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가로수길 2

by 킥더드림

지오와 선미는 함께 저녁을 먹고 여의도 한강공원에 왔다. 둘은 손 한 뼘 정도 거리를 두고 한강이 잘 보이는 벤치에 앉아있다. 왼쪽에는 가깝게 마포대교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700미터 남짓 떨어진 거리에 원효대교가 보인다.
“조금 전에 갔던 식당 분위기도, 맛도 진짜 괜찮던데, 선미씨는 어떻게 그런 곳을 많이 알아요?” 지오가 물었다.
“어떻게 알기는요. 그냥 SNS로 찾아 보는 거에요. 그럴싸해 보이는데 찾아서 많이 다녀봤는데 막상 가보면 별로인데도 많아요. 오늘 간 곳은 괜찮죠? 거기 신용산 근처에 은근히 맛집이 많아요. 우리 다음에는 다른 집으로 가봐요.”
“아, 신용산 근처에요? 몰랐네요.”
“그나저나 한강공원에 오니까 너무 좋아요.” 선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선미씨 말대로 좋네요. 풍경도 좋고 시원한 바람도 불고 말이죠.”
“그 동안 계속 여의도에서 일했는데, 같이 여의도 한강공원에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러게요. 사무실이 마곡동으로 옮겼으니까 왔지, 지금도 여의도에 있었으면 회사 사람들 눈에 띌 수 있기 때문에 올 수가 없지요.”
“한강공원이 어디 여의도에만 있나요? 그까짓 것 다른 한강공원으로 가면 되죠.”
“그렇긴 한데요. 그래도 여기만 한 데가 없어요. 나는 왠지 여기가 제일 좋더라고요. 시야도 넓게 트여있는 것 같고. 마포대교 너머로 밤섬도 보이잖아요.”
선미가 조금 목청을 높여서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회사 사람들한테 눈에 띄면 안 될 이유가 없잖아요? 우리가 만나는 게 뭐 어때서요? 우리 둘 다 싱글인데.”
“그렇기는 하지만, 선미씨도 남자 친구가 있고 나도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다는 걸 모두들 다 알잖아요. 우리가 만나는 걸 보면 당연히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겠어요? 뒤에서 수군댈 게 분명해요.”
“저는 언제든지 남자 친구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선미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오는 선미의 말을 못 들은 척 한다. “여자 친구는 지금도 내가 일하는 줄 알고 있어요. 여자친구한테 미안한 마음이 커요.”
해가 지기 시작한다.
“석양이 너무 아름다워요. 아름답긴 한데.. 해가 지는 걸 보니까 기분이 너무너무 이상해요. 지금 보고 있는 석양은 어둠을 재촉하고 있는 것만 같아요. 우리 관계처럼 끝을 향해 달려가는 느낌이랄까요? 이 아름다움이 너무 슬프고 싫어요.” 선미가 말했다.
“선미씨 말이 맞아요. 아름다워요. 석양이 아름다우면서도 슬퍼 보여요. 마치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일몰 같아요. 하지만 보이는 아름다움이 전부는 아니죠. 왜 사람들은 붉은 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있는 매우 짧은 순간의 매직 아워만을 기억하려고 하는 걸까요? 왜 그 이면은 보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저 아름다움은 순식간에 짙은 어둠에 집어삼켜지고 마는데 말이에요. 세상은 저 해지는 풍경의 아름다움에 온갖 수식어를 갖다붙여 묘사하지만, 사실은 저 일몰의 실재는 650에서 750나노 대의 빛이 잠시 산란하는 것일 뿐이라고요. 그저 하늘을 파랗게 보이게 하는 빛과 다른 파장대의 빛이 산란하는 것에 불과한데 말이죠. 거기에는 어떠한 가치와 의미도 없고 그저 사실만 있을 뿐인데 세상은 거기에다 아름다움을 부여한단 말이에요. 원래 아름다운 게 아니라 아름다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낯설고 희귀한 무언가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실제로 아름답지 않은 것일 수도 또 언제든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에요.” 지오는 잡다하고 유치한 말을 바다에 떠다니는 난파된 배의 산산조각 난 파편들처럼 아무렇게나 나열했다.
선미는 지오의 말에 감탄한다. “아! 너무 멋있는 말이에요. 석양에 대한 로맨틱하면서도 사실적인 묘사이네요.”
