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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킥더드림 Oct 04. 2022

달빛 내리는 남산에서 13

13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쌀쌀함은 전혀 느낄 수 없고, 뜰 안은 훈훈한 공기로 가득 차있다. 야외에서 식사하기에 안성맞춤인 날이다. 하몽 파니니, 로제 파스타, 알리올리오 파스타, 연어 샐러드, 레드 와인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간 정호는 등심 스테이크를 들고 나왔다. 홍지와 시우는 음식을 맛보기 시작한다. 
 “음식 솜씨가 정말 좋으세요. 이 많은 걸 혼자 준비하신 거에요?” 와인 첫 잔을 비우고 시우가 물었다.
 “아니요. 두 분 오시기 전까지 아내랑 같이 준비했어요. 급하게 준비 하느라 맛이 어떨지 모르겠어요.” 
 “너무 맛있어요. SNS에서 보니까 평소에도 이렇게 잘 차려서 드시는 것 같던데요.” 홍지가 말했다.
 “아니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나가서 사먹거나 배달시켜 먹을 때도 많아요.”
 “남편이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데 워낙 바빠서 말이에요. 그래도 시간이 있을 때면 언제나 아이들과 저를 위해서 요리를 해준답니다. 호호” 미소가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다소곳하게 웃는다.
 머리칼이 약하게 나부낄 정도의 선선한 바람이 분다. 술과 음식으로 데워진 몸을 식혀주는 기분 좋은 바람이다. 모두들 한층 들떠서 희희낙락 먹고, 마시고, 떠들고, 웃는다.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과 형식적인 매너는 어느새 찾아 볼 수 없고, 마치 이 모임이 처음이 아닌 듯한 자연스러운 공기가 그들 사이에 흐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고 상쾌한 바람이 이따금씩 계속해서 분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계속 부는 바람에 미소는 추위를 느끼고 어느 순간부터는 팔짱을 끼고 있다. 그러다가 겉옷을 걸쳐야겠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추위를 타는 미소를 보며 겉옷을 걸칠 정도는 전혀 아닌데, 홍지 말대로 몸이 많이 약한가 보다고 시우는 생각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용히 식사를 한다. 식사 예절 교육을 잘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너무 얌전하다. 어린 아이들 특유의 활기차고 천진난만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의사시라고 들었는데 진료과목이 뭐에요?” 홍지가 물었다.
 “원래 저는 산부인과 전문의에요. 요즘은 아이를 많이 안 낳기 때문에 산부인과를 운영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일부 잘 되는 곳으로만 몰리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피부과를 하고 있습니다.”
 홍지가 반가운 듯 말한다. “그러시구나. 언제 피부 관리 받으러 가야겠어요.”
 “그럼요. 언제든지 오세요. 그런데 피부가 워낙 좋아서 딱히 시술이나 관리가 필요 없어 보이는데요.”
 미소가 돌아왔다. 반 팔에서 긴 팔로, 목에는 짧은 스카프를 둘렀고 그 위에 얇은 패딩 조끼를 입었다. 정호는 말없이 미소를 물끄러미 본다. 가벼운 카디건 정도 걸치고 오겠지 하고 예상했던 시우는 미소의 차림새를 보고 놀랐다. 너무 덥게 입었기 때문이다. 기온이 이십오도 이상인데 패딩이라니, 이 날씨와 전혀 맞지 않은 차림이다.  
 홍지는 이런 미소의 모습이 익숙하다. "팀장님 또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괜찮아. 조금 쌀쌀한 것 같아서 말이야. 나는 감기 걸리면 안 되거든 예방 차원에서 따뜻하게 입었어."
 "그렇죠. 팀장님은 감기 한번 걸리면 오랫동안 고생하시잖아요."


