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구조
아침이 왔다. 모래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앞 유리 너머로 희미한 빛이 우주전투기 안으로 들어온다. 심한 모래 폭풍으로 밤 늦게까지 잠들 수 없었던 선정우 소령은 날이 밝은지가 꽤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고 있다.
“삑삑삑삑 문이 열립니다. 철컹 위이이잉 위이이잉 철컹.” 조정석 뒤쪽에 있는 출입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자고 있는 선정우 소령은 우주전투기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잠결에 들은 소리가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출입문 열리는 소리 같은데.. 벌써 구하러 온 건가, 아니면 지금 꿈을 꾸고 있나? 꿈에서라도 구하러 왔으면 좋겠다.’ 선정우 소령은 자면서 생각했다.
심태오 대위는 우주전투기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쓰고 있는 헬멧을 벗는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바닥에 헬멧을 내려놓은 후 총구를 앞으로 겨누고 조심스럽게 조정석으로 접근한다. 가까이 다가가니 조정석에 앉아있는 선정우 대령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떨구고 있는 것이 죽은 것처럼 보인다.
“죽었겠지? 우주에서 추락했는데 살았을 리가 없지.”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했다.
조정석 바로 뒤로 와서 숨을 죽이고 총구 끝으로 선정우 대령의 어깨를 툭 건드려 본다.
“으으음… 아아.” 총구로 건드니 잠에서 덜 깬 선정우 대령이 몸을 뒤척이면서 자세를 바꾼다.
뒤척이는 모습을 본 심태오 대위는 화들짝 놀라면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뭐야? 살아 있잖아. 격추 당한지 시간도 꽤 흘렀고 우주에서 추락까지 했는데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운도 좋네.’
다시 총구로 선정우 소령의 어깨를 건드린다. “정우야, 정우야!”
자고 있던 선정우 소령은 크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누군가 자신을 깨우는 것에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다 보니 허벅지에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다. “아아아아아!” 허리를 숙여 양손으로 허벅지를 감싸 안으며 고통스러워 한다.
심태오 대위는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선정우 소령을 빤히 쳐다보고 있고, 괴로워하던 선정우 소령은 뒤에서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심태오 대위를 발견한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심태오 대위를 보면서 말한다. “태오야! 태오 맞지? 이거 꿈 아니지?”
“그래 나 태오 맞아. 꿈 아니야. 그런데 정우야, 어떻게 된 거야? 안 죽고 살아 있었네?”
선정우 소령 얼굴에는 고통을 참는 모습과 환희에 찬 표정이 섞여있다. “태오야, 생각보다 빨리 왔네. 나는 네가 올 줄 알았어. 너는 나를 찾아 올 줄 알았다고. 진짜 고마워. 여기까지 나를 구하러 와줘서 너무 고마워.” 선정우 소령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간다. “우주전투기가 이곳에 추락하면서 조정석 왼쪽 측면이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면서 허벅지가 완전히 여기 끼었어. 지금 전혀 움직일 수가 없고 옴짝달싹 할 수도 없는 상태야. 3일째 움직이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 중이야. 절단기로 여기를 다 잘라내야 할 거 같아. 빨리 구조대 좀 불러줘. 태오야, 나는 네가 날 구하러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
선정우 대위는 진통제 주사를 더 이상 아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남아 있던 마지막 진통제를 허벅지에 놓았다. 서서히 왼쪽 허벅지가 무감각해진다.
선정우 소령은 잠시 심태오 대위를 빤히 쳐다 본다. “그런데 태오야, 왜 나한테 총을 겨누고 있는 거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정우, 너.. 격추 당했는데도 운 좋게 살아있네.”
선정우 소령이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태오야, 그게 무슨 말이야? 마치 내가 죽기를 바랬던 사람처럼.. 나.. 지금 위급한 상황이야. 3일째 다리가 끼어있고 지금 출혈도 심하단 말이야. 태오야, 빨리 구조대 부르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심태오 대위는 계속 선정우 소령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의문에 찬 표정으로 선정우 소령이 묻는다. “혹.. 시.. 네가 나 격추시킨 거야?”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선정우 소령이 먼저 어색한 적막을 깨면서 말을 꺼낸다. “에이.. 태오야, 설마 아.. 니.. 지..? 아닌 거 맞지?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네가 나한테 미사일을 쐈다는 생각을 하다니 내가 잠시 미쳤나 보다.”
