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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킥더드림 Oct 06. 2022

달빛 내리는 남산에서 18

18
 남산에 도착했고 케이블카에서 내렸다. 안 쪽으로 조금 들어가니 연인들이 자물쇠를 채워두는 장소가 나온다. 그 곳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자물쇠가 걸려 있다. 홍지와 시우는 재작년에도 그리고 작년에도 이 곳에 왔었지만 자물쇠를 채우지 않았다. 둘 중 아무도 기념으로 우리도 자물쇠 채워 볼까, 하는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무심히 그 장소를 지나쳤을 뿐이었다.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봉수대를 지난다. 작은 공원처럼 꾸며진 정상에 다다랐다. 우뚝 솟아 있는 타워가 보이고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어두운 하늘에서는 밝은 달이 남산을 비추고 있고 군데군데 구름이 둥실 떠다니고 있다. 어떤 작은 구름은 비를 머금은 모습이다. 야경이 잘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갔다. 검은 바닥에 백열 전구를 촘촘히 수놓은 것 같은 서울의 모습이 보인다. 손가락으로 도시 곳곳을 가리키며 저기는 어디고, 또 저기는 어디고 하는 식의 의미 없는 이야기로 희희덕거린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이번에는 한강이 보이는 쪽으로 이동한다. 
 홍지가 한강 너머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우리가 처음 만났고 방금 전에도 있었던 카페 The 16th Century는 저기 같은데."
 홍지의 손을 잡고 손가락 방향을 슬그머니 오른쪽으로 밀면서 시우가 말한다. "아니야. 거기 보다 훨씬 오른쪽이지. 바로 저기라고.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아까 저 카페에서 예전에 태호 형 좋아했다고 했잖아."
 홍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그런 홍지의 마음을 혹시 태호 형이 알았던 건 아닐까?”
 “아까 태호 선배는 모른다고 말했잖아. 내가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겠어. 절대 알 수 없어. 나는 홍미한테만 말했어.” 홍지는 갑자기 전원이 꺼진 로봇처럼 순간 멈칫한다. “아, 맞다. 한 사람 더 있다. 또 다른 선배한테 말했었다는 걸 잊고 있었네. 그 선배랑 태호 선배랑 엄청 친했었거든. 혼자 좋아하다가 그 선배한테 가서 고민을 털어놨어.”
 시우는 태호가 말한 친구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혹시 자살했다는 그 분이야?”
 “맞아. 오빠도 아는구나. 만난 적도 있어?”
 “아니, 본 적은 없어. 태호 형한테 자살한 친구가 있다는 얘기만 들었어. 그럼 그 분이 무슨 조언을 해줬어?” 
 그 사람도 홍지를 좋아했다고 태호한테 들었다. 홍지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 친구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이다.
 “아니, 조언을 기대했지만 조언 같은 건 전혀 없었고, 태호 선배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그랬어.”
 “아.. 그랬구나. 그 얘기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겠다.”
 “마음이 아팠었나?” 홍지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자문했다. “그냥 기분이 좀 이상했던 것 같아. 그리고 몇 달 후에 태호 선배는 여자 친구가 생겼어.”
 “아, 나 그 사람 누군지 알아. 태호 형한테 여자친구 생겼을 때도 기분이 이상했겠는데?”
 “처음에는 그랬던 것 같은데 금방 괜찮아졌어. 이미 마음을 정리한 상태였으니까. 태호 선배는 그 여자친구랑은 일년 정도 만나다가 헤어지고 지금의 아내를 만났을 거야.”
 결론적으로 두 친구가 한 여자를 좋아했고 그 여자는 그 중 한 사람을 좋아했다. 하지만 세 사람 사이에는 아무 일이 없었다. 셋 다 그냥 그렇게 혼자 좋아만 하다가 끝났다. 그러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자살했다는 그 분은 어떤 사람이야?”
 “그 선배 좋은 사람이지. 그런데 어딘가 좀 우울해 보이는 면이 있었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삶의 가치를 크게 두는 사람이었어. 한 마디로 이상주의자였어.”
 “그분이 원하는 이상적인 삶이 뭐였는지 알아?”
 “내가 태호 선배 좋아한다고 말했던 그날이었나? 아닌가 다른 날이었나? 잘 모르겠네.” 홍지는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고 오른쪽 눈을 치켜 뜨며 기억을 더듬는다. “아무튼 그 선배가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사는 게 꿈이라고 그런 말을 나한테 한 적이 있었어.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일 년 정도 머물다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살고 싶데. 그래서 내가 그렇게 살면 돈은 어떻게 버냐고 물어보니까 현지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 할 수도 있고 본업은 작가를 하면서 돈을 벌고 싶다고 하더라고. 사랑하는 사람과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작가로 살고 싶다면서 자신의 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더라고.”
 “뭐라고 대답했어?”
 “비현실적이라고 말했어. 그런 삶을 함께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고, 돈을 잘 버는 전업 작가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해서 그 분 상처 받았겠다.”
 “왜 상처를 받아? 내가 생각하는 현실을 말했을 뿐인데.” 
 “낭만적이고 멋진 삶이다. 쉽지 않겠지만 도전해 볼만하다. 그런 삶을 꿈꾸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싶었을 텐데 딱 잘라서 비현실적이라고 하니까 많이 실망했을 것 같아.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먼저 유명 작가가 되고 나서 세계를 누비며 사는 건 가능해 보인다는 말 정도는 적어도 기대하지 않았을까?”
 홍지는 손바닥으로 자책하듯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아, 그런 거였구나. 그렇겠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물어 본 거였네. 그때도 내가 눈치가 없었던 거였어. 나는 왜 이런 걸까? 홍미가 나보고 사이코라고 하는데 진짜 그런가 봐.”
