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없왓있2: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이 글은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우슈비츠'라는 단어를 들으면 느끼는 감정은 비슷할 겁니다.
하지만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지요.저 조차도 유추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해봐야 끽해야 유대인, 독일, 나치 정도니까요.(아. 물론 히틀러 ㄱㅅㄲ 도 있겠죠.) 제가 무식해서 그런 것이니 이미 아시는 분들은 노여움을 거둬주세요.
저는 소위 '극한 상황'을 무대로 한 영화나 책을 좋아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사람이든 스스로든 세상이든 대상을 가리지 않고 실컷 짓밟히고 있을 때마다 저를 구해준 것이 이 '극한 상황'속에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목숨이 왔다 갔다 했을 비운의 시대에 함부로 견줄 수는 없겠지만. 사회적으로 어쩔 수 없었던 장벽 안에서도 고고하게 자신의 삶을 지켜 나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결국 제가 꿇었던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 제 밥벌이를 그만두려 했을 때도. 고학생의 신분으로 새벽까지 울면서 공부와 아르바이트의 고행 군을 견뎌 내야 했을 때도.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쓰리잡을 꿋꿋하게 버텨내야 했던 20대에도. 심지어 제가 목숨을 끊으려 했을 때도. 이름도, 이유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은 그들에게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은 저를 구해주었습니다. 그것도 매번. 진심을 다해서요. 너만은 살아남으라면서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인간은 그들에게 그 어떤 고마움의 말도. 심지어 그들에 대해 공부해야 할 마음도 제대로 갖지 못했죠. 참으로 부끄러운 인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 브루노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제가 가진 마음의 빚 같은 것을 전혀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그 시대의 고위 간부급 군인이고. 브루노는 겨우 열 살 남짓 된 아이일 뿐이니까요. 네. 아이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지 돌아볼 필요도, 이유도 없었겠죠. 실제로 브루노가 저리 신나게 뛰어다니는 장면의 한 옆에는 어떤 여인이 끌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브루노에겐 그저 배경일뿐입니다. 자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관련 없는 배경.
브루노의 아버지에게는 나라가 원하는 임무가 주어지고, 덕분에 가족 모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예전에 살던 집 보다 경계가 삼엄한 것 까지는 브루노도 이해해 줄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왜 집 근처 농장에 사는 농부가 줄무늬 파자마를 입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죠. 어머니에게 왜냐고 물어보지만. 어머니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애타는 브루노의 질문에 시원한 답을 내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군인인 아빠는 그런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는 듯, 파자마를 입은 것들은 사람도 아니라고 합니다. 살아 움직이는,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이기에 브루노는 그 말을 완벽히 이해할 수가 없죠. 결국 브루노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살아 숨 쉴 것만 같은 뒤뜰 너머의 세상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부모님은 단지 창문을 막아 창문 너머로 보이는 농장을 만 안 보이면 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브루노의 상상력은 이미 창문을 몇백 번이고 넘어 달아나고 있었죠. 그만큼 아이를, 그리고 아이의 생각을 가둬두기엔 너무도 좁고 경비가 삼엄한 집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부하 코틀러에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네를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코틀러는 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농부 아저씨를 불러 이 일을 해결하라고 합니다. 아니. 다그치거나 혼내는 편에 가깝게요. 코틀러 대위의 아버지뻘은 되어 보이는데도요. 그리고 농부는 그런 코틀러의 말에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브루노의 소원을 들어줍니다.
파벨.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아저씨의 이름입니다. 그네를 만들어 준 것도. 그네에서 떨어진 브루노를 도와준 것도. 다 파벨이었죠. 예전엔 의사였는데 감자 깎는 것이 좋아 이 곳으로 왔다는 말이 브루노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엄마가 왜 파벨과 단둘이 있게 해주지 않는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을 때 까지요.
이 영화가 슬픈 지점.
우리의 가슴을 괴롭게 하는 지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브루노의 시선으로 그 시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만, 브루노는 모르는 것들이 계속 우리의 심장을 찔러댑니다. 파벨의 표정이 슬픔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파벨이 어떤 심정으로 감자를 깎고 있는지. 자신의 아들뻘은 되는 코틀러 대위의 푸대접에도 왜 견뎌야 하는지. 왜 파벨이 돌아오지 않는지. 브루노는 과연 알까요.
어느 날. 브루노의 상상력이 집 안에 있는 브루노의 육신이 들으라는 듯 휘파람을 불러댑니다. 휘파람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뒷문이 열려 있죠. 브루노는 그 틈을 노리지 않고 냅다 자신의 상상력이 있는 곳으로 미친 듯이 달려갑니다. 저번엔 어머니에게 들켜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야 했지만. 이번 만은 성공이었죠. 브루노는 신나게 탐험을 시작합니다.
늘 창문으로만 보던 농장 근처에서 브루노는 철조망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번엔 자신의 또래처럼 보이는 소년입니다. 힘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아이의 이름은, 생김새만큼이나 낯선 슈무엘이라고 하네요.
