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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alogi Nov 13. 2020

전부 너였다.

감각의 미래 

그림출처

이 글은 영화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Hello, str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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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인지란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어떤 사실을 인정해서 안다'는 것이다. 우주는 빛, 소리, 냄새, 맛, 온도, 감촉 같은 자극을 통해 나와 연결되어 있다. 내가 살아있다는 뜻은 우주의 자극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현실'에 대한 단 하나의 보편적인 경험은 없고 다 함께 공유하는 세상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도 없다. 오직 '인식'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진짜처럼 보이는 것' 이 있을 뿐이다.  

인식의 대상은 현실이 아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거울에 비친 것은 사물이 투영된 모습이지 사물 자체가 아니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투영은 왜곡될 수 있다.  

동물들은 각자 자신만의 감각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고요. 

몬톡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만난 클레멘타인은 마치 충동적으로 회사를 땡땡이친 그날의 조엘 자신과 같은 여자였다. 머리를 염색하는 속도만큼이나 기분의 변덕이 심하다고 자신을 소개했었다. 인생이 빈 일기장인 것만 같은 조엘과, 늘 인생을 꽉꽉 채우고 싶은 그녀의 만남은 그렇게 사고처럼 이루어졌다. 


대뜸 결혼할 것이라 말하는 그녀가 싫지 않았다. 꽁꽁 언 찰스 강 위에 나란히 누워 오시디우스 별자리를 보는 것도 좋았다. 그런 관계가,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국 조엘은, 지금 이렇게 기억을 지워주는 라쿠나 회사에 그녀에 대한 모든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추억 쓰레기들을 하나 가득 들고 찾아왔다. 클레멘타인에게서 상처 받은 마음 역시도 단 한 줌도 빼놓지 않고 챙겼다.


그녀가 먼저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웠으니까.라는 반발심과 배신감 때문이었다. 자신의 앞에서 새로운 남자와 키스를 나누는 그녀가. 자신에게만 허락되던 미소를 그 남자에게 내어주던 그녀가 너무도 미웠다. 마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결국 조엘을 여기로 이끌었다. 자신의 이런 행동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감정의 핵을 뽑아내고 모든 타깃 기억이 사라진다고 말하는 설명에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단지 지금 이 불덩이만큼이나 뜨거운 마음을 송두리째 없애주길 조엘은 그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


아는 별자리를 하나 말해줘요. 마치 당신이라는 하늘에 박힌 내 마음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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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의 모토는 몰입이다. 시뮬레이션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가상현실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그 세계에 자연스럽게 반응해야 한다.

그는 버튼을 누른다. 눈을 가리고 미동도 없이 연단 위에 앉아 있던 군인은 이제 아프가니스탄 파견군이 되어 실제처럼 보고 듣고 느낀다. 그는 이곳에 존재하는 동시에 저곳에도 존재한다.

컴퓨터가 제공하는 감각정보와 정신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단서는 또 있다. 군인들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가상현실 속의 풍경을 구체화했다. 가상세계에는 규칙이 없습니다. 결과에 이르는 시뮬레이션을 설계하여 인간의 행동과 그 결과 사이의 연결고리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뇌는 가상 경험과 실제 경험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절벽처럼 보이면 절벽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보고 싶어요. 좋았던 일만 떠오르고요. 그리고 또 어느 순간에는 화가 나요. 

라쿠나사(Company)가 구축한 시스템은 놀라웠다. 조엘에겐 이제 감정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쓰레기에 불과한 물건들로, 자신의 기억 세계를 완벽히 구축했다. 자신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세상의 정교함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조엘은 이 바보 같고 머리 색깔 변화만큼이나 변덕이 심한 클레멘타인이라는 기억 덩어리들과 싸워야만 했다.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들어온 클레멘타인에게 조엘은 서운함과 걱정을 담은 시답잖은 자존심을 세운 잔소리를 해댔다. 자신에게 등을 보이며 집을 뛰쳐나가는 그녀를 보았을 땐 후회했지만. 지울 수 있으니 괜찮았다. 시큰둥한 표정의 클레멘타인과 중국 음식을 먹을 때도, 식당에서 자주 보이는 따분해 보이는 커플이 되지 않으려 발버둥 쳤지만 결국은 그보다 더 못했던 그 기억도. 이젠 깨끗하게 지울 수 있었다. 바스러져내리는 자신의 기억 세계를 보며 조엘은 이 것이 바로 자신이 원하던 것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너져내리는 것에는 조엘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꺼운 외투를 뚫고 들어오던 한기도 잊게 하던 것은 꽁꽁 언 찰스강 위에 함께 누운 클레멘타인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생이 빈 일기장 같기만 하던 조엘의 인생을 무지개처럼 화사하게 바꿔준 것도 클레멘타인이었다.  어릴 때 못생겼었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부정당한 느낌이 들었다고 울며 고백하는 클레멘타인을 안아줄 수도, 키스를 해 줄 수도 없었다. 그런 클레멘타인이 조금씩 자신에게서 희미해져 가고, 특별함을 잃어가고 있었다.