한참 말이 없던 심태오 대위는 선정우 소령에게 총구를 더 가까이 갖다 댄다. “정우, 너 쥐새끼 맞지?” 심태오 대위가 소리를 지른다. “너 쥐새끼 맞지? 빨리 대답해.”
“태오야, 그게 무슨 말이야? 쥐새끼라니. 누가.. 쥐새끼라는 거야?” 선정우 소령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심태오 대위는 계속 고함을 지르면서 말한다. “너 에리스족 첩자 맞지? 네가 우리 쪽 정보 다 넘겨주는 쥐새끼 맞잖아.”
“태오야, 나 아니야. 우리 쪽에 첩자가 있어? 나는 금시초문이야. 그래서 나한테 미사일을 쏜 거야? 무슨 오해가 있나 본데 난 진짜 아니야. 태오야,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왜 그래? 내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네가 잘 알잖아.”
“그럼 알고 말고 내가 너를 잘 알지. 겉으로는 세상 정의로운 척하면서 뒤에서 온갖 구린 짓 혼자 다 하잖아. 네가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어.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너라는 정황은 넘쳐나거든. 사실대로 말하란 말이야. 이 쥐새끼 같은 놈아!” 악을 쓰면서 말하던 심태오 대위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춘다. “너, 도대체 얼마나 받아 처먹은 거야? 온갖 정보를 에리스족한테 넘기고 얼마나 받아 처먹었냐고? 이 쥐새끼 같은 놈아! 안 봐도 뻔하지. 혼자서 많이 처먹었겠지.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야? 그러고도 네가 친구야?”
선정우 소령은 심태오 대위와 달리 매우 차분한 태도로 말한다. “태오야, 화부터 내지 말고 우리 침착하게 생각해 보자. 화를 낸다고 해결 되는 문제가 아니잖아. 우리 차근차근 얘기하면서 풀어 보자. 분명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정황이라니, 진짜 말도 안 돼. 내가 첩자라는 정황이 넘쳐난다니, 나는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 태오야, 네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 진짜 아니야.” 선정우 소령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어간다. “너 진짜 나 죽이려는 거야? 내가 에리스 족 스파이라서? 좋아. 그렇다고 치자. 내가 스파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더더욱 나를 생포해야지, 왜 죽이려고 하는 거야?”
심태오 대위는 조금 더 총구를 선정우 소령 머리 가까이 가져가면서 말한다. “이 쥐새끼 같은 놈아. 널 살려주면 쥐새끼처럼 또 빠져나갈게 뻔한데 살려두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그리고 너는 내 인생에서 항상 걸림돌이었어.”
선정우 소령은 심태오 대위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네 인생에 걸림돌이라니.. 태오야, 그게 무슨 말이야?”
“몰라서 물어? 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너는 나보다 항상 앞서 나갔고 나는 항상 네 뒤에 처져있었단 말이야. 우주사관학교, 전투비행단, 지구우주연합군. 어디에서든 너는 나보다 뛰어났다고. 나는 그런 너를 언제나 증오했어. 너만 없었으면 내가 최고가 될 수 있었단 말이야!” 심태오 대위는 또다시 악을 썼다.
“태오야, 왜 그래? 나는 그냥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우리는 좋은 친구잖아. 나는 너를 경쟁 상대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누가 누구의 걸림돌이라는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난 언제나 널 응원했고 우리는 항상 함께 잘 해왔잖아.” 선정우 소령은 심태오 대위와 달리 차분함을 잃지 않고 말했다.
심태오 대위 얼굴은 광기에 휩싸인 표정으로 변해간다. “친구? 좋은 친구라고? 맞아. 너는 친구이기도 하면서 증오의 대상이기도 해. 네가 친구로써 필요할 때도 있었지. 그거까지 부인하지는 않을게. 그런데 이제는 네가 더 이상 필요가 없어. 그냥 내 앞에서 사라져 줘야겠어.”
