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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alogi Oct 21. 2019

당신과의 체스를 세어보아요

당신이 적장이라면, 다시 싸워도 기쁠 것입니다.

체크 메이트


어쩌면 우리의 이 대국은 처음부터 성사될 수 없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신은 나의 빌런이자 적장인 동시에, 내가 일하는 회사의 수장이었으니 말이다. 새까맣게 어린 직원 하나가 불쑥 찾아와, 사내에서 독서모임을 하고 싶다며 내민 제안서를 읽어준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해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의 첫 번째 체스가 시작되었다.

단 2분 만에 내 제안서를 훑어본 당신은,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이미 충분히 얼어붙은 나를 향해 단 한마디를 했었다. 안돼요. 나가보세요.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2분 만에 결론을 내리시기엔 너무 성급하십니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고, 당신은 폰(Pawn:체스에서 가장 약한 힘을 가진 병사. 앞으로 한 칸씩만 전진할 수 있다.) 두어 개 정도로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 시합이 길어질 것임을, 그리고 구차해질 것임을 직감했으리라. 양 미간 가득 서서히 짙어져 가는 내 천자를 보며 안되는구나.라는 생각에 나 스스로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2분도 길었습니다. 나가세요”


당신은 순식간에 내 킹(King:체스판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말. 다른 말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을 낚아채갔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나는 힘없이 뒤돌아 집무실을 나와야 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내가 현재 참여하고 있는 체인지 그라운드와 요일빡독이라는 모임에서.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도 남는 것이 없어 작은 발자취라도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생전 처음 독서라는 것을 하면서 괴로움에 울부짖으면서도 자신을 찾는 항해를 떠나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최고의 환경 설정 속에서 누리는 그 혜택을 내가 일하는 회사에서도 적용해 보고 싶었다.그래서 나는 방금 그렇게 모골이 송연해지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대국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당신에게 두 번째 대국을 신청하기 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당신의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내민 신청서를 찢어발겨 얼굴에 집어던지기 전에, 나 스스로가 바뀐 모습을, 손가락 단 한마디만큼이라도 자란 모습을 보여줘야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요일빡독과 씽큐베이션에서 스스로 책을 읽었고, 나와 뜻을 같이 하는 나보다도 훌륭한 사람들과의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으며, 새벽마다 서평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울부짖어댔다. 책을 좋아한다고 자부하던 내게도 일 주일에 한 권, 그리고 서평 한 편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하지만 내 한계가 어디인지 알고 그 한계를 부숴나가는 경험을 과연 내가 어디서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도 나는 피곤하거나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써야만 했다. 그 어떤 꼬투리라도 잡히지 않기 위해. 늘 솔선수범 했으며 늘 친절했다. 매번 체력의 한계에 부딪쳐 괴롭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또 외로웠지만.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의 머릿속에 단지 2분 만에 쫓겨난, 말도 안 되는 제안서를 들이밀었던 사원으로 기억되기는 싫었으니까.


우리의 두 번째 대국은 부지불식간에 이뤄졌다. 작은 회식자리에서, 요즘 사람들은 여가시간에 무엇을 하느냐는 중간 간부급의 말에,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신의 여가생활을 읊기 시작했고 내 차례가 오자 우리 팀 책임자는 자랑 반 놀림 반을 섞어 그렇게 말했었다.


“쟤는 요새 애 답지 않게 책만 읽어요.”

그때 당신의 눈빛을 기억한다. 그래. 너였구나.라는 는 눈빛.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는 말을 담은 그 눈.


“그때 그 프로젝트 기억하시죠? 쟤가 아이디어 낸 거예요. 역시 책 많이 봐서 그런 건가?”


그리고 그때의 당신의 눈빛도 기억한다. 그게 너였구나?라는 눈빛.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제삼자들의 난상 토론을 BGM으로 깔고 진행된 우리의 두 번째 대국은, 누구는 독서 모임이 필요하다. 또 누구는 그런 거 어차피 모여봐야 놀기만 한다. 라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 누구 하나 독서의 중요성을 간과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당신은 강한 상대였다. 이 참에 독서 모임 하나 만들자 라는 나의 말에도 당신은 고개를 내저었다. 세 번이나.


“아직 때가 아닌가 보지 뭐. 그럼 우리 막내만 계속 열심히 발전하는 걸로 하고 일단 건배나 할까요?!”


중간급 간부의 건배 제안을 통해, 나는 다시 한번 내가 패배했음을. 당신은 어쩌면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일 수도 있음을. 부딪치는 잔들 사이로 나를 내려다보는 당신의 눈빛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뼈저리고 아픈 패배였다.


