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x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unalogi Dec 16. 2021

지구를 집으로 삼은 사람들

영화 [노매드랜드]리뷰

이 글은 영화 [노매드랜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맨날 스모어나 구워먹고 바베큐나 하는 줄 알았지 벌레랑 싸워야 한다는걸 몰랐던 철없는 그때의 나.

한때 캠핑 바람이.그러니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캠핑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헛바람이 가슴 가득 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돈도 없으면서 비싼 캠핑카의 카탈로그를 보며 이정도는 되어야지. 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죠. 아마도 어딘가로 절대 갈 수 없이 붙박이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때의 제게는 그런 노매드(Nomad)의 삶이 마냥 자유롭게만 느껴나봅니다.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책을 선물로 받았을 때(참고 1)도 그저 캠핑!! 의 로망을 담은 책일 것이라는 생각에 행복해하며 책을 읽어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연배우의 말 처럼. 노매드의 삶에 대한 환상이 모조리 다 깨져버리게 한 책이었습니다.책 장 마다 솜씨좋게 제 심장 깊숙한 곳까지 칼을 찔러 넣는데다 노매드의 삶도 우리처럼 발이 묶인 코끼리의 삶도. 다를 것 없이 힘들고 버티기 어려운 것은 마찬거지였더군요.


원작을 뒤로 하고 영화관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닥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마음의 상처를 책에서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죠. 얼마나 더 후벼파나 보자. 라는 생각에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머릿속에서 그리기만 하던 풍경들이 눈 앞에 펼쳐졌을 때는 압도되는 아름다움에 그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편번호와 함께 지워져 버린 사람들. ;그리고 실제 노매드들과 함께 하다.
사진출처:NYC CultureBest/ 꼬질꼬질해 보이지만 어쩐지 모르게 자유가 느껴지는 장면들

영화의 시작부터. 우리는 마음 한가득 먹먹함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대공황 시대에 완전히 몰락해버린 도시에서 쫓겨난 사람들. 우편번호마저 없어진 마을에서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라는 사전 정보를 공지하며 영화가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펀'은 이미 은퇴할 나이가 다가온 사람이고. 죽은 남편의 흔적들 모두 벤에 싣고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죠. 삶의 터전. 이라는 말의 물질적인 증거가 되는 집도 없이 자신들의 삶을 지고 옮겨다니는 삶을 쳐다보는 제 3자인 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그 고단한 삶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처럼. 펀의 얼굴은 적당히 지쳐보였고, 적당히 포기에 익숙해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펀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노매드의 삶에는 어쩌면 선배라고도 불러야 할 수도 있을 법한 많은 동지들이 등장합니다. 놀랍게도 이 배우(!!)들은 실제로 노매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엔딩 크레딧에서 극 중 이름과 크레딧 상의 이름이 일치하는 것을 보고 뭔가 이상해서 검색을 해 봤더니. 진짜더라구요. 다시 말해 영화 자체가 잔잔한 드라마가 아닌 다큐의 형식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죠. 어쩐지 맥도맨드가 말이 너무 없더라니.


실제 노매드 생활을 하는 사람과 섞어놔도 아무런 이질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 무리에 녹아있습니다. 그 또한 영화를 보며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또다른 포인트였죠.



작품상 받은 영화는 어렵다?;생각할 시간을 필요로 하는 영화일 수도. 
사진출처:다음 영화/ 이 컷만 봐도 주인공이 자연에 가까움을 알 수 있었음.

영화를 보기 전, 큰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을 유력한 영화라 이해하는 것에 어려울까봐 조금 겁먹긴 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대단하길래. 라는 생각으로 영화관에 당당히 입성했었죠.


우선 영화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이 정말 컸습니다.사막이라는 황망한 배경을 압도하는 하늘과 광활한 영토만으로도 넋을 놓고 영화를 바라보기 충분했습니다.(참고 2) 그 커다란 지구라는 집을 배경으로 서 있는 사람들은 이제 인생에서 석양의 시간대에 존재한 사람들이었기에. 마치 원래 거기 있기 위해 존재한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맥도맨드는 이 영화에서는 말을 직접 하기 보다는 노매드들의 삶을 자신이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침묵과 경청에서 오는 힘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죠.


영화 자체가 생각할 시간과 마음의 공간을 주긴 하지만. 이런 구성이 심심하거나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저 처럼 캠핑 영화가 아니어서 실망을 했거나. 아직 삶에서 실패보다 패기로 버틸 수 있을 용기가 있어 배우들이 처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없다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 어떤 큰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시시콜콜한 것들이 걸림돌이 되어 펀의 마음을 신경쓰이게 긁을 뿐이죠.


