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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킥더드림 Oct 06. 2022

달빛 내리는 남산에서 17

17
 어느덧 이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태호는 세 번째 영화를 완성했다. 이 영화는 유럽의 한 영화제에서 큰 상을 수상했고 평단에서는 호평 일색이었다. 이에 힘입어 여러 나라에서 개봉하여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이로 인해 태호와 주연급 배우들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오늘은 시우 생일이고, 홍지와 시우는 두 달 후면 결혼한다.
 저녁을 함께 먹고 처음 만났던 카페에 왔다. 우연히도 처음 만났을 때 바로 그 자리에 앉았다. 오늘도 카페 안은 한껏 멋을 부린 사람들로 가득하다. 테이블 밑에 홍지한테 받은 생일선물이 반듯하게 놓여있다. 홍지가 집에 가서 열어보라고 해서 선물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눈꺼풀이 반쯤 풀린 퀭한 눈으로 시우는 혼자서 밖을 보고 있다. 주말마다 결혼 준비하느라 제대로 쉬지를 못하고 있다. 예전에도 이렇게 힘들었나 싶다. 창 밖 너머 멀리 남산이 보이고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남산 꼭대기에 우뚝 서있는 타워를 보고 있다.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어서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주위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무의미한 웅성거림을 들으며 혼자 먼 산을 보는 이 짧은 시간이 매우 평온하다. 
 “오빠, 어떡하면 좋아. 이게 진짜 무슨 일이래.” 화장실에 다녀오는 홍지는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마냥 부산스럽게 자리에 앉는다. “태호 선배 있잖아.”
 “스캔들 난 거 말하는 거야?” 시우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무심히 말했다.
 “알고 있었어? 태호 선배 영화 주인공 강혜지랑 스캔들 났네.” 
 “기사 지금 본 거야? 어제 저녁에 포털에 떴었어.” 
 “그랬구나. 나는 왜 못 봤지. 태호 선배도 그렇고 강혜지도 아직 입장을 내놓지 않은 것 같더라고. 사실일까?”
 “태호 형이랑 아침에 통화했는데 사실이 아니래. 영화가 잘 돼서 같이 다니는 일이 많다 보니까 그런 기사가 났나 보더라고.”
 시우는 태호에게 들은 대로 아니라고 홍지에게 말했다.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예전 같으면 아니라고 믿었을 텐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싶다. 
 “아! 통화했구나. 그러면 그렇지. 태호 선배가 그럴 사람이 아니지.” 
 
 홍지는 시우를 만나면서 과거에 태호를 좋아했었던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사귄 적도 없고, 고백한 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걸려 할 이유도 없다. 좋아했다는 사실은 홍미만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시우에게 말하고 털어내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 얼마 전에 홍미와 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마음에 걸리는 거야?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네.” 
 홍지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다. “왜 마음에 걸리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언니가 모르면 누가 알아? 아무 일도 아니잖아. 남자친구 사귀는 중에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말이야. 설사 사귀는 중에 마음이 흔들렸다 해도 아무 일도 없었다면 문제 될 게 없는 거야.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과거에 혼자 잠시 좋아했던 것뿐이잖아.”
 “그래도 말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럼 말해.”
 “이제 결혼이 두 달 앞인데 너무 늦게 말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처음에 얘기했었어야 했는데 말이지.”
 홍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번에는 또 뭐라는 거야? 정말 사이코 같기도 하다가, 바보 같기도 하다가 왔다 갔다 한다니까. 인간이 불가해한 존재이긴 하지만, 언니는 특히 더 그런 것 같아.” 흥분한 홍미가 심호흡을 한 후 차분한 톤으로 말한다. “언니, 말하고 싶으면 말해. 전혀 늦지 않았으니까. 언니 남자친구가 그런 거 하나 이해 못해줄 사람은 아니라고 봐. 아니, 이해 받고 말고 할 일도 아니야.”
 홍지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냥 솔직해 지고 싶은 건가 봐. 이제 결혼이 두 달 밖에 안 남았잖아. 다른 이유는 없는 것 같아.”
 
 태호의 스캔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금이 왠지 말하기 좋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든다. 망설임 없이 홍지는 입을 열었다.
 “나, 할 말이 있는데 학교 다닐 때 태호 선배 좋아했었어.”
 홍지의 너무 뜬금없는 말에 시우는 즉각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홍지를 멀뚱히 쳐다보다 건조하게 말한다. "태호 형을 좋아했다고?" 
 속으로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나 혼자 잠시 좋아한 거야. 태호 선배는 내가 좋아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해."
 "그랬구나."
 태호도 대학 때 홍지를 좋아했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서로 좋아했다는 말인데, 서로 좋아하면서도 그 사실 몰랐다는 말이다. 혹시 태호는 홍지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설마 둘이 사귀었던 건 아니겠지. 사귀었는데 태호가 홍지 보다 경제적으로 나은 사람을 선택했던 걸까? 아니다. 사귀었다면 지금처럼 연락도 하고 얼굴도 보면서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짧은 순간에 시우의 머릿속은 맥락 없는 온갖 잡다한 상상이 스쳤다. 
 "놀랄 줄 알았는데 놀라지 않네. 왠지 결혼 전에 꼭 말해야 할 것만 같았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인데 왜 놀라겠어. 주위에 괜찮은 사람에게 호감을 가졌다가 마음 접는 경우는 아주 흔한 일이니까. 태호 형은 매력적인 사람이잖아. 누구라도 좋아했을 것 같아." 
 "태호 선배 스캔들 보니까, 그냥 혼자 좋아만 하다가 말아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스캔들은 사실이 아니라는데 뭘 그래."
 "사실이 아니어도 선배 부인은 신경 많이 쓰일 테니까."
 이때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웃는다.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 홍지는 눈, 코, 입이 한 곳에 모일 정도로 인상을 찡그린다.
 시끄러운 소리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홍지를 보며 시우가 말한다. "여기 너무 시끄러워졌다. 우리 밖으로 나가자. 남산에 가자."
 
 둘은 카페 The 16th Century를 나와 생일이면 매번 가는 남산으로 향한다. 케이블카 주차장에 도착해 차를 댔다. 생일선물은 눈에 띄지 않게 자동차 트렁크에 잘 넣어둔다. 태호가 홍지를 좋아했다고 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그 반대로 홍지가 태호를 좋아했다고 하니 은근히 신경 쓰인다. 차 타고 오는 동안 내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별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주입했다. 홍지와 시우는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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