선미의 칭찬에 지오가 멋쩍어한다. “표현이 괜찮았나요? 하하. 음.. 방금한 표현을 사이언티픽 로맨티시즘 이라고 하는 건 어떨까요? 하하.”
지오의 억지스럽고 말이 안 되는 농담에도 선미는 재미있어한다. “하하. 너무 재미있는 표현이에요. 하하하.”
두 사람은 지오의 말처럼 사실은 아름답지 않을지도 모를, 하지만 아름답게 느껴지는 일몰을 조용히 감상하고 있다. 노을은 한강 마저 붉게 물들였다. 한강은 붉은 물결을 일렁이며 흘러간다. 지오와 선미 앞 15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 자전거 전용 도로가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들도 석양을 감상하려는 것인지 일제히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달린다. 그 중 한 명이 자전거 전용 도로를 빠져 나와 지오와 선미 앞에 멈췄다. 홀로 자전거 타기를 즐기고 있는 여자이다. 지오는 그녀에게 눈길이 간다. 하얀색 헬멧을 쓰고 밝은 노란색 저지와 짙은 네이비색 패드바지를 입었다. 헬멧 밑 얼굴의 거의 반을 가리는 갈색 고글을 쓰고 있다. 키는 꽤 커 보이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지 날씬하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체형이다. 그녀는 고글을 벗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는다. 고글을 벗은 그녀의 얼굴이 예뻐 보인다. 물을 마시며 붉은 노을을 바라본다. 지오는 그녀를 보며 자신의 여자친구가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운동을 좋아하는 지오는 여자친구와 함께 운동하지 못 하는 것을 늘 아쉬워했다. 그녀는 다시 고글을 쓰고 스마트폰을 꺼내 해지는 풍경을 뒤로하고 셀카를 찍는다. 한참 셀카를 찍던 그녀가 지오와 선미가 앉아있는 벤치로 다가온다.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진 몇 장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가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네. 그럼요.” 지오가 반갑게 대답했다.
그녀는 손에 있던 스마트폰을 지오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자전거 전체랑 제 전신이 나오도록 찍어 주세요."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자전거를 뒤에 두고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지오는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그녀를 본다.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의 액정과 편광판이 빚어낸 LCD 화면 속 그녀 모습은 현실보다 더 관능적이다. 능숙하게 다양한 포즈로 바꿔가며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포즈와 표정이 마치 전문 모델 같은 느낌을 준다. 지오는 스마트폰을 건넸고 그녀는 사진을 확인한다.
“와! 사진 잘 찍으시네요. 완전 마음에 들어요. 이렇게 부탁해서 이 정도로 잘 찍는 경우가 없거든요. 감사합니다.”
지오는 형식적인 칭찬인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좋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혹시 두 분도 자전거 타세요?” 그녀가 물었다.
“네? 아.. 네. 자전거 타는데요.” 지오가 대답했다.
선미가 놀란 듯 묻는다. “지오씨, 자전거도 타요? 몰랐어요.”
그녀가 반갑게 말한다. “아, 그러시군요. 제가 자전거 의류 수입 사업을 하거든요. 온라인으로도 판매를 하고요. 신사동 가로수길 근처에 오프라인 매장도 있어요. 두 분 가로수길 오시면 한번 구경하러 오세요. 사진 찍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녀는 잠시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 같더니 자전거를 타고 금새 멀어져 갔다.
“그 넓은 가로수길 어딘지 알려줘야 가보든, 구경을 하든 할 거 아니야.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선미가 말했다.
“그러게요. 가게가 어디 있는지 얘기도 안 해주고 오라는 건 뭔가요? 나이가 우리보다 어린 것 같은데 자기 사업을 하다니 대단하네요. 이제 우리도 가죠. 제가 집에까지 바래다 줄게요.”
“저기, 지오씨, 잠깐만요.”
벤치에서 일어나려는 지오를 선미가 불렀고 지오는 다시 자리에 앉아 선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미씨, 왜에에..”
선미가 갑자기 지오에게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지오는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선미를 살짝 밀쳐냈다.
지오가 자신을 밀어낼 거라고 생각도 못한 선미는 어쩔 줄 몰라 한다.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아! 내가 왜 그랬지. 미안해요.” 선미는 말을 하면서 지오의 눈을 쳐다보지 못한다.
“아니에요. 내가 미안해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그랬네요.”