선정우 소령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다. “태오야, 우리 차근차근 한번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는 너무 오랜 기간 전쟁을 하고 있잖아. 그래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서 이성적이지 못하고 자꾸 이상한 생각에 빠져들 때가 많아. 너나 나나 마찬가지일 거야. 나는 전투를 하다 보면 내가 가끔 비이성적 광기에 휩싸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논리적으로 사고하지도 못하고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지도 못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전쟁에 오래 참전하다 보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거 같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지금 그런 상황인 거 같아. 태오야, 그럴수록 우리 침착해야 해. 나한테 겨누고 있는 총 잠시 내려놓고 같이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영원한 친구잖아. 우리는 죽을 고비도 함께 넘긴 사이야. 그리고 잘 생각해 봐. 너한테는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줘도 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게 있어. 너한테는 세아씨가 있잖아. 세아씨를 생각해서도 이러면 안 돼.”
“선정우! 갑자기 여기서 세아 얘기를 왜 하는 거지? 세아를 생각해도 이러면 안 된다는 게 무슨 뜻이야? 너 이 새끼, 예전부터 세아를 보는 눈빛이 이상했어.” 심태오 대위는 분노로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면서 소리를 지른다. “도대체 지금 세아 얘기를 왜 하는 거냐고!”
“태오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세아씨를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니.. 내 말 뜻은 네가 앞으로 세아씨랑 함께 할 날이 많고 얼마 전 태어난 애기를 생각해서라도..”
“닥쳐. 이 쥐새끼야. 죽어, 그냥 죽으란 말이야!!”.
“탕, 탕” 우주전투기 안에 두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심태오 대위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고, 선정우 대위는 총소리에 놀라 조정석 등받이 아래로 몸을 바짝 숨겼다. 총성이 사라지자마자 어디선가 여자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린다.
“아, 진짜.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미쳤나? 왜 혼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그 여자는 쓰고 있는 헬멧을 벗더니 총에 맞아 쓰러진 심태오 대위 머리를 발로 걷어차면서 소리를 지른다.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어? 아냐고? 이 쓰레기 같은 놈아! 내가 너 죽이려고 지구우주연합군에 지원했어. 내가 복수하려고.. 너 때문에 내 군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다고!! 너는 죽어도 마땅해. 내가 널 죽이는 날만 기다렸단 말이야!!”
다시 한번 발로 심태오 대위 가슴을 걷어찬다. 선정우 소령은 등받이 옆으로 고개를 살짝 내민다. 심태오 대위를 쏜 사람은 이미소 중위이다. 선정우 소령은 이미소 중위가 심태오 대위를 총으로 쏴 죽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둘이 무슨 관계이고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길래 저러는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이미소 중위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우주 비행사이다. 우주전투기 비행 능력이 어느 누구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실전에 투입되면 언제나 기대 이상의 탁월한 전투능력을 보여줬다. 전시 때 전사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평소 성격은 온화하고 다정감한 편이며 주변 사람들과의 친화력도 매우 높다. 능력도 뛰어나고 성격도 좋다 보니 따르는 후배가 많아 리더십도 탁월하다. 군인으로써 필요한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다. 그야말로 이미소 중위는 모범적인 우주전투 비행사 모습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지금 보고 있는 이미소 중위의 모습은 선정우 소령이 알고 있던 이미소 중위가 전혀 아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마치 괴물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까지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이미소 중위는 이성을 잃은 모습으로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며 말한다. “내가 여기 오다가 에리스족, 그 외계인 놈 시체를 하나 발견했거든. 내가 너랑 그 놈이랑 엮어서 너를 쥐새끼로 만들어 버릴 거야. 너를 첩자로 만들어 버릴 거라고! 너 같은 쓰레기는 명예롭게 죽으면 안돼. 내가 너를 첩자로 만들어서 네 명예를 제대로 더럽혀 줄 거라고.” 이미소 중위는 허리를 90도로 숙인 채 죽은 심태오 대위를 향해 악을 쓴다. “알아 들었어?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알아 들었냐고!”
