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아이(넷없왓있_1:룸)
이 글은 영화 [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깨달아야 한다. 나는 아버지의 원대한 계획으로 태어났고, 아버지가 나에게 맡길 임무들을 완수해야 한다. 내가 아버지의 계획만큼 해내지 못할까 봐 두렵다. 나는 너무 허약하고 나는 너무 서툴고 너무 어리석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 무섭다. -36p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소유물이다. 내 안에도 주위에도 더 이상 살아있는 공간이 없다-67
우리는 강하고 아름답다. 물론 힘겹기는 하다. 그래도 함께하는 사랑의 순간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견뎌낼 수 있다-83
이어지는 날들은 매일매일이 똑같다. 내 삶 전체가 길고 메마른, 끝이 보이지 않는, 자비 없는, 단 하나의 똑같은 날이다. 나는 쟁기에 묶인 소처럼 일과표에 매여있다. 온 힘을 다해 쟁기를 끈다. 왜 끌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생각해보지도 못하고, 질문도 못한다. 숨도 거의 쉬지 못한다-119
잭이 자신을 잭이라고 인지한 그 순간부터. 잭이 세상을 볼 수 있는 창구는 딱 세 가지였다.
손바닥만 하게 천장에 나 있는 유리창.
불안 불안한 화면 가득 겨우겨우 가짜 사람들을 보여주는 TV
엄마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다 가져다주는 닉 아저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우주로 가득한 방과 그 방에서 잭과 함께 같은 우주를 보고 있는 엄마. 그게 잭이 아는 전부였다. 잭은 엄마가 해주는 말과 방 안의 것들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진짜라고 믿지 않았다. 아. 자신이 키우는 개 럭키도 제외하고.
의젓한 다섯 살이라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잭은 알지 못하는 것들 투성이었다.
왜 닉이 오면 옷장 속에서 잠든 척을 해야 하는지. 왜 엄마는 닉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려다 다치는 것인지. 닉이 전기를 끊은 날. 엄마가 해주는 이 방 바깥의 세상에 관한 이야기는 다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가 힘들어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닉이 엄마에게 아픈 개를 좀 봐달라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인지. 엄마가 이 곳에 7년간 갇혀있었기 때문인지. 럭키가 실제로 존재하는 강아지가 아니기 때문이라 그런 건지. 잭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살고 있던 모든 우주가 흔들리는 것만 같은 혼란스러움에 잭은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귀를 막았다.
저녁에 침대에 눕는 순간, 린다의 죽음 이후 간신히 내 눈물을 막고 있던 둑이 마침내 무너진다. 나는 린다의 죽음이 슬퍼서 울고, 린다가 죽고 나서야 그 흡혈귀 같은 인간에게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슬퍼서 운다-274p
언젠가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감탄하리라. 아버지의 목소리는 그만 이 집에 파묻혀버리기를. 나를 따라오지 않기를-313p
나는 곧장 두 발을 모아 진짜 사람과 진짜 관계들이 있는 진짜 삶 쪽으로 힘껏 건너뛰었다. 나에게는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고, 되풀이할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315p
트럭이 멈추면, 자신을 말고(Rolling) 있는 카펫에서 빠져나와 점프.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것.
수없이 반복되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잭은 엄마가 미워졌다. 동시에 무서웠다. 죽은 척을 해야 나갈 수 있는 것이 바깥세상이라니. 그것도 엄마가 없이. 하지만 무겁고 답답했던 카펫 안에서 나왔을 때. 거칠게 달리는 트럭의 뒷좌석에서 모든 것이 진짜인 세상을. 잭은 보았다. 코로 들어오는 공기. 하늘. 크고 멋진 나무들까지. 낯설었다. 오감 가득 쏟아지는 생전 처음 느끼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그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잭은 자신이 가짜라고 생각했던 그들과의 간극을 좁혀나갔다.
크고 작은 황홀경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잭은 엄마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모두.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살려달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7년간, 다섯 살인 자신보다 2년 더 그 방에 갇혀 있었으니. 엄마에게도 이젠 이 세상을 보여줘야, 아니 돌려줘야 했다.