서로 당황한 지오와 선미는 잠시 말 없이 앉아있는다.
“이제 그만 가죠.” 지오가 말했다.

지오는 자신의 차로 선미를 압구정동 집에까지 바래다주었다. 선미가 가자마자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에 카페 somewhere deep을 검색하여 길찾기를 하였다. 도착 예정 시간은 5분이다. 지오는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카페가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 뒤편 주차장에 차를 댔다. 정말 딱 5분만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자마자 선미에 톡이 왔다.
『정말 우리는 이렇게 끝날 수 밖에 없나요? 지금처럼 계속 만나면 우린 나쁜 건가요? ♡』
지오는 짜증나는 표정을 짓는다. '이런 얘기하면서 뒤에 하트는 뭐야? 뭐라고 답해야 하나.. 정말, 난감하네.'
적절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썼다 지웠다 몇 번 반복했다.
『마음이 좀 그렇네요. ㅠㅠ 나쁘고 안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계속 만날 수는 없어요. 우리 현실을 받아 들여요.』
선미에게 보낼 톡을 써놓고 보내기를 누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눌렀다. 지오는 선미에게 톡을 보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조수석에 누가 앉아 있어서 깜짝 놀란다.
"으아아악! 깜짝이야." 지오는 너무 놀라 몸이 저절로 조수석 반대편으로 젖혀졌고 운전석 문에 바짝 기댄 채 조수석을 본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신비이다. "너 뭐에 그렇게 정신이 빠져있길래 내가 차에 타는 줄도 모르냐?"
"아아! 놀래라. 야, 깜짝 놀랬잖아! 너 유령이야, 뭐야? 언제 탄 거야? 소리도 없이 차에 타고. 진짜 놀랬네. 어떻게 소리도 없이 탄 거야?" 지오가 가슴을 쓸어 내린다.
"뭘 어떻게 타긴 어떻게 타! 그냥 네 차가 보이길래 문 열고 탔지. 어떻게 내가 타는 줄도 모를 수가 있어?”
"그... 그래? 왜 문 열고 닫는 소리를 못 들었지. 그런데 벌써 가는 거야? 오랜만에 너랑도 얘기 좀 하려고 했더니."
"나 지유랑 같이 있는 줄 알고 있었어? 어떻게 알았어?"
"야, 어떻게 알긴 어떻게 알아! 너도 그렇고 지유도 SNS에 커피 마시고 케이크 먹는 사진 올리고 난리도 아니던데."
"아! 그랬겠구나. 그런데 너 나 보고 화들짝 놀라는 게 좀 수상해. 냄새가 나. 너 일하다 오는 거 아니지?" 신비는 실눈을 뜨고 지오를 째려보면서 말했다.
"뭐.. 뭔 소리하는 거야? 일하다 오는 거거든."
"너 저녁으로 삼각김밥 먹은 거 아니지? 솔직히 말해라.”
“삼각김밥 먹은 거 맞아.”
“아닌 것 같은데. 너 아직도 걔 만나는 거야?"
"신비야! 너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이상한 얘기할 거면 그냥 얼른 가라." 지오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비가 지오의 뺨에 손을 살짝 대면서 말한다. “이래서 내가 남자를 못 만난다니까. 그래도 내가 한때 좋아했던 사람인데 말이야. 이런 모습 보면 내 기분이 어떻겠니? 지오야, 제발 날 실망시키지 말아줘.”
“걔가 나한테 호감을 표시 해서 그냥 몇 번 만났을 뿐이야. 걔랑은 더 이상 안볼 거야. 지유 놓치면 안되지. 지유처럼 괜찮은 사람 만나기 쉽지 않은 거 나도 다 알고 있다고.”
“알면서 찌질하게 왜 그래? 너의 그 찌질함에 내가 마음을 접었지만, 그래도 어떠한 이유가 됐든 나는 너를 못 보게 될까 봐 걱정 돼.”
“진짜 걔랑은 아니라니까. 그리고 우리는 친구인데 못 보기는 왜 못 봐.”
“그러니까 잘 하라고 찌질하게 굴지 말고.”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어.”
“지오야, 죽을 때까지 써도 써도 다 못 쓸 정도로 돈 많은 사람들이 왜 더 벌려고 하는 지 알아?”
“왜?”
