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일까 상황일까
이 글은 영화 [신세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격 특성과 성향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믿는다. 그러다 보니 항상 요인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데 이를 '기본적 귀인 오류'라고 한다. -36p
하나는 사회의 압력과 그 밖의 다른 상황 요인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 행동에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특정 사회 상황의 영향을 이해하려면 때로 미묘한 세부 사항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87p
처음에 강 과장이 내가 깡패 새끼나 진배없다고 했을 땐. 억울한 마음이 컸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그 생각 하나로 지옥 같은 8년을 버틴 게 나였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는 그 말. 그 말 한마디로 내가 그토록 기다리는 마침표를 계속 쉼표로 바꾸었소. 그 누구보다 이 지긋지긋한 생활이 끝나기를 바라는 게 나란 말이오. 그런데 내가 깡패 새끼와 진배없다니. 마치 내가 그 집단에 동화된 사람처럼 치부하는 그 꼴이 너무도 싫었소. 단지 상황이 그랬을 뿐이오. 석회장을 기소 못 한 게 나의 잘못이 아니듯. 모든 상황이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고. 모든 상황이 내가 한 것이 아니듯 말이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단 하나도 알려주지 않는 규정.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
화교 출신이라는 한계.
하지만 그 혼돈 속에서도 나의 정체성은 바뀌지 않고 경찰이었소.
나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혼자였지. 내 주위에 또 다른 경찰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누구와도 묘하게 섞을 수 없는 그 상황 속에서. 내가 가진 마음은 단 하나였소. 돌아가고 싶다. 뿐이었소. 진심입니다. 나는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성격으로 개인차를 평가하는 연구와 밀접히 관련된 과학자들마저 특정 상황에서 특정한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하는 우리 능력이 상당히 제한적임을 인정한다. 즉, 우리의 예측 가능성에는 한계가 있다.-32p
즉, 타인에 대한 판단은 간혹 생존에 중요하므로 이것이 심하게 잘못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는다.-318p
특히 과거에 행위자를 관찰한 경우와 새로운 상황이 그 기회나 제약 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를 때 우리는 놀라워하며 새롭게 깨닫는다-331p
강 과장은 잘 짜인 각본 아래 한낮 인형극 한 판 벌이다 간단하게 줄 몇 개 끊어버리면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도, 정청도, 이중구도. 그 줄에 단단하게 묶인 강 과장의 인형일 뿐이었죠. 대체 가능한 인형 말이오. 그리고 강 과장은 그 모든 과정이 쉽다고 생각했겠죠. 자신은 나를 잘 알고 상황을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지 못했지요. 아주 작은 것이 매우 큰 결과를 불러오는 법입니다.
한낮 한 마리의 나비가 그랬듯이 말이오.
하물며 나비가 그러한데. 사람은 어땠겠소.
강 과장은 자신의 목숨줄을 스스로 옭아맨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던 인형에 매달려 있던 줄에 말이오. 강 과장의 마지막이 최대한 고통스럽길 바라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자신이 만든 신세계 안에서는 신(God)으로 군림하길 바랐을 그 오만한 얼굴 가득 고통만으로 가득하기를. 후회, 미안함. 그리고 늦었다는 생각도 함께 했으면 하지만. 내가 너무 바라는 것이겠지요.
쉽게 말해 사람들에게 익숙한 일하는 방식을 바꾸려 할 때, 허물없는 또래 집단의 사회적 압력과 제약은 극복해야 하는 가장 강력한 억제력인 동시에 성공을 위해 활용 가능한 가장 효과적인 추진력이다. -47p
사람이 집단 규범과 자기 관점 사이의 불일치를 발견할 경우 긴장이 생기는데 이 때는 셋 중 하나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것은 집단에 영향력을 발휘해 개인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 집단의 영향력을 받아들여 집단 관점에 개인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 집단의 영향력을 받아들여 집단 관점을 접목하는 것, 개인 관점을 기준으로 집단을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집단을 개인 관점 쪽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고 집단의 정보가 그다지 설득력이 없을 때 그리고 개인이 집단을 거부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을 때는 특히 강력한 종류의 긴장이 존재한다.-124p
이 피바람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지 생각해 보았소.
