. 그가 월터에게 지도들을 보여줄 때 그는 그것이 자신의 일일 뿐이라고 한다. 마을 하나를 떠나면 그것은 남겨진 지도가 된다. 그리고 현재의 지도가 끝나면 다른 마을로 나아갈 뿐이다. 평면적으로 납작해버린 그 마을의 지도 속에, 몸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길이를 이야기하지만 고저를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곳을 걸을 때 어떤 냄새가 나고, 심장의 박동은 어떤 식으로 뛰게 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종이는 납작하고, 발은 요철에 반응한다. 좌표는 정확하고, 숨은 부정확하다. 나는 궁금했다. 월터가 얼에게 켄트와 자신의 부인들의 무덤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지도에 그리라고 했던 것을 나중에 후회했을까? 애도의 자리 위에 좌표가 얹힐 때, 그 좌표는 누구의 것이 되는가.

우리가 아닌 것은 배척되고, 사실 그 ‘우리’ 속에 월터와 켄트 또한 완전히 포함되지 않는다. 월터와 켄트는 둘 다 외지인이다. 그리고 영화 전반에서 월터와 켄트의 접근은 매우 다르다. 켄트는 자신의 부인을 따라 부인의 영지로 왔으며, 월터는 그곳에서 어떤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자리를 잡는다. 그 둘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았으며, 외지인으로 인식되는 사람들이다.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켄트는 사람들에게 베풀고 다정하게 하며, 영주의 옷을 벗고 마을과 동화되길 택한다. 그의 말은 마을의 외양간에 있으며, 그의 부인의 맨션은 먼지가 쌓여간다. 반면 월터는 여전히 그 경계 속에 머문다. 마을에 사는 다른 과부 키티 고스(로지 맥이윈)와 감정을 나누면서도 입맞춤을 피하고, 그녀와 관계를 깊게 가지기를 거부한다. 그는 그 마을에 갑작스럽게 도착한 생김새가 다른 외지인들과 다르게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녹아들면서도, 그는 여전히 스스로 외지인으로 남아 있으며 자신이 마을 사람임을 의심한다. 그것은 그가 마을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가 마을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마을의 아이들에게 거치게 하는, 마을 경계에 있는 경계석을 머리로 두드리지 않았기 때문인가? 월터의 목소리는 프레임 밖을 떠돌고, 그의 시선은 허공에 흐르며, 그의 마음은 과거에 고여 있다. 무엇이 그를 외지인으로 만드는가. 그의 몸과 마음이 경계를 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 아닌가. 혹은 넘고 싶어 하면서도 넘지 않는, 그 망설임의 습관 때문은 아닌가.

켄트의 부인의 친척이자 마을 땅의 법적 소유권을 가진 에드먼드 조던(프랭크 딜레인)과 그의 무장한 수행원들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둘의 선택을 더욱더 압박한다. 그는 더욱더 뚜렷하게 마을을 관념화시키고 숫자의 기술로 치환한다. 넓은 땅은 양들의 숫자로, 이익의 표로 계산될 것이다. 마을의 사람들은 노동력으로 판단될 것이고, 마을의 크기는 울타리로 나누어질 지도에 불과하다. 그와 함께 켄트의 마을과의 연결고리가 되어주었던 그의 말, 윌로우잭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켄트의 마음이 마을 밖을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에게는 더 이상 그의 부인도, 그의 말도 남아 있지 않다. 이 마을에서 살기를 원했던 그에게, 미래는 더 이상 이 마을에 있는 것 같지 않다. 조던은 전 가가호호 수색을 명령하고, 외지인들과 지도 제작자가 의심을 받고, 약한 처지의 여자들과 아이가 붙잡혀 간다. 그들의 입에서 다른 마녀들의 이름이 나온다. 지도 제작자는 외지인이자 그들과 다른 인간으로, 그녀들의 타깃이 되기 쉬울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퀼에게 어떠한 동정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마을을 압착시켜 버린 사람이다. 그는 마을을 이미지로 소멸시킨 사람이다. 칼질틀에 묶여 며칠을 보낸 외지인 한 명이 악천후와 수퇘지에 의해 목숨을 잃고, 조던은 마을의 소멸에 속도를 더한다. 법의 언어가 빠르게, 지도의 선이 더 빠르게 실효가 된다.

켄트는 모든 열쇠를 월터에게 넘김으로써 마을의 미래를 버린다. 모두가 떠난 마을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월터는 미래의 씨앗을 뿌리지만, 그의 떠남은 씨앗을 과거로 만들 뿐이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쫓아올 군인들이 두려워 모두 떠났고, 켄트도 조던에게 자신을 맡긴다. 월터가 풀어준 덕분에 이름의 축소를 원하지 않은 외지인과 미스트리스 벨댐(탈리사 테이셰이라) 또한 마을을 떠난다. 비어 있는 마을에 남은 것은 지도에 그려진 가득한 경계들뿐이다. 다시 마을이 불타오른다. 현재가 불타오르고, 퀼의 시신이 남겨지며, 풍경이 연기가 되어 떠오른다. 불길은 마지막으로 남은 선들을 핥아 지우고, 재는 한 장의 종이처럼 바스러진다. 누가 이곳을 그릴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만이 남는다. 지도는 기록이면서 집행이고, 이름은 호명인 동시에 추방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월터는 그 선들 사이에서, 경계석에 머리를 부딪히며 망설이는 몸으로 과거에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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