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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alogi Nov 07. 2019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넌 다 계획이 있구나? 도망칠 계획!

그림출처


생각해 보면 정신을 차렸을 땐 늘 절벽이 눈 앞이었다.

까마득한 높이에 정신이 번쩍 들어 뒤를 돌아보면 나를 미칠 듯이 쫓아오는 그것의 붉은 눈이 나를 더 서늘하게 했다. 어쩌지 라는 생각과 동시에 내 등에 달린 낙하산 하나만을 믿은 채 그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내 낙하산은 다른 둔턱에 겨우 닿을 정도로 비루했고 부실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충격에 몸 전체가 얼얼해졌다. 둔탁한 고통이 온몸을 지나가도록 나는 잠시 웅크린 채 땅에 누워있었다. 이번엔 한 보름은 욱신거릴 것이다.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아 어깨를 쓰다듬으며 내가 뛰어내린 곳을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내 시선이 한참이고 위로 향했다.


내가 뛰어내린 곳.

두 번 다시 있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나는 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몸에 남은 흙을 툭툭 털어내며 내 몸에서 어디가 다쳤는지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무사했다.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질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와 막상 내려오니 이렇게 풍경이 달라지는구나. 를 느끼며 나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여기서는 잘 지내야지. 저기 있을 땐 힘들어서 너무 행복하지 못했어.라고 생각하며, 나는 방금까지도 나를 따라오던 그것의 정체를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새 삶을 부여받은 것처럼. 그렇게 웃어댔다. 그리고 덩달아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나는 새 사람이 되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적응하는 재미가 있었으며, 내가 저 위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그 모든 나쁜 것들이 없었으니까. 나는 행복했다. 당분간은.


그러나 이 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조금씩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기고, 무언가 허점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분명 위에서 볼 땐 완벽해 보였는데. 익숙해진 것일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내가 잊고 있었던. 여기서는 절대 만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리고 말았다. 이 곳까지 왔는데, 또다시 그것을 봐야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뒤로 계속 그것을 피해 다녔다. 하지만 그것은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가까이 내게로 다가왔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 다니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또다시.


그렇게 또 나는 탈출을 준비했다. 매일매일을 이를 갈며 낙하산을 만들었다. 그것이 잠들었다고 생각되는 시간마다 조용히 밖으로 나와, 또 다른 곳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한 산골짜기를 발견했다. 저 둔턱은 좋아 보였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도 없고, 그리고 또 여기보단 낫겠지. 우선 여기엔 없는 줄 알았던 그것이 또 있으니까. 저 정도면 뛰어내릴 때 충격을 흡수해줄 낙하산도 그렇게까지 튼튼하게 만들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다치지 않을 정도로 만들 시간이 없다면 어디 부러지지 않고 며칠만 끙끙 앓으면 될 정도로만 만들어서 하루라도 빨리 도망가야 했다.


그것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가까워졌다. 이젠 나를 쫓아오는 날도, 그리고 속도도 빨라졌다. 조용히 도망가거나 숨을 죽여 발걸음을 조심하는 날들이 그리워질 만큼. 이젠 다시, 나는 또 도망쳐야만 했다. 매일매일 낙하산을 가지고 다니는 날이 시작되었다.


 나는 다시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나의 뒤엔 그것이 바싹 따라오고 있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처럼 숨이 찼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입 밖으로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조차 사치일 만큼. 나는 모든 힘과 노력을 달리는 것 외에는 분산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다시. 나는 벼랑 끝에 서게 되었다. 신경질 날 만큼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나는 내 뒤에 있던 그것의 눈을 겨우 바라볼 틈이 있었다.

나를 쫓아오는 그것의 형체는 분명하지 않지만, 섬뜩했다.

그림출처

그런데 이번엔 이상했다. 그것의 눈이 어딘가 익숙해져 있었다. 다시 한번 절벽을 등지고 섰을 때, 그것의 눈을 다시 쳐다보고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저번에, 그리고 또 그전에, 나를 도망치게 했던 바로 그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미친 듯이 달려오는 기세를 꺾지 않고 그대로 나를 절벽 끝에서 떠밀어버렸다. 육중한 무게가 나를 저 멀리 하늘 위로 튕겨져 나가게 했다.


허공에서 한참이고 붕 뜬 채 자유낙하하면서, 그제야 내가 다른 것들이 아닌 매번 똑같은 것에게 쫓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절벽에서 떠밀린 충격과 그것의 정체에 대한 깨달음에 잠시 정신을 잃었던 내 귓가에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휘날림이 점점 거세짐과 함께 털썩. 하고 나는 또 다른 둔턱에 추락했다.


이번엔 일어나기 힘들 것 같았다.

몸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컸다.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살겠다고 잡아당겨 작동한 내 허름한 낙하산이, 쭈글쭈글해지며 어둡게 내 시야를 가리고, 내 몸을 덮었다.


이번에 도착한 새로운 곳은. 내게 그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본질적으로 똑같은 곳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살아있는 것으로. 나는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숲 속에서 그것과 마주쳤다. 그것은 매우 작았다. 눈도 그렇게 붉거나 충혈되거나 무섭지도 않았다. 솜털 뭉치 같은 그것이. 어쩌다 그렇게 커져서, 나를 위협했던 것일까.


해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피했기 때문이다. 이 곳은 아니라며 울부짖고,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며 외면해가며, 그 솜뭉치를 괴물이 될 때까지 키웠던 것이었다. 그때 책임졌더라면. 그때 살짝 아파도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도망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매번 낙하산을 들고 다니고, 매번 그것이 내 주위에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먼저 다가가 그것과 맞서는 용기. 내겐 그것이 부족했다.

나는 시간을 두고 조심스럽게 그것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한 발짝 더. 다음날은 두 발 더. 그리고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내가 조금씩 그것에 다가가고 존재의 부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더 커지지도. 그렇다고 더 사나워 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그것에 고삐를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것의 눈을. 제대로 마주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나. 이렇게 두렵지 않은 것이었나. 나는 이 곳에 온 뒤로 또 한 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것을 쓰다듬고, 날뛰려 할 때마다 귀 기울일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것이 나를 쫓아오던 그 끔찍하고 거대한 모습이 되기 전에, 그것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제 두 번 다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고통도 도망치기를 준비하면서 그곳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고통보다 더 한 것은 없었다. 더 이상 낙하산을 만들지도, 그 어떤 다른 낙원도 알아보지 않을 것이다.

 

도망친 곳에는 그 어떤 낙원도 없다는 것을. 이제야 나도 알기 때문이다.


추신.

조던 피터슨의 동영상, 책을 보다가 영감을 받아 쓴 글입니다.

완벽주의와, 강박증, 우울증에 시달리다 계속 미루는 습관이 생겨 늘 좋지 않은 선택을 해야 했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바뀌고 있는 제 모습을 보니 예전 생각이 많이 나기도 하고, 현재는 얼마나 예전과 비교했을 때 나아졌는지에 대한 성찰도 하게 됩니다. 미루지 말자. 라는 말의 어감이 강압적이라 제 목표를 아주 잘고 작게 나눠 매일매일 작은 승리를 하자 라고 생각하는게 더 제겐 맞았던 것 같아요. 다들 작은 승리를 위해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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