그리고 그 해답은 상황이 아닌 인물이었지.
나는 늘 겉돌았소.
겉으로 보기엔 잠입에 성공한 스파이었을지 몰라도. 나는 그 어디에도 섞일 수 없었지. 왜냐하면 나는 상황에 맞게 변화해야 하는 인형이었으니 말이오. 강 과장의 손짓에 따라 충실히 움직여야 하는. 하지만 나를 제외한 그 모든 인물들은 그렇지 않았소. 심지어 미웠던 강 과장 마저도. 그들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소. 그렇소. 상황에 잠식되어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은 나뿐이었던 거요. 스스로 나를 놓아버리기를 자처한 꼴이 되었던 겁니다.
우습지 않소?
나는 이미 나를 버렸던 거요. 그 상황에 굴복한 거란 말이오. 그렇게 순탄하게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인형극은, 결국은 그렇게 줄이 꼬이기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소. 상황도 사람을 바꿀 수는 없었던 거요. 나만 빼고 말입니다.
인간은 절대 똑같은 시냇물에 두 번 발을 담그지 않는다. 시냇물도 달라지고 사람도 달라지기 때문이다.-171p
사람들은 상황을 '선택'할 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감, 태도, 행동으로 상황을 바꿔놓는다. -341p
더구나 개입의 마지막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을 느끼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 상실 앞에서 미래 문제와 만날 자신의 자원과 능력을 의심했을 수도 있다. -462p
모든 것을 다 처리한 상황에서 내게 남은 것은 두 가지 의문입니다.
하나는 정 청 형에 대한 의문점이오.
이미 내가 스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어째서 골드문의 이자성이라는 역할극을 하고 있는 나를 믿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가며 내게 선택하라는 형의 말을 들으며. 나는 결국 선택을 하기로 했소. 그리고 움직였지. 형의 말이 없었다면 어땠을지. 형이 살아 있다면 정말로 나를 처리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왜 그 꺼져가는 숨을 가다듬고 나를 풀어주려 했는지. 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겠지요. 그는 주관을 가진.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으니 말이오.
그리고 마지막은.
나는 정확하게 누구인가. 에 대한 의문이라고 해둡시다.
형 덕에 내게 묶인 실을 다 끊어낼 수 있었지만... 뭐 그마저도 형의 말이 없었다면 행하지 않았을 테지요. 어찌 되었건 형이 내게 남긴 가짜 시계를 보았을 때. 나는 경찰이었던 내 모습이 가짜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소. 형과 만나 골드문으로 온 그 순간부터. 나는 강 과장이 말했던. 경찰의 편에서 다른 편으로 넘어간 단 한 케이스처럼 나 역시도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겠지.
내가 어떻게 변해갈 인간일지 알 수 없어 무섭고 두렵지만. 지금만큼은 내게 닥친 상황 속에서 살아보도록 해야겠소. 골드문 그룹의 장(長)으로의 삶 말이오.
[참고자료]
[이 글의 TMI]
1. 마지막까지 남은 후보:[불한당], [무간도], [도그빌], [엑스페리먼트]
2. 사실 도그빌과 엑스페리먼트가 제일 끌렸으나 너무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해서 우회함.
3. 상황에 의해 결국 사람이 변화하는 모습을 강조(?) 하기 위해 결국 신세계 선택.
4. [무간도]로 대체하고 싶었지만. 세 편을 다 보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어서 신세계로 대체.
5. [강호]라는 영화도 뭔가 무간도 스핀오프 느낌이 나지만 엄청 재밌지는 않음.
6. 책 자체가 연구에 대한 내용의 집약이라. 에피소드들을 빼니, 정작 인용할 문구가 별로 없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