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킥더드림 Oct 05. 2022

달빛 내리는 남산에서 15

15
 아무리 고민을 해도 태호는 선미의 마음을 단번에 바꿀 마법 같은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것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다시 한 번 무작정 요청해보는 수밖에 없다. 


제목: Re: Re: 영화감독 윤태호입니다
선미씨,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있다고 하니 그 보다 반가운 소식이 없네요.
답장이 오지 않을까 봐 노심초사 기다리는 와중 메일함에서 선미씨의 메일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선미씨, 인터뷰 거절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무례한 부탁을 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예전 남자친구의 지인이 인터뷰를 하자고 하니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러웠을지도 상상이 갑니다.
그래서 인터뷰를 거절할 가능성이 크다고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너무 큽니다.
제가 연출한 영화를 선미씨가 봤다니, 그것도 재미있게 봤다니, 너무 기쁜 소식이네요.
어쩌면 인터뷰 수락보다 더 기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선미씨가 제가 예전에 했던 얘기를 영화 속에서 읽어냈다니 그저 놀랍고 신기할 따름입니다.
어떤 장면에서 그런 걸 느꼈는지 너무 궁금하네요.
제 영화를 봤고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는 것만으로도 저한테는 큰 감동입니다.
자꾸 옛날 생각을 하다 보니 일본에서 우연히 선미씨를 만났던 것이 생각나네요. 
저한테 그날은 정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결혼 축하해요!
예비 남편은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다. 선미씨의 마음을 훔친 사람이라면 분명 멋지고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겠지요.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선미씨, 매우 조심스럽게 다시 한번 인터뷰 요청합니다. 
분명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 예의가 아닌 줄 앎에도 불구하고 안면몰수하고 부탁 드리겠습니다. 
다음 작품의 미학적 성취를 위해서 선미씨와의 인터뷰가 절실합니다.
어쩌면 오랜만에 선미씨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메일을 발송했다. 이번 메일은 수정하지 않고 처음 쓴 그대로 보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선미가 읽은 것으로 확인됐다. 빨리 확인했다는 사실이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희망을 갖게 한다. 이렇게 빨리 확인한 걸 보면 인터뷰를 다시 요청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인터뷰에 응할 마음이 있더라도 답을 바로 주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일주일 이상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다음날 바로 선미로부터 답장이 왔다. 
 ‘뭐지? 왜 이렇게 빨리 보냈지?’
 답이 너무 빨리 오자 기대가 컸던 마음에 불안이 비집고 들어온다. 마우스로 제목을 클릭했고 긴장 가득한 마음으로 메일을 읽어 내려간다. 


제목: Re: Re: Re: 영화감독 윤태호입니다
감독님,
결혼 축하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일본에서의 우연한 하루는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잖아요. 
한국으로 돌아가는 순간 기억에서 다 지우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런데 그날 일까지 꺼내다니 너무하세요.
우연히 만나서 스물네 시간을 꼬박 함께 보냈죠. 외국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신기해요.
그날은 마침 루미나리에 축제 기간이었어요. 
늦은 밤 길게 늘어선 환상적인 조명 건축물 아래로 수많은 인파에 섞여 함께 걸었던 게 생각나요.
취기에 우리는 조금 알딸딸한 정신으로 걸었죠. 그때 저는 공중에 붕 떠다니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날을 생각하니 쏟아지는 그 화려한 조명 빛이 지금 제 살갗에 와 닿는 것만 같아요.
잊지 못할 우연한 하루였어요. 
솔직한 마음을 말하자면 감독님 한 번 보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죠.
감독님, 분명히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 다시 인터뷰를 요청하다니 실망이 큽니다.
시우가 제 메일 주소를 알려줬을 텐데.. 화가 많이 납니다.
도대체 걔는 제정신인지 모르겠어요. 예전 여자친구 정보를 남한테 넘겨주다니 말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개념 없는 건 변하지 않았나 봐요.
저는 지금 남자친구를 만나고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았습니다.
괜한 일로 지금의 평온한 일상을 깨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단호히 말하지만 인터뷰에 응할 수 없습니다.
그러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만, 다시 저한테 메일을 보낸다 해도 답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서로 아는 척하지 않고 눈 인사만 하고 지나가기로 해요.
시우가 무슨 생각으로 저의 메일 주소를 알려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시우에게 제 소식을 알리는 건 상관 없습니다.
그럼 감독님, 잘 지내세요!


혹시나 했으나, 이번에도 거절이다.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쉽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요청해 보자는 생각으로 선미의 메일을 다시 읽어 보았다. 다시 읽은 후 보내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두 번째 읽으면서 선미의 거절 의사가 얼마나 단호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단호함에는 바늘구멍만한 틈도 없어 보였다. 사실 선미는 인터뷰에 응할 이유가 전혀 없다. 지나친 부탁을 한 것에 대한 사과 메일을 쓸까도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글을 마치면서 선미는 자신의 소식을 시우에게 알려도 상관 없다고 했다. 너무 뜬금 없는 말이다. 아무래도 자신의 소식을 시우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전 14화 달빛 내리는 남산에서 14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