나는 혼자다.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외톨이다. 혼자 버텨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싫다. 혼자만 떨어져 있는 것은 지옥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누군가의 품에 안기고 싶다-118p
프랑스어 시험 때문에 외출한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뒤쳐져 있는지 깨달았다. 그 격차를 영영 따라잡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영원히 가짜 삶을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영원히 주변에 머무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죽을 만큼 불안해진다-287p
나는 경이로울 만큼 행복하다. 내가 있는 곳은 수용소가 아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연주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있다.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다른 연주자들,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 함께 흥에 젖기 위해 연주한다. 나는 내 부모의 집을 나왔다. 정말로 나왔다-312p
방 밖으로 나오면 마냥 행복해할 줄 알았던 엄마는 그렇지 못했다. 엄마는 화를 자주 냈고, 외할머니와도 싸웠다. 엄마는 그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잭이 사회성을 배우지 못해서라고도 했다. 잭은 레고도 가지고 놀 줄 몰랐고, 자신에게 말을 거는 모든 사람들의 친절도 받아들이지 못해 늘 숨기 바빴다. 그들이 싫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잭은 문 뒤에 또 문이 있고 또 다른 세계들이 있는 것이 낯설었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멈추지도 않는 세상에 다섯 살 인 채로 던져졌을 뿐이었다.
엄마는 엄마의 문제도 가지고 있었다. 여태 자신이 놓쳤던 시간들이 한 번에 밀려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잭을 버리는 것이 자식을 위해서 더 좋은 것이 아니었냐는 질문에는 결국 엄마는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날 엄마는 약을 먹고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마치 엄마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던 그 작은 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잭은 다시 한번 소리 높여 울어야 했다. 방 밖의 세계는 거짓이 아니었지만,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서 눈을 뒤집고 입안 가득 거품을 물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거짓이기를 바랐다.
우선 나에게는 생명 넷으로부터 조건 없는 사랑과 애정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개 한 마리, 조랑말 둘, 그리고 오리다. -322p
몰랭 선생님은 어디서나 아름다움을 찾고 삶 앞에서 늘 경이를 느끼는, 무한한 선의를 지닌 분이었다. 선생님은 내 아버지와 정반대 편에 선, 아버지가 틀렸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인간들은 훌륭하다-322p
내가 살아가는 길에 만났던 모든 이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그중에는 미소 혹은 친절한 눈길로 어려움에 빠진 나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준, 그러나 내가 이름조차 모르는 이들도 있다. 그저 한 번의 미소가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음을, 공격적인 말 혹은 눈길이 한 사람의 세상을 어둡게 할 수 있음을 모두 알게 되기를-325p
"달려요, 살아야 할 삶이 있잖아요"-326p
잭에게는 엄마가 필요했듯, 엄마에게도 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자신이 가진 힘을 나눠주고 싶었다. 의사가 그랬다. 자신은 플라스틱처럼 변할 수 있는 나이라고. 잭은 다섯 살이 세상의 끝이고 그 방이 자신이 가진 우주의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자신에게는 여섯 살도, 일곱 살도, 그리고 초도 꽂힌 생일 케이크도 있을 것이라는 작은 확신이 마음에 가득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나눠주기로 했다. 그 확신은 엄마가 아니었으면 절대 생기지 않았을 것이므로.
잭은 자신에게 세계를 준 엄마를 사랑했다.
그리고 자신의 힘을 엄마에게 전해주기로 약속한 한 할머니도 사랑했다.
자신에게 시리얼을 준 레오도, 자신에게 꼬리를 흔들며 안기는 레오의 개 세이 무스도 사랑했다.
자신이 트럭에서 뛰어내렸을 때 그 어떤 주저함도 없이 경찰에 신고해 준,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남자도, 미아보호소로 보내라는 동료 경찰의 말을 무시한 채, 잭에게 최선을 다해 결국 엄마를 구해준 경찰도,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수많은 장난감을 전해준 이웃들도 사랑했다.
낯선 사람은 아직 잭에겐 두렵지만.
잭은 그들과 함께 살아가며 그들에게 힘을 주고 그들에게서 도움을 기꺼이 받는 큰 방으로의 한 걸음을 내딛기로 마음먹었다. 할머니의 말처럼 누구나 서로에게 힘을 주니까. 혼자 강한 사람은 없으니까.
[참고자료]
1. 책 [완벽한 아이]
2. 영화 [룸]
[이 글의 TMI]
1. 영화든 책이든 읽고 너무 많이 울었다. 어릴 적 트라우마가 강한 사람이라면 권하지 않는다.
2. 세상의 모든 부모들도 자격시험을 쳐야 한다고 생각한 책이었다.(안타깝지만 책도, 영화도 모두 실화다)
3. 내게도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한 책이었다. 사랑과 사람만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임을 알게 해 줌.ㅠ김영하 작가님 짱이야ㅠ
4. 영화는 탈출 뒤에 찾아오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책은 갖혀 있는 동안 아이가 겪었을 갈등들을 잘 그리고 있다.
5. 모든 아이들이, 아이었던 모든 사람들이 상처를 잘 치유할 수 있는 2021년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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