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unalogi Dec 31. 2021

그냥 다 망한 연구원의 하루

진짜 다 망함 주의

[실험이 망했기 때문에 글도 망한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

ㅈ됨

실험이 망했다.


그냥 딱 봐도 망했다.


아침에 오자마자 확인했는데 망한 걸 보니 오늘 하루도 폭망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걸 어떻게 만회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돌려봐도 저 실험을 다시 해야 할 시간이 나오지 않는다. 데이터 미팅이 있기 전까지는 무조건 성공해야 하는 실험인데 망했다. 미래의 내가 이제 슬슬 내 멱살을 잡으러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라서 더는 미래의 내게 맡길 수도 없다. 15분 정도 그 자리에서 멘붕 상태인 채로 있다가 이대로 돌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 일단 세포부터 다시 깔았다.(참고 1)


진정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세포는 어째 되었거나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답이 없으니 일단 쥐부터 보러 가야겠다. 내 새끼들 잘 있겠지?


진짜 완전 망했다.

쥐도 죽었다.


진짜 망했다.


욕이 절로 나온다.


몇 번 쥐가 죽었는지 확인을 해야 하지만(참고 2) 확인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9시에 출근해서 고작 45분이 지났을 뿐인데. 나에게 너무 크고 심한 시련이 두 번이나 연타로 왔다. 그것도 내가 절대 죽지 않기를 바라고 바라던 쥐가 죽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는 내 주위는 바로 누아르로 변한다. 누가 죽였는지 알아내야 하지만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아직 속단하기엔 이르다.


쥐 장기 영상 촬영이 남아있으니. 그것만이라도 믿어야지.라며 울기 직전인 나를 달래본다.


결투 신청인가.


근데 이것도 망했다.


와 이젠 진짜 뭐 어떻게 할 수도 없다.


2주 뒤 데이터 미팅에서 혼나고 있는 내 모습이 4D VR로 생생하게 보일 지경으로 망했다.


실험을 하는 주체인 세포와 쥐가 죽어버린 연구원은 용왕님에게 간 바치러 가는 토끼와 같다. 근데 이제 간이 없는.


그만큼 망했다는 거다.


이미 너무 많은 길을 와 버렸는데 돌아갈 수도, 슈퍼에서 사서 소위 말하는 것처럼 "땜빵"을 할 수도 없다.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세포와 쥐는 이미 요단강으로 가는 편도 티켓을 사도 너무 오래전에 사버렸다.


내가 뭘 잘못했지.라는 생각이 온몸을 엄습해온다.


트러블 슈팅이라도 해야 된다고 생각해 보지만. 원인을 알 수가 없다. 내가 잘못해서 쥐와 세포를 죽인 게 아니니까. 단지 가설이 잘못되었거나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자연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반응인 것 외엔 이유가 없으니까.


지금 나는 내 가설이 틀려서 화가 나는 걸까 아니면 데이터가 사라졌음에 일희일비하는 초보적인 마음을 드러내는 연구원인 걸까.


그것이 무엇이든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찌 되었거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 무엇도 다시 되살릴 수 없는 것은 명확한 현실이니까.



오열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들어가지도 않는 점심을 꾸역꾸역 먹고 거울을 들여다봤더니 자른 머리도 망했다.


아니 망해 있었다. 하긴 직접 잘랐으니 망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아니다.


머리가 망했으니 실험도 망한 거겠지.라는 매우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기로 했다. 그렇게 미쳐간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정리하고 싶지 않다. 실패했다.라는 것이 늘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연달아서 올 때는 진짜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냥 집에 가서 샌드백이나 팡팡 치다가 잠들고 싶을 뿐이다.


연구원 모 씨의 다잉 메시지(Dying message)

한동안 멘탈 바사삭 상태였다.


연구 노트를 적다가도 끓어오르는 내면의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고 연구실 주변을 돌다가 와서 다시 적곤 했다. 어차피 야근은 확정이니 그 사이에 차분히 데이터라고 부를 수도 없는 숫자의 나열을 들여다보며 건질 것이 있는지를 간절히 바라는 수밖에 없다.


연구원이라는 직업은


수천수만 가지의 가능성 중 단 하나의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지 않았던 것을 지워나가는 직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날이 한 번씩 올 땐 나 역시 휘청거리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는다.


지금 알아내지 못하면 나는 이 괴로움을 다시 겪으면서도 왜 그런지조차 알 수 없고, 이유도 없는 괴로움을 계속 겪으면서도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버둥거리기만 할 테니까.


소위 말하는 빡침을 연료로 써서 이 위기를 벗어나가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매달리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직업을 이토록 미운데도 사랑하는 이유이다. 가즈아.



참고 1

세포 실험이 망하면 안 되는 이유

1. 세포 안정화에만 1주일 걸림

2. 세포 안정화 후에만 실험 가능

3. 세포 안정화에 들어가는 실험 재료들 엄청 비쌈(장난 아님. 200ml 우유 한 팩 크기 기준 20만 원 넘음)

4. 실험 한 번 하는데 보통 2~3일, 데이터 정리하는데 1일

5. 세포 실험이 망했다?=내 2주일+실험 재료 가격+데이터+내 멘탈 다 날아가는 거.

6. 그때 건드리면 다 주옥 되는 거임.


참고 2

어떤 쥐에 무슨 실험을 한 것인지 알아야 하니 보통은 쥐에 번호를 붙이는 편.(꼬리에 표시를 하거나, 발가락을 자르거나) 저렇게 쥐가 죽으면

1. 어떤 쥐가 죽었는지 확인

2. 왜 죽었는지 분석

3. 도저히 왜 죽었는지 알 수 없을 수도 있으니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장기가 녹아내리기 전에 해부

4. 시체에서 나는 냄새. 여름엔 더 고역임

5. 죽어서 열받음

6. 실험 망해서 짜증

7. 아침부터 이러면 진짜 멘탈 파괴


[이 글의 TMI]

1. 내가 추위를 타는 게 아니라 에어컨이 성능이 좋은 거였네. 왜 이렇게 덥지

2. 멜론 격파 중

3. 체리 들어옴. 격파 중

4. 이렇게 짜증이 날 땐 폭식보다 저는 생야채 위주의 저녁을 먹는 편. 내일은 힘내라고.

5. 물론 힘이 날 리는 없지만 폭식한 다음날의 죄책감 정도는 덜어줄 수 있지.

6. 영화에서 박사 출신 빌런이 많은 이유가 이해되지 않으십니까. 실험 망하면 그냥 다 미쳐버리는겁니다.



#회사원 #연구원 #실험 #실험망함 #어쩔




매거진의 이전글 백신 Q&A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