“전능해지고 싶은데 인간은 전능해질 수가 없잖아. 돈으로라도 전능감을 느껴 보고 싶어서야. 네가 자꾸 다른 여자한테 눈길이 가는 것도 다르지 않아. 그 안에서 나름 전능감을 느껴보고 싶어하는 거야. 겉으로 드러나는 욕망의 형태는 다 달라 보여도 그 근원은 같거든. 지유 몰래 걔 만나 보니까 뭐 별 거 있었어?”
지오가 고개를 흔든다. “아니.”
“처음에는 좀 있었겠지. 너 좋다고 하니까 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을 거야 아마. 그런데 막상 만나 보면 별거 없거든. 그런데 그게 무서운 거야. 처음 그 느낌을 다시 맛 보기 위해서는 또 다시 한 눈을 팔아야 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걔랑은 더 이상 안 봐.”
“알았다. 믿을게.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가 너를 만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너를 안 보고 살 수도 없어. 친구, 우리 앞으로 계속 보면서 살도록 하자.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똑같고 별거 없기는 마찬가지이긴 해. 그럼 난 이만 갈게.”
신비가 차문을 열고 내린다.
“그래. 신비야, 잘 가. 내가 연락할게.”
신비는 자신의 차를 타고 <Somewhere Deep>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지오는 카페 <Somewhere Deep>으로 들어왔다. 카페 안 쪽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스마트폰을 열심히 보는 지유가 보인다.
“지유야!” 지오가 가볍게 지유의 머리를 만진다.
지유는 고개를 들고 신비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 지오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왔어? 야근하느라 고생했어.”
“힘들었어. 내가 생각해도 오늘은 고생한 거 같아.” 지오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의자에 기댄다.
“우리 자리 옮길까?” 지유가 물었다.
“아니야. 오늘은 피곤해서 그냥 여기 있다 일찍 들어가자.”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일찍 들어가자고?”
“오랜만은 아니지 5일 전에 봤잖아. 우리 정도면 자주 만나는 거야.”
지유가 서운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래도 일찍 헤어지기 아쉬우니까 그러지.”
지오는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해 왔다.
“이 카페 분위기 괜찮지? 커피도 맛있더라고.” 지유가 물었다.
지오가 카페를 둘러보며 말한다. “언뜻 보면 괜찮아 보이는데. 뭐랄까.. 인테리어가 무너지기 쉬운 토대 위에 세운 유치하게 로마네스크 양식을 흉내 냈다고나 할까? 그리고 여기 있는 종업원도 그렇고 손님들도 모두 다 루시안 프로이트 인물들 같아.”
“또 무슨 이상한 소리하는 거야? 이 정도면 훌륭하지 뭘 그래.”
지오가 답답한 표정을 짓는다. “네가 몰라서 그래. 그런 게 있어. 그나저나 신비는 벌써 간 거야?”
지유가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신비 갔잖아. 들어오다가 카페 앞에서 신비 못 봤어?”
“카페 앞에서? 못 봤는데. 나 들어오기 직전에 간 거야? 못 본지 오래 됐는데 얼굴이나 보고 가지.”
“속이 좀 안 좋다고 먼저 갔어. 신비가 카페 밖에서 누구를 만나서 얘기하길래. 나는 당연히 그 사람이 너라고 생각했지. 멀어서 잘 안 보이기는 했는데 키도 그렇고 체형도 너랑 비슷한 거 같았는데. 지금 네가 입은 옷이랑도 비슷했던 것 같고.” 지유는 긴가민가하면서 말했다.
“나는 아니야. 다른 사람을 나로 잘 못 봤나 봐.”
“아무리 멀어도 내가 널 못 알아 볼 리가 없는데 이상하네. 그나저나 오늘 회사에서 갑자기 바쁜 일 생겼어? 점심 때까지만 해도 일찍 퇴근할 수 있다고 했잖아."
"오늘이 우리 상무가 3주 정도 해외 출장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거든. 3시 정도에 인천공항에 떨어진 것 같더라고. 그랬으면 바로 집으로 가면 될 것을 사무실로 들어 온 거 있지. 사무실로 들어오는 상무 얼굴을 보자마자 어찌나 짜증이 나던지. 그때부터 스트레스가 시작 된 거 같아."
"와, 정말 대단하다. 3주나 해외출장 갔다 오면 많이 피곤할 텐데 굳이 사무실로 들어오다니. 대기업 임원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구나."
