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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킥더드림 Oct 04. 2022

달빛 내리는 남산에서 14

14
 태호는 선미를 직접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욕해달라고 했던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만나 보는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우에게 전화해서 선미의 연락처를 물었다. 
 “헤어지고 나서 선미 전화번호 삭제했어. 번호 몰라.”
 삭제했다는 말에 태호는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선미 번호를 왜 알고 싶은 거야?” 
 “상상만으로 시나리오 쓰는데 한계가 있어서 왜 욕 해달라고 했는지 물어보려고.”
 시우는 태호의 말이 황당하게 들렸다. “형도 참.. 그런 걸 어떻게 물어봐? 물어본다고 해도 설마 선미가 대답하겠어?”
 “당연히 대놓고 직접적으로 물어 볼 수는 없지. 파혼할 때 쌓였던 감정 같은 게 있을 수 있잖아. 묵혀두었던 응어리진 그런 감정 말이야. 인터뷰를 통해서 당시에 풀지 못했던 감정을 해소하고 싶어할지도 모를 일이야.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욕에 대해서 접근할 수 있고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시우는 태호를 이해할 수 없었고 왠지 잔인해 보였다. 창작을 하는 예술가들이 지닌 특유의 탐욕적인 기질 아닌가 싶다.

태호와 통화를 마치고 과거에 선미와 주고받은 이메일은 삭제하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한 달을 고민한 끝에 선미의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다. 태호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이메일을 썼다. 


제목: 영화감독 윤태호입니다.
선미씨, 안녕하세요? 윤태호입니다.
오랜만이네요. 설마 저를 잊지는 않았겠죠? 
선미씨를 못 본지 오래 돼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시우와 함께 가끔 술도 마시고는 했었잖아요.
특별한 거 없이 술 먹으면서 떠드는 것만으로도 너무 즐거웠던 시절이었죠.
그때 선미씨의 아름다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특히 신비함이 가득한 옅은 갈색 눈동자와 부드러운 중저음에서 나오는 단정적인 말투는 누구든 빠져들게 하는 선미씨만의 특별한 매력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유려하고 재치 있는 말솜씨는 그 매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 매력적인 모습은 어디 가지 않았겠죠?
옛날 생각이 많이 나고, 선미씨 얼굴도 한번 보고 싶네요.
갑작스럽게 메일을 받아서 많이 놀랐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선미씨에게 메일을 보내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인터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결혼 직전의 연인이 헤어지는 내용의 영화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헤어진 여자의 시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과 심정에 대해서 선미씨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인터뷰에 응해주기를 부탁 드립니다. 혹시 무례한 요구이거나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면 죄송합니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싶은 한 영화감독의 이기심을 너그러이 이해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선미씨!!! 답변 기다리고 있을게요. 


태호는 몇 번을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처음에는 꽤 길게 썼으나 간략하게 쓰는 것이 낫겠다 싶어 내용을 대폭 줄였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메일을 발송했다. 메일을 보내고 태호는 초조한 마음으로 한 시간 간격으로 메일함의 수신확인을 들여다 봤다. 만 하루가 지나서야 수신확인이 읽은 것으로 전환됐다. 선미가 메일을 읽고 나서는 더 초조해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답장이 없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다. 답장을 하지 않으려나 보다. 그럴 수 있다. 열흘이 지나고 기대를 접으려고 할 때 선미의 답장이 도착했다.


제목: Re: 영화감독 윤태호입니다
감독님,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시우도 잘 지내고 있죠? 
저는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감독님이 얘기한 것처럼 예전에 종종 봤었는데 말이죠. 
그때 함께 했던 술자리가 항상 즐거웠던 것으로 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특히 감독님은 재미있는데다가 아는 것도 많아서 배울 점이 많았어요.
영화감독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어딘가 남들과 많이 다르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그 당시 감독님을 보면서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 저번에 연출하신 작품 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평상시에 감독님이 했던 얘기가 작품 중간중간에 담겨있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그나저나 인터뷰 요청하신 건 죄송하지만 응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 곧 결혼해요.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전에 사귀었던 남자친구의 지인을 만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남자친구 덕분에 평생 안 볼 것 같던 엄마와도 화해했고요. 요즘 좋은 일이 많아요. 
이렇게까지 좋아도 되나 싶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그래서 결혼 직전까지 갔던 전 남자친구와 어떠한 방식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인터뷰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저도 감독님 얼굴 한 번 뵙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아쉽네요.
감독님, 다음 영화 기대하고 있을게요. 
잘 지내세요!


인터뷰를 거절했다. 선미의 답장은 태호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다. 결혼을 앞두고 있고 지금처럼 좋았던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우와 파혼할 때와 지금과 무엇이 다른지 생생한 얘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은가? 지금 남자친구에게도 섹스를 할 때 욕해달라고 했을까? 했다면 남자친구는 어떤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맞춰줬을까? 어쩌면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파혼했던 경험 탓에 자신의 취향을 숨겼을 수도 있다. 그토록 미워하던 어머니와 화해했다니. 그것도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 덕분이란다. 도대체 남자친구가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평생 안 보겠다고 마음 먹은 어머니와 화해했을까? 그는 어떤 사람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한꺼번에 분출하고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반드시 만나서 인터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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