소리를 지르던 이미소 중위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갑자기 우주전투기 안을 말없이 이러 저리 돌아다니기도 하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도 한다. 하지만 호흡이 여전히 거칠어 보이는 게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다. 이때 선정우 소령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저.. 기.. 이.. 미소 중위.”
이미소 중위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조정석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말이 없이 서로를 빤히 쳐다보고 있고, 놀란 이미소 중위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저기.. 이미소 중위. 내가 지금 허벅지가 끼여서 움직일 수가 없어. 출혈도 심하고 얼른 구조대를 불러야 할 거 같아.”
이미소 중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선정우 소령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머, 소령님. 아.. 안녕하세요? 살아계셨네요? 살아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우주에서 추락했는데 살아계시다니..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괘… 괜찮으신 거죠?”
“아 그래. 괜찮기도 하고 안녕도 한데.. 지금 인사할 상황은 아닌 거 같아. 구조대를 얼른 불러줘. 심태오 대위랑 이미소 중위가 여기 온 걸 보면 우리 병력이 이 행성 근처에 있을 거잖아.”
이미소 중위는 선정우 소령 다리를 유심히 살펴본다. “어머, 다리가 여기 완전히 끼었네요. 상처도 깊고 피도 많이 흘린 것 같네요. 많이 아프실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응. 아직까지는 괜찮아. 이중위 고마워. 그런데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 얼른 구조대를 불러줘.”
이미소 중위가 선정우 소령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정하게 말한다. “그런데 소령님, 구조대 부르기 전에요. 물어볼게 있는데.. 혹시 다 보고 들으셨죠?”
“뭐.. 뭐를?”
“알면서 왜 그러세요? 제가 한 짓 다 보셨잖아요. 제가 한 말 다 들으셨고요.”
“이중위,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나는 아무것도 못 봤어. 얼른 구조대부터 불러줘.”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심태오 죽이는 거 봤잖아요. 심태오 저 쓰레기 같은 새끼가 저한테 소령님이 쥐새끼라고 했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저는 안 믿었었는데. 지금 못 본 척 하는 거 보니까 쥐새끼가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연기력은 좀 부족하신 거 같은데요.” 여전히 이미소 중위는 나긋나긋하게 말하고 있다. “다 봤죠? 그렇죠?”
“뭐.. 뭐를? 나는 허벅지가 다쳐서 기절..”
이미소 중위가 선정우 소령 머리에 총을 겨눈다. “저는 심태오 저 쓰레기 같은 놈이 미쳐서 혼자 말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소령님이랑 얘기하고 있었던 거였네요. 이 우주전투기에 들어오자마자 심태오를 바로 쏴버리는 바람에 상황 파악을 전혀 못했었네요. 멍청하게도.. 다 본 거 맞죠?”
선정우 소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마… 맞아. 그런데 내가 못 본 걸로 할게. 나도 이미소 중위와 함께 심태오 대위를 에리스족 사체랑 엮어서 첩자로 만드는 거에 동참할게. 좀 전에 있었던 일은 절대 함구할 테니 걱정하지마.”
“맞네. 다 본거 맞네요. 소령님, 제가 했던 얘기까지 정확하게 알고 계시네요. 그러면서 몰랐다고 한 거에요?”
“미.. 미안해. 그냥 못 본 척 하는 게 이미소 중위를 도와주는 길이라고 생각했어. 정말이야. 같이 돌아가자. 그러면 이미소 중위는 나도 구하고 첩자도 잡은 영웅이 될 거야. 훈장도 받고 특진도 할거라고.. 어때?”
“오! 소령님, 그거 좋은 아이디어인데요?”
“그렇지? 어서 구조대를 불러줘.” 선정우 소령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소령님, 저는 여기 소령님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심태오 저 쓰레기를 죽이러 온 거거든요. 그리고 만약 소령님을 구해서 돌아간다고 하면 소령님이 절 지켜줄 거라는 걸 어떻게 믿죠? 소령님이 에리스족의 스파이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세상에 쥐새끼를 믿는 바보가 있을까요?”
“이.. 미.. 소 중위, 무슨 소리야? 나 잘 알잖아. 나 첩자 아니야. 스파이 아니라고. 누구보다도 이미소 중위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면서 왜 그래? 우리는 한 배를 탔다고. 나만 믿어!”
