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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alogi Jun 18. 2020

크리스틴 이어도 괜찮아

내 안의 그림자 아이

그림출처

영화 [레이디 버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얼샤 로넌의 인생작 중 하나라고 생각함.

그림출처

누구나  자신이 보호받고 안전하며 환영받는다고 느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누구나 긴장을 풀 수 있고 원래의 자기 자신으로 완벽하게 돌아갈 장소가 필요하다. -13p

내면의 아이에 대해 알지 못하면 결국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과 충동을 겪는다. -18p
나,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퍼슨

17살. 고3. 여자. 그리고 이젠 시시해져 버린 고향, 새크라멘토.

크리스틴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사실들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은 자신을 포장하고 표현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크리스틴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멋들어진 이름을 스스로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퍼슨.


 크리스틴은 스스로 큰 따옴표 앞뒤의 이름은 다 없애버린 채 “레이디 버드”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것이 일상생활에서든, 연극 오디션이든 상관없었다. 크리스틴이 아닌 레이디버드라는 이름 안에서. 그렇게 살고 싶었다. 마치 그러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 같았다. 이 지긋지긋한 크리스틴의 삶이 아닌, 레이디 버드로의 삶으로.

 

크리스틴의 부모님이 아닌, 레이디 버드의 부모님을 만나고 싶어.

그림출처

정신의 네 가지 기본 욕구
1. 애착 욕구
2. 자율과 통제 욕구
3. 욕망 충족 또는 불쾌 회피의 욕구
4. 자존감 상승 또는 인정 욕구  -51p

어떠한 관계라도 배울 점이 반드시 있다. 심지어 관계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로부터도 대개는 배울 점이 있다. 그들은 우리의 한계까지 끌고 나가기 때문이다. 저명한 심리학자인 로베르토 베츠는 이런 사람들을 '개자식 같은 천사'라고 부른다-299p
엄마, 매리언

사실 크리스틴이라는 이름보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향 새크라멘토보다도, 혹은 그 두 가지를 다 합친 것보다 싫은 것은 바로 엄마였다.


고향을 벗어나 뉴욕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고 싶다는 자신의 마음을 상큼하게 무시하는 엄마.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보다 크리스틴이 더 좋은 이름이라고 우기는 엄마.

늘 누리는 것에 비해 투정이 많다며 자신을 다그치는 엄마.

중고의류숍이 아니면 옷을 사주지 않는 엄마.

무뚝뚝하고 현실적인 반응으로 일관하는 엄마.


그런 엄마가 레이디 버드는 너무도 싫었다. 특히 자신의 특별한 이름인 레이디 버드를 인정해주지 않는 엄마는 너무도 최악이었다. 저런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며 자라 왔다니. 어쩌면 나 자신은 혼자 자라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엄마와 있는 시간이 너무도 괴로운 데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던 레이디 버드는, 엄마와의 언쟁 끝에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기를 감행한다.


나를 레이디 버드로 불러주는. 나의 친구 줄리.

그림출처

그들은 자존감에 문제가 있으며 배우자, 애인, 상사, 새로 알게 된 지인이 진정으로 자기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자기를 환영하는지 계속 의심한다. 그들도 자신이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여기고 불확실한 감정을 수없이 느끼며, 관계를 맺는데 자주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은 기본적인 신뢰를 발달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내면에 의지할 곳이 별로 없다. 대신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확신, 보호, 안정, 고향 등의 느낌을 전해주기를 소망한다. 그들은 배우자, 애인, 동료에게서, 또는 축구경기장이나 백화점에서 고향을 찾는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기껏해야 산발적으로 고향의 느낌을 전달하면, 항상 새로이 실망감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이 다음과 같은 상황에 놓였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즉 자신의 내면에 고향이 없으면 외부에서도 고향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14p
친구, 그리고 남자 친구.

그녀를 이해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고 불러 줄.

다행히 그녀의 곁에는 줄리가 있었다. 그리고 연극부에서 만난 남자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레이디 버드의 첫 남자 친구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감춘 사람이었고 레이디 버드에게 온갖 모욕감을 안겨준 이별을 가져다주었다. 다른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들키다니!! 뼈아프고 부끄럽고 속상한 이별을 난생처음으로 오롯이 받아들여야 하는 그때에도, 곁에 있어 준 줄리가 있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줄리는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고 불러주는 자신의 진정한 친구였으니까.


그러나 사춘기의 우정이 늘 그렇듯. 레이디 버드는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깜빡 잊게 되었다. 좀 더 반짝거리는, 학교에서 "잘 나가는" 제니를 만나게 되고. 그리고 엄마 덕에 등 떠밀리다 시피 하며 시작한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두 번째 남자 친구를 만나면서 더더욱. 레이디 버드는 줄리를 무시하고, 동네에서 가장 예쁜 다른 사람의 집을 자신의 집이라고 거짓말하는 초강수까지 두면서. 그들의 세계에 그렇게 진입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 레이디 버드의 거짓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들키게 된다.


게다가 두 번째 남자 친구는(무려 티모시 샬라메!!!)  레이디 버드를 전혀 특별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까지 배신해가며 그에게 올인했는데도. 그에게서 마저도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레이디 버디는 결국 또 한 번의 결별을 맞이하게 된다.

Big apple. New York
영화를 보며 거리를 두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림자 아이와 거리를 두기가 무척 어렵다-302p

고통을 인식하기가 두려워 두 눈을 꼭 감고 외면한다면,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스스로를 개선시키지는 못한다.
아빠, 뉴욕, 그리고 복잡한 현실의 밀크셰이크.