차린 음식을 다 먹었다. 정호는 빈 그릇을 치우고 과일, 크래커, 치즈 같은 안주거리를 내왔다. 식사를 마치고 두 아이는 뜰을 뛰어다니며 장난치고 논다. 이제야 아이들다워 보인다. 미소는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아이들은 눈치를 봐가며 계속 뛰어 다닌다. 네 사람은 와인을 마시며 이런저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미소는 무엇이 그렇게 궁금한 것이 많은지 시우에게 쉬지 않고 질문한다. 홍지가 어디가 좋은지, 첫 눈에 마음에 들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 사는지, 결혼은 언제쯤 할 건지, 결혼하면 어디 살 것인지. 시우가 한참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마치 스프링이 튀어 오르는 것처럼 미소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돌발적인 행동에 일제히 미소를 쳐다본다.
 “나 몸에 열이 있는 것 같아. 해열제 먹고 와야겠어.” 미소가 시우를 본다. “죄송해요. 손님 초대해 놓고 제가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네요.”
 시우가 손사래를 친다. “아니에요. 저희는 너무 즐거우니까 그런 걱정 마세요.”
 홍지가 걱정스러운 듯 말한다. “또 열나요? 아이고, 팀장님 얼굴이 빨개졌어요.”
 마치 붉은색 볼 터치를 진하게 한 것처럼 양 볼이 빨갛다. 미소는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미소가 자꾸 몸이 안 좋은 내색을 하면서 첫 만남을 무색하게 하던 자연스러운 공기는 사라졌다.
 시우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혹시 더운 걸 열이 난다고 착각하시는 거 아닐까요? 오늘 같은 날씨에 저렇게 덥게 입고 있으면 열을 몸에 가두는 효과가 생길 것 같은데요. 지금 열이 빠져나갈 곳은 얼굴밖에 없기 때문에 혈관이 확장돼서 안면이 빨개졌을 거에요. 저희 어머니도 더운 걸 몸에서 열이 난다고 착각을 하시거든요. 체온을 재보면 정상인데 자꾸 열이 난다고 느끼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팀장님은 원래 몸이 약하셔."
 “남자 친구분 말이 맞습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지만 아내는 건강염려증이 있어요.”
 “건강염려증이요? 진짜 자주 아프셨는데." 홍지는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정호를 쳐다본다.
 “자꾸 아프다고 하는데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면 아무런 이상이 없어요. 물론 가끔 진짜로 아픈 적도 있기는 하지만요. 제가 실제로 아픈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고 해도 제 말은 절대 안 들어요. 제가 의사인데도 말이죠.” 정호는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저뿐만 아니라 이상이 없다고 하는 의사를 신뢰하지 않아요. 실제로 아파서 병이 있다고 진단을 받으면 오히려 심적으로 편안해 하더라고요.”
 시우가 작게 탄성을 낸다. “아, 저희 어머니도 딱 그래요.”
 “저는 몇 년 동안 팀장님을 알아왔지만 전혀 그런 걸 못 느꼈어요.”  
 “지금 아마 해열제 먹고 침대에 누워있을 거에요. 이십 분 정도 있으면 내려올 겁니다. 홍지씨, 제가 이런 말 한 거 아내한테는 모른 척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안 아픈데도 아프다고 느끼니까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팀장님이 너무 불쌍해요.”
 “불쌍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마 스트레스 받으셔서 그러실 거야. 팀장이라는 자리가 일도 많고 책임도 크잖아.”
 “아니야. 팀장을 맡고 나서는 예전처럼 일이 많지가 않아. 업무 스트레스도 훨씬 줄어들었어.”
 시우가 헛기침을 한다. “캑캑. 무슨 소리하는 거야? 겉으로 표현을 안 하셔서 그렇지 많이 힘드실 거야.” 
 시우의 말에 홍지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정말 이십 분 정도 지나자 미소가 다시 나왔다. 발갛게 올라온 얼굴은 가라앉았고 스카프와 패딩은 벗은 상태였다.
 홍지와 시우가 동시에 묻는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네. 약 먹고 누워서 쉬니까 많이 좋아졌어요. 죄송합니다. 한창 분위기가 좋았는데 제가 그만..”
 “아닙니다. 너무 즐거웠어요. 저녁도 정말 맛있게 잘 먹었고요. 그럼 저희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시우가 말했다.
 정호는 일찍 끝내는 것 같아 아쉽다는 말과 함께 다음에 다시 초대하겠다고 했다. 미소는 흐뭇한 표정으로 배웅을 하고 아이들은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시우는 다정한 눈빛으로 아이들에게 잘 있으라고 한다.
 인사를 나누는데 또 다시 홍지는 미소의 얼굴이 올빼미로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놀라지도 소름이 돋지도 않았다. 그냥 무덤덤했다.


홍지의 집으로 가는 중이다.
 “아무래도 이상해” 홍지가 물었다.
 “뭐가?”
 “팀장님이 평소에 말했건 거와도 그렇고 SNS에서 보여지는 것과도 많이 다른 것 같아서.”
 “사람들 심리가 좋은 면만 보여주려고 하잖아.”
 “집도 사진으로 봤을 때 훨씬 좋아 보였어. 나는 당연히 몸이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말이지. 아이들은 어딘가 경직되어 보이고.”
 “그건 그렇더라. 아이들은 엄마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더라고. 예민한 엄마 밑에서 자라다 보니 그렇지 않을까 싶어.”
 “그 동안 팀장님한테 속은 느낌이야.”
 홍지의 말에 시우가 웃는다. “일부러 속인 건 아니고 좀 더 멋져 보이려고 한 것 같아. 그런 사람들 많아. 홍지가 착해서 그런 이면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 것뿐이지. 다소 부풀려진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실제로도 멋지게 사는 것처럼 보였어. 그리고 팀장님도, 남편 분도 다 좋은 사람인 것 같고.”
 “맞아, 그건 인정이야. 팀장님 결혼 완전 잘 한 듯 보여.”


집 앞에 도착했다. 
 “오늘은 유난히 헤어지기가 아쉽다. 차에서 좀 얘기하다가 들어갈래?” 시우가 물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 가서 얘기할까?"
 시우는 매번 집 앞에서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을 표현했지만 홍지가 집에 가자고 한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홍지와 시우는 그렇게 첫 섹스를 했다. 그 동안 여자 친구와의 만남 중 이번이 첫 번째 섹스를 하기까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헤아릴 수 없는 기쁨과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얽힌 소용돌이 속에서 두 사람은 동이 틀 때까지 잠 못 이루었다. 둘은 밤새도록 몸은 침대에, 뇌는 천장에 붙어있는 기분이었다.
 홍지의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새벽까지 많은 양의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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