왜 자신만큼이나 어린 슈무엘이 새 막사를 짓고 있는지. 옷에 붙은 번호가 왜 놀이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혼자 갇혀 있던 집에서 벗어나 새 친구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브루노는 그저 신이 납니다. 슈무엘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큼 신나지 않아 보이지는 않지만 처음 만났고 배가 고파 그런 것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한 듯합니다. 하지만 슈무엘이 유대인이란 것을 알게 된 순간만큼은 브루노도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슈무엘 앞에서 뒷모습을 보이며 집으로 달려가죠.
아이의 시선으로 보기에 영화가 슬픈 지점은 또 존재합니다.
그것은 브루노의 누나, 그레텔의 모습입니다. 그레텔은 가지고 놀던 수많은 인형을 지하실에 처박고 가정교사가 가르쳐주는 대로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가정교사는 유대인 때문에 나라가 이상해졌다고 말합니다. 착한 유대인은 없다. 만약 그런 유대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브루노가 세계 최고의 탐험가가 된 증거라고 말하죠.
코틀러 대위를 좋아하는 마음도 어느 정도 작용한 듯, 군복 입은 사람들을 숭배하기 시작하고, 신문에 나오는 나치즘과 관련된 그림들을 스크랩하고 벽에 도배하기 시작합니다. 바보 같은 남동생에게 저긴 농장이 아니라 수용소. 유대인들의 강제 노역 소라는 말을 해주죠. 쓸모없고 사악한 유대인들이기에 그곳에 간 거라고요.
슈무엘이 작은 잔을 닦으러 자신의 집에 왔을 때, 브루노는 반가운 마음에 슈무엘에게 음식을 줍니다. 하지만 코틀러 대위에게 그 모습을 들키게 되죠. 강압적이고 무섭게 자신을 다그치는 모습에 브루노는 슈 미엘을 알지 못하고 음식을 자신이 주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단지 혼나는 것이 무서워서였을까요. 아니면 브루노는 누나와 가정교사가 말한 것처럼 유대인들이기에 그런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을까요. 브루노는 자책합니다. 하지만 그 자책의 성격은 브루노 자신만이 알겠죠.
며칠 뒤에 다시 만난 슈무엘은 이미 너무 많이 맞은 후였습니다. 하지만 철조망 사이로 그들은 악수를 하고 다시 친구가 되기로 합니다. 브루노가 마음의 빚이 생긴 시점이었겠죠. 그리고 그 빚을 청산하고 진짜 친구가 되기 위해 슈무엘의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주기로 합니다. 하지만 브루노는 슈무엘과 가장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줄무늬 파자마. 파자마를 입고 빡빡 깎은 머리를 모자로 가리면. 우린 똑같을 거야!! 라며 브루노는 좋아하죠.
땅을 파고 철조망 밑으로 들어간 브루노가 난생처음으로 보는 생경한 풍경 속에서 탐험을 한참 즐기고 있던 중. 가족은 브루노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뒷문이 열려있었음을 알게 되죠. 설마 하는 마음은 결국 부정하기 싫은 사실이 됩니다. 나치 고위 간부의 아들이 수용소에 들어간 것이죠. 그리고 지금 그 수용소에서는 남은 유대인들을 몰살을 시작했죠.
영화의 마지막은 미치도록 잔인합니다.
아들을 찾는 브루노의 가족과 수용소 안의 두 소년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기에 더욱 잔인합니다. 두 소년은 결국 아주 좁고 창문도 없는 방에 다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갇히게 됩니다. 그 와중에도 브루노는 해맑게 자신의 친구를 안심시키려 말합니다. 잠시 여기 있는 것이라고요.
비가 내리기 시작한 수용소의 밖에 덩그러니 놓인 브루노의 옷을 움켜쥐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모습도 슬픕니다. 하지만 굳게 닫힌 가스실의 모습밖에 보이는 수많은 줄무늬 파자마가 보이는 장면에서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브루노의 잠시는 영원이 되어버린 것이죠.
우리는 이 슬픔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브루노의 죽음을 안타까워해야 할까요 아니면 늘 죽어야 했던 수많은 줄무늬 파자마들의 존재에 슬퍼해야 할까요. 이 죽음을 우리는 감히 저울 위에 올릴 수 있을까요.
[참고자료]
1.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함께 보면 좋은 것들]
1.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올타임 레전드
2. 책 [주기율표]<<내 최애 1
3. 책 [동급생]<<내 최애 2
4. 영화 [더 리더:책 읽어 주는 남자]<<내 최애 3
5. 책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이 글의 TMI]
1. 함께 보면 좋은 것들의 경우는 다 리뷰 할 예정.
2. 아우슈비츠에서는 맥주병 두 개 분량의 물이 주어졌다. 그것을 마시는데 쓴 사람보다 자신의 몸을 씻는데 쓴 사람이 더 많이 살아남았다.라는 라디오 방송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여기 없을 것이다. 내가 인간성을 점점 잃고 괴물이 되려고 할 때마다. 나는 그 방송을 악착같이 떠올리려 애쓴다.
3. 역사 공부에 눈 뜬 순간. 헬게이트가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4. 타코 먹고 싶다(미친 이 와중에도 먹을게 생각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