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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킥더드림 Oct 05. 2022

달빛 내리는 남산에서 16

16
 시우와 태호는 오랜만에 만났다. 언제나 그렇듯 점심을 먹고 양재천 산책길을 걷는다.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있는 하늘은 아주 작은 파란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구름이 무거워 보이나 그렇다고 비가 올 것 같은 모습은 아니다. 오늘 비 예보도 없었다. 해가 없어서 오히려 걷기 더 좋은 그런 날이다. 말 없이 걷다가 시우가 먼저 입을 뗀다.
 “메일 주소 알려준 지가 꽤 지났는데 선미한테 메일 보냈어?” 
 선미는 자신의 소식을 시우에게 전해달라는 뉘앙스를 풍겼지만 태호는 선미와 주고 받은 메일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할지 말지 많이 망설이다가 시우가 물어보기 전까지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선미가 시우에게 가하는 일종의 복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응. 보냈어.” 
 “그랬구나. 나 같으면 못 보냈을 것 같은데.”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어서 그래. 시나리오도 써야 하고 말이지.”
 “언젠가 선미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 영화를 보다 보면 영화감독은 탐욕적이고 잔인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고 말이야. 그러면서 형도 그런 면이 있냐고 묻더라. 그래서 태호 형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 보면 그런 사람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
 “하하.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잖아. 그런데 선미씨가 그런 말을 했어?”
 태호는 내심 놀랬다. 언젠가 선미에게 그런 비슷한 말을 한적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예술적 성취를 위해서 감독이 배우를 정서적으로 극한 상황으로 몰아붙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했어.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했는데 이제는 이해가 가. 형이 선미한테 메일을 보낸 거와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어.”
 태호가 가벼운 한숨을 내뱉는다. “연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기는 해.”
 “선미가 인터뷰한다고 했어?”
 “아니. 거절했어. 내가 메일을 두 번이나 보냈는데 끝내 거절하더라고. 아쉽게도 너한테 욕을 해달라고 한 이유는 알 수 없게 됐어.”
 “왠지 그럴 것 같았어.” 시우가 머뭇거리다가 묻는다. “선미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네. 그런 얘기는 없었어? 다짜고짜 인터뷰 요청만 한 건 아닐 거잖아.”
 “결혼한대.” 
 결혼한다는 말에 시우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진짜? 에이 형, 장난치지는 거 아니지?”
 “당연히 진짜지. 내가 왜 이런 걸로 장난을 치겠어.”
 시우는 머릿속이 하얘졌고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잠시 아무 말없이 걷는다.
 “그렇구나. 누구랑 결혼한다는 말은 없었어?” 시우가 물었다.
 “당연히 없었지. 누구라고 얘기해 봐야 내가 알지도 못하는데 말이야. 그런데 결혼할 남자가 좋은 사람인 것 같기는 해.”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
 “그 사람 덕분에 어머니와 화해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좋은 사람 같다고 생각을..”
 시우는 태호의 말을 잘랐다. “어머니랑 화해했다고?”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해서 엄청 미워했는데. 나한테 평생 볼 일 없다고 말했었는데.”
 “예전에 어머니랑 연락 안 한다는 걸 너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선미씨의 말을 들으니까 어떻게 화해를 했고 거기서 남자친구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궁금하더라고. 그런데 선미씨를 만날 수가 있어야 말이지.” 
 시우는 작은 소리로 혼잣말 하듯 말한다. “어머니랑 화해했구나. 그렇구나.”
 시우는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 한 괴이한 감정에 휩싸였다. 가슴은 뻥 뚫려 그 사이로 뱀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 같고, 머리는 반으로 쪼개져 까마귀 떼에게 뇌를 파먹히고 있는 느낌이다. 
 “혹시 선미씨랑 만나는 동안 자주 싸우는 편이었어?” 태호가 물었다.
 “별로 안 싸웠어. 크게 싸웠던 적은 아예 없었던 것 같고 기억조차 안 날 정도의 사소한 다툼만 있었어.”