“한 배를 탔다니 무슨 소리하시는 거에요? 말이 안되잖아요. 소령님이 살아서 무사히 본부로 돌아간다면 제가 심태오를 죽인 걸 못 본 척 할 이유가 없잖아요. 소령님은 저를 감싸줄 이유가 전혀 없다고요. 제가 소령님이라도 돌아가면 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제가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죠? 제 입장에서는 그냥 소령님이 죽어주는 게 가장 깔끔해요. 그런데 막상 소령님을 죽이려고 하니 마음이 좀 안 좋기는 하네요. 심태오랑은 다르게 군 생활하면서 소령님께는 고마웠던 일이 참 많았었거든요.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어요. 저만을 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네요.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이중위, 제발 이러지마. 살려만 주면 정말 아무것도 못 본 걸로 할게. 제발 한번만 믿어줘.”
“그럼 소령님, 안녕히 가세요.”
“탕! 탕!” 총성 두 방이 울려 퍼졌다.
이미소 중위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앞으로 고꾸라졌고 선정우 소령은 이번에도 등받이 밑으로 몸을 숙였다. 총성이 사라지고 나니 어디선가 다소 귀에 거슬리는 기계음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지들끼리 싸우고 난리 났네. 똑 같은 인간들끼리. 으흐흐흐흐흐.”
키가 매우 큰 에리스 족 외계인이 허리를 숙이고 선정우 소령에게 다가온다. 에리스족은 키가 3미터는 족히 돼 보이고 매우 가는 몸통과 팔다리를 가지고 있다. 가늘어 보이는 몸과 팔다리는 가까이서 보면 매우 단단한 근육질로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몸에 털이 하나도 없고 피부는 녹색빛이 섞인 짙은 회색이다. 얼굴은 타원형에 매우 작으며 눈은 얼굴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고 코는 매우 납작하다. 인간과 달리 입 주위에 입술이 없고 겉으로 드러난 앞니는 송곳니 모양으로 모두 뾰족하다. 척추관절이 많은지 좁은 공간에서 허리를 매우 유연하게 움직인다. 인간의 관점에서 전혀 호감이 가지 않는 외모다. 인간 언어를 번역하는 장치를 사용해 말을 하고 있다. 번역 장치에서 나오는 음성, 말투, 괴상한 웃음 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듣기에 불쾌하다.
“아이디 요원, 왜 이제 오는 거야? 진짜로 죽을 뻔 했잖아.” 선정우 소령이 에리스 족 외계인을 보자마자 말했다.
우주전투기 안으로 들어온 외계인은 디스코르디아 행성의 우주정보원 소속 아이디 요원이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선정우 소령, 당신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의 가장 믿을 만한 정보원을 죽게 놔둘 수 없다. 당신한테 들어간 돈이 얼마인데 죽게 내버려두겠는가?”
“무슨 소리야! 두 번이나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었단 말이야.”
“으흐흐흐흐. 우리가 다 지켜보고 있었다. 이 행성으로 추락하도록 유도한 것도, 그리고 추락할 때 죽지 않게 당신을 살린 것도 다 우리가 한 거다.”
아이디 요원 뒤로 에리스족 외계인 두 명이 절삭 장비를 들고 들어왔다. 레이저 절삭기로 선정우 소령의 허벅지를 짓누르고 있는 기계를 잘라내기 시작한다.
아이디 요원이 선정우 소령에게 말한다. “인간의 시간으로 30분정도 걸릴 거다. 조금만 참아라.”
“알았다. 도와주러 와줘서 고맙다.”
선정우 소령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기계를 제거하는 에리스족 외계인을 보고 있다.
“으흐흐흐흐흐. 걱정하지 마라. 더 큰 부상 당하지 않게 조심해서 제거할 거다.” 아이디 요원이 선정우 소령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선정우 소령, 우리가 당신을 왜 정보원으로 선택한 줄 아나?”
선정우 소령은 아이디 요원의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조금 당황했다. “나를 정보원으로 선택한 이유? 아니 모른다. 이유가 뭔가?”
