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스파이]리뷰
한동안 영화관 가는 게 즐거웠습니다. 해외 영화제 덕에 좋은 영화들이 연달아 개봉했고. 그 덕에 저는 4월의 주말에 늘 좋은 영화와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시국에 접어들고 나서는 이렇게 영화관에 가는 것이 즐거운 적이 없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봐도 손에 꼽을 정도로 행복한 날들일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물론 블로그를 위한 글감에 대한 생각을 덜어낼 수 있어서 기쁘기도 했지만, 글감을 쌓아놓고 써야 하는 고통도 함께 있기에 완벽하게 마음이 편한 날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거의 마지막에 가까운 리뷰인 더 스파이에 대해 글을 쓰고 있자니. 아쉬운 마음이 들더군요. 이제 봄은. 또 한 번 가버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바꾸는 세계;진심은 언제나 모든 것을 바꾼다.
언제인가부터 영화 예고편을 보지 않고 영화관에 가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이 나오면 무조건 본다.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떠한 선입견으로 시작하기도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예매할 때는 한국 영화 공작과 비슷하다는 말이 이미 마음에 박힌 채였죠. 다행히 공작도 매우 좋게 본 영화였기 때문에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정말 비슷했습니다. 분위기도. 그리고 총격전 한 번 없이 긴장감이 영화 내내 가득한 것도. 마치 그의 최근 (재) 개봉작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모리타니안을 적절히 섞은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또 하나의 전쟁이 일어날 뻔 했던 사건을 막기 위해 스파이 역할을 해야 했던. 정말 평범한 샐러리맨과 러시아 체제에 반기를 들고 전쟁을 막기 위해 힘썼던 러시아 간부 간의 계획과 우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세계를 지킴과 동시에 그들의 믿음도 함께 지켜야만 했죠. 그리고 여전히 우리 오이 오라버니는 못생겼는데 잘 생겼고요.
영화의 메시지 자체는 매우 울림이 컸습니다. 정 반대의 이념을 가진 국가 출신의 두 사람이지만. 세계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것이 정말 왜 여태껏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명대사라고 할 것이 그다지 없는 영화였을 수도 있는데. 단 한 줄. 그러니까 두 사람이 만났을 뿐이지만 그렇게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은 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였습니다. 그들도 알았을까요.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기는 알았겠지만. 자신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무겁고 위대한 일임은 몰랐을 테죠.
오이 오빠의 하드캐리;더 일해줘라. 제발 일해줘라.
크리스찬 베일은 영화에 따라 몸무게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기로 유명합니다.(참고 1) [머시니스트]에서는 말린 멸치보다도 더 처절한 모습으로. [바이스]에서는 동맥이 지금 터져도 이상할 리가 없다고 생각할 만큼 부풀어 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선배이자 또 다른 명배우인 게리 올드만이 분장을 통해 정말 티 하나 나지 않을 만큼 몸집을 바꾸는 것을 보고 소위 말하는 현타가 왔다고 했죠. 그만큼 자신을 희생해서 메소드 연기를 해야 하는 어려움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 생각합니다.
컴버배치도 마치 그러기라도 하겠다는 듯, 체중 조절을 필두로 한.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적절한 짜증이 섞인 가장의 모습과 자신의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쳐야 할 만큼 위태한 상황까지 잘 소화합니다. 모리타니안,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거쳐, 이 영화에 와서야 드디어. 그에게서 셜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준 작품인데 그걸 잊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갑옷들을 벗어던져버립니다. 경이로울 정도로 다른, 혹은 그동안 가려져있던 모습을 보여주죠.
마지막 5분은 최소한 이렇게.;낙원의 밤 보고 있나.
죄수의 딜레마.라는 것이 있죠. 쉽게 설명하면 두 공범을 따로 가둬놓고 각자에게 딜을 하면. 경우의 수를 따져보았을 때 상대방을 배신하는 것이 가장 자신에게 이득이기 때문에 두 공범 모두 서로를 배신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주인공이 대면했을 때 곧바로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레빌과 올레크 두 사람은 서로의 신념도 지켰고, 세계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킬 수 있을 만큼 두터웠던 우정까지도 사수할 수 있었습니다. 대충 예상하셨다시피 저는 이 장면에서 또 한 번 오열을 해야 했고요.
모든 것은 처음만큼이나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심리학에서는 무슨 효과라고 하는데 갑자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요. 아무튼 마지막을 마무리 잘 하면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좋게 남기 때문에 한낱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때도 끝을 좋게 마무리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죠.
비록 실화가 바탕인 영화라 바꿀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었을 겁니다. 때문에 아마도 연출에 많은 공을 들였을 거라고 예상 정도만 할 수 있죠. 그럼에도 마지막 5분이 주는 전율은 무어라 할 수 없이 컸습니다. 기대해라 기대해라 해라해라 해놓고 막상 뚜껑 열어보니 아직 라면도 안 넣었고 물도 안 넣은 상태로 냄비만 신나게 타들어가고 있었던 낙원의 밤의 그것과는 사뭇 비교가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용서한 사람의 미소를 모리타니안에 이어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그 사람의 그릇에 감탄할 뿐입니다.
마치면서.+함께 보면 좋은 영화들
최근에 새로운(?) 작업 장소를 찾았습니다. 탁 트인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마음에 남은 힘든 응어리들이 녹아내린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 정도로요. 눈으로는 풍경을 보고 손으로는 타이핑을 하며 오래간만에 두 시간 반 동안 답답하지 않은 기분으로 작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주말에 옆 나라가 좌충우돌 쏘아 올린 로켓 때문에 약간 마음이 불안한 상태라서 치즈 케이크도 하나 먹고( 새로운 핑계) 오래간만에 좋은 곳에서 작업을 했습니다.
당분간은 또 신작보다는 스테디 관련 포스팅을 하게 되겠지만. 개봉하고 있는 영화를 포스팅하는 것도 참 재미있는 일이었음을 알게 해 준 4월이었습니다. 진짜 더럽게 힘들었다는 말 외엔 나오지 않는 4월이었지만 막상 또 간다고 하니 섭섭하네요. 마치 좋은 영화의 행렬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이 영화처럼 말입니다.
참고 1
크리스찬 베일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건 말해 뭐해. 다크 나이트. 만약 그걸 빼고 이야기 하라면 아메리칸 사이코.
[이 글의 TMI]
1. 진짜 오래간만에 주말의 행복함을 느끼는 중
2.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이 줄어드는 것도, 글이 잘 써지는 것도 아님. 그저 즐길 뿐.
3. 황사 너무 심해서 최근 달리기 너무 못 함.
4. 청소하고 환기를 못하니 너무 답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