조엘은 비로소 깨달았다.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라고. 이 바보 같고 머리 색깔 변화만큼이나 변덕이 심한 클레멘타인과의 괴롭다고만 생각했던 사랑은 전혀 쓰레기가 아니었다. 진주를 품기 위한 아픔의 과정이 그녀와의 사랑이었다.  멈춰야 했다. 여기서 당장. 그녀가 없이는 고통도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오픈북이야. 모두 다 알려주지..... 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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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받은 마음. 그것 때문에 내가 여기에 왔다. 고통과 관련해서 가장 흥미로운 연구 분야는 뼈가 부러졌을 때의 신체적 고통과 마음이 아플 때의 사회적 고통을 뇌가 어떻게 처리하느냐와 관련되어 있다.

 사회적 유대가 깨지는 부정적인 경험을 가슴 아프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보편 적인 현상 같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일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으로 거부당하거나 상실을 경험하면 정말 통증을 느끼는지, 아니면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차원의 고통을 처리하기 위해 뇌는 여러 영역을 동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상대로 촉각 감지에 관여하는 체지각 피질은 감각 고통에도 관여한다. 감정 처리에 관여하는 전측 대상 피질과 뇌섬엽 피질은 고통의 감정적 요소에 관여한다. 계획과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전두엽은 고통의 인지적 요소와 연관된다.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데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어요?

기억 속에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약간은 혼란스러워 하지만 언제나 늘 아슬아슬 잘 적응했던 클레멘타인의 손을 꼭 붙잡고. 그녀와의 기억을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임을 이제 조엘은 절대 잊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클레멘타인에 대한 손길이 닿지 않은, 자신이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개인적인 기억으로 둘은 숨어버리기로 했다. 씩씩하기 짝이 없는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숨고 싶은 기억에서조차 자신을 구해주기 바빴다. 이런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홧김에 지워버리기로 한 조엘 자신이 한심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라쿠나 사는 쓸데없이 직업의식이 투철했다. 조엘의 클레멘타인은 필사의 도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더 빛을 잃고, 조금씩 더 도망치려는 의지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기억하고, 최선을 다하면 다시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클레멘타인의 말은, 그녀에 대한 사랑을 더 두텁게 했다. 


결국 두 사람은 그녀를 처음 만난 기억까지 밀려왔다. 둘이 함께 했던 기억의 마지막까지 온 것을 알았을 때. 결국 그녀는 지워질 운명임을 눈치챈 사람처럼 마지막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와르르 와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지기 시작하는 세계의 끝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계속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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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고통이 유쾌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거절당하거나 상처 받는 것도 그렇고요. 이런 경험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 고통은 친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적응 신호로 보이거든요.

뼈가 부러지면 나을 거라는 확신이 있잖아요. 하지만 정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또 만날지는 모르잖아요.

고통은 끔찍하기 때문에 경이로운 것입니다.  

자 어쩌면 사랑으로 인한 고통에 면역된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  

어른이 되어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간단하지는 않았다."시간이 걸려요. 어렵기도 하고요. 하지만 사랑만 있으면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예요"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니체

세상을 잊고 세상에 잊힌 자. 티 없는 마음에 영원한 햇살이 내리니. 모든 기도가 이뤄지고 모든 소망을 내려놓는다. -포프 알렉산더

몬톡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만난 클레멘타인은 마치 충동적으로 회사를 땡땡이친 그날의 조엘 자신과 같은 여자였다. 머리를 염색하는 속도만큼이나 기분의 변덕이 심하다고 자신을 소개했었다. 인생이 빈 일기장인 것만 같은 조엘과, 늘 인생을 꽉꽉 채우고 싶은 그녀의 만남은 그렇게 사고처럼 이루어졌다.


그들의 사고 같은 만남에, 라쿠나사를 그만둔 메리의 사고가 합쳐져 그들은 기억을 지우기 전, 서로에게 날 선 말을 내뱉었던 험담의 폭포 아래에서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조엘을 버릴 수 없었던 클레멘타인과, 클레멘타인을 잡고만 싶었던 조엘은 이미 끝을 본 상태에서. 아니, 어쩌면 몇 번이고 끝을 본 상황이었을지도 모르면서 서로가 상처 입힌 그들의 사랑에게 웃으며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따스한 햇살이 영원히 내리쬐는 것 같은 사랑을 향한 마음을 담아서. 


[참고자료]

1. 책 [감각의 미래] >>7장 고통: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약

2. 영화 [이터널 선샤인]

3. 노래 [전부 너였다] 



[이 글의 TMI]

1. 전자책으로 읽어서 페이지가 없었다. 전자책은 생각보다 너무 피곤하고 불편하다.

2. 가상현실이나 감각 등의 정보만 아니라면 비슷한 영화는 500일의 썸머도 있음

3. 막판에 바닐라 스카이랑 매우 고민했음. 

4. 마지막 장의 첫 문단은 일부러 똑같이 쓴 것임. 잘못 붙인 것 아님. 

5. 이 책 진짜 어려웠음. 영화가 너무 많이 떠올라서 오히려 힘든 책이었음. 

6. 이와 비슷한 테마가 블랙 미러 시리즈 중에 있었음.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 역시도 두 번째 첫 만남을 시작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음. 몇 번이고 돌고 돌아도     결국 다시 만날 수밖에 없음을 알려주는 영화라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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