 “사이코라니 무슨 말이야. 홍미는 동생이니까 조금 짓궂게 말한 걸 테고. 그리고 개개인 마다 생각이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도 다른 거니까 뭐 그럴 수 있어. 눈치 없는 거 아니야. 내 말이 틀렸을 수도 있어. 현실을 말해주는 게 맞을지도 몰라.”
 그 선배라는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로부터 기대하는 답이 있었을 것이다. 홍지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대답에 상심이 컸을 게 분명하다. 
 “혹시 그 선배도 홍지 좋아했던 건 아닐까?”
 “그 선배가 나를?” 홍지는 눈을 크게 뜨고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냐는 눈빛을 보내며 말한다. “전혀 아니야.” 
 갑자기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더니 바닥에 "우두두두두두두"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진다. 깜짝 놀란 홍지와 시우는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머리를 가렸다. 놀란 주위 사람들은 우박을 피할 곳을 찾아 우왕좌왕한다. 홍지와 시우도 우박을 피하기 위하여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물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 건물에 도착하기 전,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우박은 그쳤다. 남산에 있는 사람들은 웅성웅성거리며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 본다. 그리 크지 않은 시커먼 먹구름 하나가 바로 위로 지나가고 있다. 
 "저 구름에서 내렸나 본데." 시우가 손가락으로 구름을 가리킨다.
 "이런 따뜻한 날에도 우박이 내리나 보네. 신기하다."
 바닥에는 손톱 크기의 얼음 알갱이들이 하얗게 뿌려져 있다. 홍지는 까치발을 들고 무심한 표정으로 시우 머리에 있는 얼음 알갱이를 털어낸다. 그 모습을 따라 시우도 웃으며 홍지 머리 위를 몇 차례 툭툭 치며 우박을 떨어뜨린다. 바닥에 깔린 얼음 알갱이는 따뜻한 날씨 탓에 고체 상태를 얼마 유지하지 못하고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녹는다. 우박으로 인해 벌어진 작은 소동의 흔적은 이제 젖은 바닥뿐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은 다시 아름다운 남산의 밤을 만끽하고 있다. 홍지와 시우는 벤치에 앉아 두 달 앞으로 다가 온 결혼 준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번거로운 결혼식은 건너 뛰고 바로 신혼여행을 갔으면 좋겠다는 두 사람의 바램이 일치했다. 대화를 하던 와중 어떤 두 사람에게 홍지의 시선이 고정됐다. 조금 전 홍지와 시우가 야경을 보던 바로 그 자리이다.
 "오빠, 저 사람들 봐봐. 부부 같은데. 너무 좋아 보인다."
 좀처럼 주변에 관심이 없는 홍지인데 왠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시우가 말한다. "부부인 줄 어떻게 아알.." 홍지가 가리키는 곳을 보고 말을 하다가 멈췄다.
 누가 보아도 부부인 남자와 여자가 그 곳에 서있다. 남녀 모두 평균을 훌쩍 넘는 키에 멋진 외모를 지녔으며 스타일도 매우 세련됐다. 여자는 임신한 상태이다. 당장 진통이 와서 바로 병원으로 실려간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여자의 배는 크게 불러있다. 출산에 대한 아무런 지식과 경험이 없는 사람이 봐도 만삭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들을 보자마자 시우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고압의 전류가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 머리카락이 전부 타버린 기분이다. 이런 기분이 드는 까닭은 그 여자가 바로 선미이기 때문이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선미와 남자를 본다. 두 사람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어금니가 전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다. 남자가 오른 팔로 다정하게 선미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서로 마주 보고 달콤하고 끈적한 시선을 끊임 없이 주고 받는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달빛은 오로지 두 사람만 비추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저렇게 화사한 표정과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선미의 모습을 시우는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커다란 배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선미의 모습이 낯설다. 어찌나 낯선지 마치 백삼십팔억 년 전에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그때 선미의 시선이 홍지와 시우가 있는 곳을 느리게 훑고 지나갔다. 
 ‘나를 봤을까? 나를 알아 본 걸까?’하는 생각이 시우의 머릿속을 스친다. 
 기분이 이상하다. 놀람, 반가움, 배신감, 쓰라림, 헛헛함, 미안함, 아쉬움, 질투심. 이런 감정들이 얽히고 얽혀 이상야릇한 기분을 만들어낸다. 가슴은 두근거리고 호흡은 조금 거칠어진다. 이런 기분을, 감정을 홍지에게 들키면 안 된다.
 홍지도 자리에서 일어나 팔꿈치로 쿡 찌르면서 말한다. “왜 아무 말이 없어?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꼭 부부가 아니어도 임신할 수 있는 거잖아.” 
 숨을 한 번 크게 가다듬고 말한다. “그러게 저 사람들 좋아 보이네. 둘이 엄청 사랑하는 것이 느껴지고 두 사람 외모로 미루어 볼 때 태어날 아기도 예쁠 것 같아.” 시우는 말을 하면서 홍지의 손을 잡는다. “우리 이제 그만 가는 게 어때?”
 “그만 갈까? 남산은 언제나 와도 너무 좋다. 우리 다음에 또 오자.”
 시우는 깎지 낀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악력을 느낀 홍지는 고개를 돌려 시우를 보며 말없이 웃는다. 
 이상야릇한 기분 탓에 오늘 밤은 꼬박 샐 것 같다. 지금 이 마음은 진짜가 아니다. 단지 뇌가 만들어내는 착각일 뿐이다. 더 이상 뇌에서 만들어내는 작은 세상에 갇혀 살 수 없다.  
 케이블카로 향하는 두 사람 위로 달빛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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