이 지긋지긋하고 상처만 주는 일들로 가득한 새크라맨토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뉴욕에 있는 대학교로 가는 것. 하지만 레이디 버드의 집안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엄마가 늘 돈돈 돈돈돈!! 하는 것도 이유가 있긴 했다. 하지만 레이디 버드는 그런 상황마저도 피하고 싶었기에. 더욱더 뉴욕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족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아빠가 실직으로 인한 우울증을 앓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레이디 버드는 조금씩 흔들리게 된다. 무엇보다 의지했던 아빠이기에. 레이디 버드는 아빠의 그런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것만 같아 씁쓸하기만 했다.


남자 친구, 그리고 제나와의 일로 소원해졌던 줄리와도 화해를 하지만. 어째서인지 뉴욕에 대한 갈망만큼은 버릴 수가 없었다. 그 곳에서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없어.)


그리고 기적처럼,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퍼슨은 뉴욕의 대학교 입학허가서를 손에 쥐게 되었다.


엄마는 그런 딸이 미워서 딸을 배웅하는 공항에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얼굴 한 가득 심통이 난 엄마의 표정을 보았다면 레이디 버드 자신도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만 같아, 그런 엄마를 마지막에 못 본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디 버드가 놓친 엄마의 모습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았다. 결국은 마음을 돌린 엄마가 공항에 찾아왔고, 딸의 온기마저도 뉴욕으로 떠나 버려 아빠의 품에 안겨 엉엉 우는 모습이었다. 레이디 버드는 영영 알지 못하게 될 엄마의 그 모습.


이게 내 최선의 모습이 면요?

그림출처

이는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스스로 인정할 때만, 오로지 그럴 경우에만 우리의 정신상태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 즉 우리는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263p

우리가 약점을 파악하다 보면 가장 인정하기 싫은 것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 바로 ‘모든 게 다 내 책임’이라는 내용의 인정이다. 죄책감은 어지간하면 견디기 힘든 감정이다. 하지만 이때 어차피 내가 다 저지른 것이라고 인정하면 엄청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그냥 이렇게 말하면 된다. “그래,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더”그래, 그때는 내가 잘못을 저질렀어”,”그래,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하면 돼”내 행동에 책임을 질 때만, 그동안 희생됐던 공정함을 다시 복구시킬 수 있다. 잘못과 실수를 인정할 때만, 당사자에게 사과할 수 있다. -317p
현실, 그리고 화해

뉴욕에 오면 모든 것이 다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기대에 가까웠다. 어쩌면 스스로 도피처라고 생각했거나 주문을 외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뉴욕은 눈이 부시지도 않았고, 하루하루가 기대했던 것 마냥 스펙터클 하지도 않았다. 이상이라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을 땐 이젠 더 이상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음을. 레이디 버드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불이 꺼지고 나서야 조금은 더 현실을 뚜렷하게 보게 된 것만 같았다. 무엇을 위해서 나는 그렇게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이 그 모든 것들과 싸웠을까. 무엇을 위해서 그래야만 했을까. 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싸움의 끝에서 레이디 버드는 알 수 없는 고독을 느꼈다.


엄마는 난생처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딸에게 밤을 새우고 애꿎은 종이를 찢어가며 편지를 썼지만. 결국 보내지 못했다. 그리고 다정한 아빠는 그런 엄마를 보는 것이 안타까워, 딸의 짐에 몰래 엄마의 편지를 실어 보냈다. 엄마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엄마의 온기가 담긴 편지를 읽고. 레이디 버드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이것도, 그것도, 그리고 저 아픈 모습도. 다 크리스틴이었다.

그림출처

우리가 스스로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은 개인의 자유는 물론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행동하고 살아가는 법을 좀 더 배우고 싶다면, 일단 우리 자신이 상처 받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이 잘못과 실수를 저지르고 약점을 지니고 있으며 비판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440p

멋지냐, 완벽하냐, 힘이 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발견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림자 아이와 햇빛 아이가 사랑으로 가득 차고 안전한 고향을 많이 발견할수록 그만큼 내면은 편안해지며, 그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심과 호의를 가득 베풀고 마음을 열 수 있다. 왜냐하면 고향은 당신이 '스스로'행동하고 살아가야 할 장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향은 친밀함, 보호, 안전을 의미한다. 고향은 내가 속해야 할 장소를 의미한다. 내가 스스로 내면에 정착하면, 나는 고향에 속하게 된다. 다른 사람은 물론 나와도 접촉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삶을 좌우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441p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풀꽃 [나태주]
나, "크리스틴" 맥퍼슨

레이디 버드는 꿈꾸기만 했던 뉴욕 생활의 중간에. 문득 새크라맨토가 생각났다.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던 그 새크라맨토가. 그것도 문득. 뉴욕으로 오기 전 아빠, 엄마와 함께 고물차를 타고 새크라맨토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던 그때, 사실은 자신이 그곳을 너무나도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신은 그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새크라맨토, 아빠, 엄마. 친구들. 부끄러운 기억들. 그 모든 것들을 합쳐야. 자신이 외면하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은 그런 모든 모습들을 합쳤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크리스틴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레이디 버드는 이제서야 인정할 수 있었다.

자신이 크리스틴 이어도 괜찮다고.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크리스틴 이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이루었던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 정확하게 말해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가장 화려한 도시인 뉴욕에서 가장 촌스럽고 구리다고 생각했던 이름인 크리스틴으로 불리길 바라며. 이제야 그녀는 진정한 크리스틴이 되어 망설임에 늘 누르지 못했던 다이얼을 돌렸다. 그리고 엄마에게 말했다.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은 참 괜찮은 것 같다고.


추신.

그림자 아이에게 잠식당한 너도, 부디 화해할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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