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포함]82년생 김지영
작가:조남주
출판사:민음사
이 책은?: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자들이 처한 현실.
평점:★★★
[이 책을 한 문장으로?]
1. 저혈압 환자를 위한 기적의 치료제가 필요하다면?
2.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들의 삶을 알고 싶다면?
3. 소설이라는 것이 더 놀라운 실화 같은 소설이 읽고 싶다면?
[줄거리]
네 살배기 아이 정지원의 엄마, 그리고 세 살 많은 남편 정대현 씨의 부인 김지영은 최근에 이상한 행동을 해서 남편을 불안함과 걱정 속에서 살게 한다. 그리고 그 이상한 행동은 다름 아닌 '다른 사람에 빙의하는 것'
처음엔 죽은 동아리 선배로 빙의해 정대현 씨를 놀라게 하더니, 이제는 명절을 맞아 시댁에서 모인 식구들에게 내 딸도 사람이라며 독설을 퍼붓는 김지영의 친정어머니로 빙의해 분위기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후로 김지영 씨는, 아니, 김지영 씨의 인생은 정신과 의사가 화자가 되어 그녀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내 준다.
정신과 의사의 말을 요약해 보자면, 김지영 씨의 삶은 여자라는 이름으로 겪어야 했던 것으로 똘똘 뭉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 김지영 씨가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 어떤 에피소드도 소설에서 나오는 가상의 이야기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만큼 실감 나는,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차별 혹은 관습에 대해, 하지만 김지영 씨가 모두 겪어온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지막 챕터(그중에서도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 충격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결국은 여기까지인가.라는 생각으로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하는 책이다.
[개인적 견해]
사실 나는 작가의 책 중 사하 맨션을 맨 먼저 접했고, 적잖이 실망했던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말 많다는 이 책을 독서하겠다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조만간 개봉된다는 소식을 들었다.영화가 개봉하면 원작의 책 표지가 바뀌어 재출간되는 것을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나는 일단 읽자. 라며 책을 펼쳐 들었었다. 상상력을 빼앗는 독서는 싫기 때문이랄까. (물론 이미 캐스팅이 누구인지 아는 상황이라, 계속 그들의 얼굴이 대사를 내뱉은 환영에서 벗어나기 힘들긴 했다)
그래서 시작한 독서는,
단 몇 페이지만에 내 혈압을 오르게 하기 충분했다. 마치 내 이야기 같아서. 그리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종갓집에서 태어났다.
종갓집 장손의 첫째로.
손녀, 그리고 딸이었지만, 오히려 딸이 귀한 종갓집에서 자란 나는 어렴풋이 떠올리기에도 사랑을 많이 받은 유년기를 보냈었다.
제사를 지내고 나서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도 삼촌들 사이에서 떳떳하게 수저를 놀릴 수 있었고, 딸이었지만 모든 설거지나 집안일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다. "나는 하지 않는" 모든 일들을 뒤에서 해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그리고 그것들이 조만간에 다 나에게 옮겨올 것임을.
그 모든 일을 뒤에서 해주는 그림자 같은 사람이었던 엄마는 내게는 그런 일을 잘 시키지 않았었지만, 내가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리고 남동생이 크면서 "장손이니까"라는 실드 아래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게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모든 것이 내게 넘어오기 시작했다.
엄마 왜 나는 하는데 남동생은 안 해?
라고 물으면 엄마는 늘 넌 시집가기 전에 배워놔야지.라고 했었고 난 그럼 시집 안 갈 거니까 남동생 시켜.라고 하면 엄마는 늘 남동생은 남자잖아. 라며 내가 벗어던진 고무장갑을 다시 끼곤 했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다시 툴툴거리면서 장갑을 끼는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에도 남동생은 편안히 텔레비전 앞에서 간식을 먹으며 누워있기만 했다. 마치 그 싸움은 자신의 싸움이 아니라는 듯이.
그뿐인가.
내가 늦은 나이에 대학을 가겠다며 학자금 대출을 위해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전화를 했을 때, 엄마는 여자애가 성가시게 대학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엄마는 하루 종일 장사를 망친다며 내게 수화기 밖으로 들리도록 화를 내곤 했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두 번 다시는 부모님께 손 벌리기 싫어 학교를 다니면서 미친 듯이 과외와 학원 뺑뺑이를 돌며 돈을 벌었을 때는, 엄마는 급전이 필요할 때마다 내게 몰래 전화를 걸어 넌 딸이잖아. 엄마 이해해야지.라는 말로 내 마음을 찢어놓곤 했다.
엄마는 딸의 자존감 도둑이 되기 가장 쉬운 위치에 있다고 했던가. 같은 여자인데. 시부모님의 등살에 집안일하느라 어린 날 안아 볼 시간도 없었다며 거칠한 손으로 내 볼을 힘 없이 꼬집으며 울먹이기 일쑤였던 엄마인데. 엄마는 그렇게 엄마가 당한 역사를 내게 물려주려 했었다.
직업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넌 첫째고, 여자아이니까, 교대나 사범대, 간호사는 어떠니 라는 말을 한참 동안이고 들어야 했다. 그리고 현재 직업을 선택한다 했을 때, 이기적이다.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면서 힘든 일이 있어도 절대 부모님께 말하지 않는다. 거봐 내가 뭐랬니. 여자 직업은 딱 두 가지밖에 없어. 공무원이랑 교사.라는 말을 들을게 뻔하니까.
이젠 나이가 든 부모님은 내게 그래도 딸 밖에 없다며 나중에 엄마 늙으면 네가 거둬줄 거지?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장손한테 가. 장손한테 해줄 건 다 해주고 왜 받을 건 나한테 받으려고 해. 라며 톡 쏘아붙이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이 불편했다. 사실이라서 불편했고 이 것이 소설이라는 이름 하에 논란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도 불편했다. 또한 김지영씨가 어째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채 순응하기만 했을까. 라는 안타까움도 남았다. 언니처럼 대들기라도 했다면. 남편에게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커피숍에서 자신에게 맘충이라 놀려대던 남자들에게 크게 소리라도 질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또한 자신도 겪어 봤기에 안다며 자부하는 의사의 마지막 생각이. 김지영씨가 사는 그 세계가 더욱 가망 없고 우울해 보이게 했다.
너무 극단적인 예시다.라는 말들도 많았던 것도 알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 특히 여자들은 이런 것들을 일상 안에서 즐비하게 겪으면서 산다. 단지 형태가 다르고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시는 이런 책이 나오지 않기를. 아니면 이런 책을 읽어도 정말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다. 라고 생각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