“우리가 선택한 이유는 당신은 지나치게 예의 바르고 지나치게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의 진짜 내면의 모습을 철저하게 숨기기 위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극단적으로 반대로 하는 전형적인 부류이다. 당신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선하디 선한 가면을 쓰고 뒤에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런데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길 바란다.”
“…….….” 선정우 소령은 아이디 요원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 느꼈겠지만 심태오 대위 같은 인간을 조심해야 한다. 물증뿐만 아니라 어떠한 심증도 남겨서는 안 된다. 당신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영특함과 차가움을 지녔다. 당신은 내가 본 최고의 스파이이다.”
두 명의 에리스족 외계인은 선정우 소령 다리를 누르고 있는 기계를 완전히 제거한 후 우주전투기 밖으로 나갔다. 선정우 소령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간단하게 작업이 끝났다. 기계가 제거되자마자 선정우 소령은 살이 깊게 패여 대퇴골이 보이는 환부를 압박 붕대로 묶었다.
아이디 요원이 바닥에 있는 심태오 대위의 총을 들고 말한다. “등받이 뒤로 몸을 숙여라.”
아이디 요원 말대로 선정우 소령은 몸을 숙였다. 그러자 심태오 대위와 이미소 중위의 총을 우주전투기 뒤쪽을 향해 번갈아 여러 발 발사했다. 귀 안을 깊숙이 찌르는 듯한 총성이 우주전투기 안에 퍼진다. 아이디 요원은 들고 있던 총을 바닥에 던졌다. 이번에는 자신의 총으로 전투기 앞쪽을 향해 여러 발 쐈다.
“우주전투기 밖에 나가서도 총을 쏴서 우리와 인간이 총격전한 흔적을 만들어 놓겠다. 밖에 있는 우리 종족의 시체 한 구도 그대로 두고 가겠다. 우리가 당신을 구해준 걸 들키지 않도록 총격전한 상황을 가지고 스토리를 잘 만들도록 해라. 그런 쪽으로 전문가이지 않나?” 아이디 요원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절대 들킬 일 없을 테니.”
“우리는 이만 가보겠다. 곧 지구우주연합군 병력이 당신을 구하러 올 것이다.“
우주전투기 밖으로 나가려는 아이디 요원에게 선정우 소령이 묻는다. “그런데 지금 내가 추락한 행성이 어디인가?”
“여기는 지구이다.”
“뭐? 지구라고? 그건 말이 안 된다. 교전하던 위치나 내가 격추당해 튕겨져 나간 방향을 보면 여기는 지구일 수가 없다. 만약 지구라면 나는 바로 구조 됐을 것이다.”
아이디 요원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며 말한다. “으흐흐흐흐흐. 여기는 지금 인간이 살고 있는 두 번째 지구가 아니라 인간이 먼 과거에 살았던 첫 번째 지구이다. 인간이 최초로 살았던 바로 그 지구란 말이다. 당신은 첫 번째 지구의 고비 사막이라는 곳에 추락했다. 당신을 살리기 위해 지구와 가장 비슷한 행성에 추락시켰다. 그럼 지구우주연합군이 오기 전에 우리는 얼른 떠나겠다.”
“잠시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출입문 밖으로 나가려던 아이디 요원은 다시 걸음을 멈췄다. “무슨 부탁인가?”
“심태오 대위를 당신들과 내통하는 첩자로 엮을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서 보내주기를 바란다.”
“알았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더 있다.”
“무엇이냐?”
“심태오 대위의 아내를 납치해주기를 부탁한다.”
“그것도 어려운 부탁이 아니다.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다음에 접선할 시간과 장소는 일주일 후에 알려주겠다. 새로운 임무가 나갈 것이다.”
“알았다.” 선정우 소령이 대답했다.
“그리고 명심해라. 인간의 이성과 이기심으로는 절대 우리를 이길 수 없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절대 지지 않는다. 인간은 절대로 세 번째 지구 후보 행성을 차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우리를 배신할 이유가 없다.”
“…………” 선정우 소령은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이디 요원은 우주전투기 밖으로 나가면서 혼잣말을 한다. “쥐새끼 같은 놈. 역시 우리가 제대로 봤어. 으흐흐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