내리쬐는 여름 태양빛처럼 기세 등등하던 나는, 두 번째 패배 이후 무력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내가 괜한 짓을 했구나. 너무 오지랖을 부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의 끝을 알리는 서늘한 가을바람처럼, 내 의지는 그렇게 꺾여갔다.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마치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나는 내가 속한 독서 모임 속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으며 다시 생기를 얻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강력하고도 큰 동기를 주는 사람들이었다.그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서평을 쓰는 스트레스를 즐겁게 받아들이며, 나는 다시 조금씩 웃기 시작했고, 다시 친절한 나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당신에게 제안서를 들이밀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우리의 세 번째 대국은, 내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막내야, 사장님이 찾으셔”


당신에게 제안서를 들이밀 용기는 없었다. 분명히. 하지만 제안서를 작성할 용기마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를 찾는 당신이라. 그 이유가 어찌 되었건 이번은 내게 어쩌면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일 수도 있었다. 미리 작성해둔 제안서의 날짜를 잽싸게 바꿔 프린트 한 뒤에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나는 당신과의 대국에 뛰어들었다.


“왜 독서모임을 만들려고 하죠?”


이미 두 번의 패배로 상처투성이가 된 나에게 당신은 불쑥 나이트(Knight:활용도가 매우 많은 체스의 말 중 하나. 변칙 공격이 가능하다) 공격을 가했다. 다리가 후덜 거리고 몸이 떨려왔지만, 나는 간신히 뽑아온 제안서를 다시 한번 내밀었다. 그러나 당신은 그 제안서를 보지도 않고 옆으로 밀었다.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무수히 많은 단어들이, 그리고 미사여구들이 내 머릿속을 오고 갔다. 입에 발리고 예쁜 말을 하라고. 내 본능이 나를 꼬드겼다.


“책 좋아한다더니, 아니었나요?”


내 약한 진영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의 룩(Rook:직진 공격이 가능하다.)은 정공법으로 나를 괴롭게 했고, 꽤나 치명적이었다.


“유튜브 에선 웃기도 잘하고 농담도 잘하더니”


내 진영은 당신의 전술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지만, 다시 말하면 나는 당신의 말들을 내 진영으로 불러들인 셈이었다. 그렇게 당신은 나를 공격함과 동시에 방어선을 무너뜨린 것이었고, 나는 그 틈으로 당신이 꽁꽁 숨겨놓았던 킹을 볼 수 있었다. 그랬다. 당신은 처음으로 내게 허점을 보인 셈이었다. 나를 지켜보았다는 허점. 그것이 내가 당신을 파고들어야 할 포인트였다.


“그게 가장 저 다운 모습입니다” 


나는 겁 없이 나의 비숍(Bishop:사선 공격이 가능하다.)을 옮겨 당신의 킹을 겨냥했다.


“그럼 회사에서의 모습은 가짜라는 건가?”


간단하게, 당신은 왕을 막고 있는 퀸(Queen:체스 말 중 꽃. 나이트의 변칙 공격을 제외한 모든 공격이 가능하다)으로 나의 비숍을 처리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회사에도 독서모임이 있다면 회사에서도 그런 모습일 것입니다”


단 하나 남은 룩으로 나는 힘겹게 당신의 퀸을 제거했다. 당신의 공격 차례였고 당신은 지금 킹을 움직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엔 내가 룩을 끝까지 밀어 체크 메이트(외통수)를 외칠 셈이었으니.


“자네 정말 끈질긴 건 아나?”


당신은 어쩐 일인지 킹을 옮기지 않았고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직원들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시면 흐뭇하실 겁니다. 지금은 직원들이 웃지만, 나중엔 사장님이 웃으실 겁니다. 최후의 승자가 되시는 겁니다.”



체크 메이트.

나는 주저하지 않고 외쳤다. 그 말과 함께 나는 지금 당신과 두었던 체스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번엔 내가. 당신을 이겼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 판을 엎어 버릴 수도, 아예 게임을 시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위치에 있던 당신은, 한낱 사원일 뿐인 나에게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주었다. 나는 나 혼자만이 당신을 존중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상처 투성이의 나는 우리가 두는 그 체스 판만 바라다보고 있었지만, 당신은 어쩌면 그런 집중하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경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당신에겐 약점이 되었고, 나는 반쪽짜리 승리를 얻은 것이겠지. 우리의 체스 끝에 얻은 것이라고는 달랑 당신의 도장이 찍힌 종이 한 장뿐이었지만, 당신은 내게 당신의 힘을 빌려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손에 든 종이 한 장의 무게가 이렇게 컸을 줄이야.


다음번 장기 때는 내가 당신을 이겨도 아무 말할 수 없도록 더 성장해 있기를. 당신이 허락한 이 체스의 승전품이 내가 성장하는 동력이 되기를.


추신.

이 글은 제가 회사에서 독서 클럽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이야기를 각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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