 “성격이 잘 맞아서 그런 건가?” 
 시우가 잠시 고민한다. “음.. 내가 선미한테 다 맞춰주어서 그랬던 것 같아. 선미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싸울 일이 생기면 네가 회피했던 건 아니야?”
 “음.. 나는 나름 맞추고 배려한 건데 그걸 회피했다고 볼 수도 있겠네. 싸우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도 같아.”
 “갈등이 풀리지 않아서 선미씨는 오히려 답답했을 수도 있었겠다. 홍지는 그렇게 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답답해 하지 않을 것 같지만 말이야.”
 헤어지기 전까지 시우와 선미의 관계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어쩌면 선미는 그 안정감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고 태호는 생각했다. 위태위태한 관계에서 오는 긴장감이 선미에게 필요했을 수도 있다. 반복해서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의 애정을 확인해야만 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시우와의 관계는 선미에게 너무 밋밋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터뷰를 못해서 욕해달라고 한 것을 영화 소재로 쓸 수 있겠어?”
 “아쉽지만 상상에 의존할 수 밖에 없지. 지금 이야기의 큰 틀을 잡아가고 있는 중이야.”
 “시나리오 쓰기 시작한 거야? 어떤 내용인지 대강 들려줄 수 있어?”
 자신의 이야기가 소재로 담겨서 그런지 시우는 그 어느 때보다 궁금했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한 상태야. A와 B라는 사람이 있는데 둘은 친구 사이야. A는 결혼을 했고 B한테는 C라는 결혼 예정인 여자친구가 있어. B와 C는 큰 기업에 다니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A는 정보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A의 와이프를 포함해 네 사람은 종종 보는 사이이고. 그러던 어느 날 A가 어떤 물건을 유럽에서 우리나라로 몰래 들여오는 임무를 맡게 됐어. 어떻게 임무를 수행할지 고민하던 중 B를 통해서 C가 유럽으로 출장을 가게 된다는 사실을 A가 알게 돼. 그래서 C의 짐에다 그 물건을 넣어서 한국으로 가지고 오기로 작전을 수립해. C가 출장을 가서 일하지 않는 날 A가 우연을 가장하여 C를 만나. 그리고 A와 C는 하루 동안 시간을 같이 보내고 C의 짐에 물건을 넣어서 가지고 오는데 성공해. 둘이 만난 날 꼬박 스물 네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는데, 그때 둘 간에 묘한 기류가 형성이 되는 거야. 금기에 다가가는 그 짜릿함, 선을 넘을 듯 말 듯한 그 아슬아슬함. 그렇게 외줄을 타는 듯한 하루를 보내고 나서 C는 A를 사랑하게 돼버렸어. 한국으로 돌아온 C는 오랫동안 고민을 하다가 B와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어. 어느 날 섹스를 하는데 C가 B에게 손바닥으로 자신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욕해달라고 요구를 하는 거야. 그 동안 한 번도 없었던 갑작스러운 C의 요구에 B는 너무 당황스러운 거지. 이 정도까지 스토리를 생각했어.”
 시우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재미있는데. 그런데 A도 C를 사랑하게 되는 거야?”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 어떻게 설정할지 고민 중이야.”
 “유럽 어느 도시에서 만나는 거야?”
 “그것도 아직 몰라. 그 도시에 축제가 있는 날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어.”
 “헤어지기 위해서 굳이 욕해달라고 할 이유가 있을까?”
 “꼭 그것이 헤어지는 발단이 된다기 보..” 태호가 말하다 말고 고개를 흔든다. “모르겠어. 앞으로 여러 가지 고민을 많이 해야 해. 대략적인 틀만 잡아놓은 상태라. 심리 서스펜스로 구상하고 있어서 내용을 많이 보완해야 돼. B나 C, 둘 중 한 명이 살해당하는 설정을 넣을까도 생각 중이야. 이 정도까지고 더 진척되면 그때 또 얘기해 줄게. 그나저나 홍지는 잘 만나고 있지?”
 “그럼 잘 만나고 있어. 형 덕분이야”
 “그래 다행이네. 아무리 생각해도 둘이 바로 사귀게 됐다는 게 너무 신기해. 얼마 안 있으면 네 생일인데 뭐할 거야?”
 “그냥 홍지랑 저녁 같이 먹고 남산이나 갈까 해.”
 “남산에?”
 “응. 생일에 남산 가는 걸 좋아해. 생일날 맛있는 거 먹고 남산 가서 야경 보면 좋더라고.”
 “그럼 생일에 선미씨랑도 남산에 갔던 적 있겠네?”
 “응, 선미랑도 갔었지.” 시우가 시간을 확인한다. “나 이제 사무실에 들어가봐야겠다.”


시우는 서둘러서 자리를 떴고 태호는 잰걸음으로 멀어지는 시우의 뒷모습을 본다. 걸어가는 방향 앞으로 한 줄기 빛이 떨어진다. 시우와 태호는 빛줄기를 따라 무심코 고개를 든다. 그 빛줄기의 끝, 무겁게 뒤덮은 회색 구름 속 작은 틈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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