사실 인생도 그런거 같습니다. 엄청나게 큰 이벤트들만 들어차야 값진 인생이 아닌 것 처럼. 영화는 처절하게 사실적입니다. 보는 것 만으로도 마치 우리 인생 한 시점에서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움이 피부로 느껴지는 영화이기도 합니다.저 역시 펀이 추위에 떨며 벤에서 잠드는 장면에선 팔뚝에 소름이 서서히 돋았죠.


노매드들의 삶을 해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따라다니며 소수로 이뤄진 팀이 영화 촬영을 했다는 뒷이야기 역시도 시사하는바가 컸습니다.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죠. 그랬기에 영화에 출연한 노매드들 모두 마음을 열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마칩시다.

미나리, 모리타니안,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더 파더, 노매드랜드 로 이어지는 기분 좋은 영화들의 행렬에. 간만에 환호성을 쳤습니다. 아직 [더 스파이]가 남아있긴 하지만. 마지막을 노매드랜드로 마무리 하는 것에 참 감격스럽습니다.(낙원의 밤을 끼얹을 뻔 했던 것은 안 비밀)


솔직히 영화관에 갈 시간이, 그것도 매주 갈 시간이 안 되는 스케줄의 4월이었습니다. 근데도 마치 최면걸린 사람처럼 일요일만 되면 영화관으로 출근(?)했죠. 무엇을 그리도 피하고 싶었나. 라는 생각을 며칠 전에야 겨우 했습니다. 맞닥뜨리기 싫었던 제 마음과 정면으로 바라보았죠.


유난히 흔들리고 힘들었던 4월달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 라는 생각이 참 많이 드는 날들이었죠. 앞으로 계속 나가는 것에 대한 회의감. 언제까지 이런 삶을 이어가야 하는 것일까 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나는 무슨 선택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 어떤 답도 스스로에게 해주지 못하고 계속 뚜껑만 꾹꾹 눌러닫는 식으로 버텨오기만 했었습니다.


벚꽃이라도 조금 남아있었다면. 장렬히 안녕을 고하는 꽃잎들을 보며 마음의 위안이라도 얻었을텐데. 그저 제 변덕 만큼이나 난리 법석인 4월의 날씨 속에 저는 고스란히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기만 해야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면의 싸움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가 고지를 점령해야만 했죠.


영화 [노매드랜드]는 그런 제게 일말의 답을 살짝 알려준 영화입니다. 제가 마음 상하지 않을 만큼 은은하고 잔잔하게. 마지막 장면에서 펀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말하며 측은하게 바라보지만. 그것 마저도 자신의 선택이고 삶은 계속 된다고 다독여주는 것 같은 눈빛이었거든요.


이제 벌써 어제가 되어버린 제 모든 고민들을, 주인공 펀은 담담히 자신의 벤에 싣고 멀리 떠나준 것 같은 느낌입니다. 저는 묶여있고 펀은 떠났지만. 그들이 그랬듯이 다시 만나겠죠. 그때가 되면 저 역시 웃으면서 다른 사람의 고민을 기꺼이 짊어질 수 있을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참고 1

친구가 선물 해주고 한다는 말이 내가 이걸 다 읽고 이해를 못할거 같으니까 니가 읽고 이해해서 설명을 좀 해줘라. 라고 했음. 이자식이 뭐라는거야. 라고 하려고 했지만 책도 주고 고기도 사줬으니 해야죠 사장님 암요. PDF로 드리면 될까요?


참고 2

웬만하면 걸어서 안 지치는데 미국에 있을 때 걷다가 지쳐서 반쯤 탈수한 상태로 버스 타고 집에 왔었음. 땅덩어리 너무 넓어서 미술관 하나도 제대로 보려면 이틀을 연달아 가서 층별로 감상해야 할 정도였음.



[이 글의 TMI]

1. 아몬드 씨를 말릴 기세.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에어 프라이기.

2. 5월 5일은 쉬니까. 이번주말엔 몰아서 일 해야지.ㅠ

3. 여름이 오긴 하나보다. 유리잔 예쁜 것만 보면 사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4. 문득 작가로 사는 삶은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든다.

5. 그러기엔 능력이 너무 없지.





매거진의 이전글 늙음은 잘못이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