"사무실에 오자마자 부장들 싹 불러서 회의를 하더라고. 회의가 한 5시 조금 넘어서 끝났나? 아무튼 회의 끝나자마자 숙제가 떨어졌지 뭐야. 내일 11시까지 각 시장 별 실질적인 하반기 예상 수요를 자료로 만들어서 보고하라는 거지. 사실 이게 몇 시간 만에 만들 수 있는 자료는 아니거든. 그래도 빨리 끝내고 지유 만나려고 미친 듯이 자료 찾고, 폴란드 법인에 전화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대충 만들었어. 나 잘했지?"
"하하. 그래 잘했어. 잘했는데 그래도 대충 만들면 어떻게? 어쨌거나 갑자기 퇴근 직전에 보고서는 무슨 보고서래? 내일 오전까지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내 말이.. 보고를 위한 보고 너무 짜증나. 그래도 오늘은 폴란드 법인이 바쁘지도 않고 협조적이어서 빨리 끝낸 편이야. 예전에는 밤새 보고서 만들었는데 상무가 술 먹고 다음날 출근 안 한적도 있어. 와, 그때는 진짜 완전 짜증나더라. 죽이고 싶었어."
"말도 안 돼. 뭐 그런 경우가 다 있나." 지유가 말했다.
지오가 인상을 쓰며 말한다. “네가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니지?”
“응. 그런데 지오야, 저녁으로 삼각김밥만 먹었는데 배 안 고파? 디저트라도 좀 먹는 건 어때?”
“아니야. 커피면 돼. 오늘 낮에도 많이 바빠서 점심을 엄청 늦게 먹었거든. 그래서 삼각김밥 먹은 걸로도 충분해. 별로 배 안고파.”
“그래도 밤 늦게 배고플 수도 있을 텐데. 그런데 얼굴이 진짜 좀 피곤해 보이기는 한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는 게 낫겠다.”
지오가 웃으면서 말한다. “그렇지? 정말 완전 피곤하다니까. 일찍 퇴근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 떨어져서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겠어? 그리고 빨리 끝내려고 완전 집중하면서 일했거든. 이게 다 사무실로 들어온 상무 때문이야. 지유야, 오늘은 그냥 일어나자. 집에 가서 쉬고 싶어.”
“알았어. 내일 금요일이니까 편하게 보자.”
“아! 그러고 보니 내일이 금요일이네. 우리 내일 만나서 재미있게 놀면 되겠다.”
지유와 지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출입문으로 걸어간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분명히 저 출입문 밖에서 너랑 신비랑 얘기하는 걸 본 것 같은데.” 지유가 말했다.
“잘 못 본 거야. 난 신비 그림자도 못 봤어.”
“이상하네. 내가 무언가에 홀렸었나?”

지유와 지오는 카페를 나왔다.
“아, 그리고 우리 회사 사람이 신용산 근처에 괜찮은 맛집이 있다고 하더라고 내일 거기 한번 가보자.” 지오가 말했다.
“그래? 나야 좋지.”
“맛집을 정말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거든. 그 사람 말로는 신용산 주변에 은근히 맛집이 많다고 하더라고”
“신용산 주변에? 전혀 몰랐네. 친한 사람이야?”
“아.. 아니. 친한 사람은 전혀 아니야.”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건물 뒤 주차장으로 걸어간다.
이때 뒤에서 자동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스팔트 바닥에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끼이이이이익”하는 마찰음이 너무 커서 도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 자동차 급정거하는 소리에 놀란 지유와 지오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양방향 모두 1차선인 가로수길 도로에 지유와 지오가 걸어가는 건너편 차도에서 달리던 자동차 한 대가 중앙선을 침범했다가 급정거를 하는 동시에 원래 차선으로 방향을 돌리는 과정에서 뒤따라 오는 차와 충돌했다. 마침 반대편 차선에서 달리던 자동차는 중앙선을 침범한 차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급하게 꺾으면서 급정거를 하였고 달리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보도블록 위의 가로수를 강하게 들이받았다. 가로수를 받은 차 뒤로는 어떤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앞차가 90도 가까이 방향을 틀어 가로수에 부딪히는 바람에 차체가 가로로 도로를 완전히 막아버린 상황이 됐고 자전거는 속도를 충분히 제어할 여유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사고 난 차 옆을 받아버리고 말았다. 자전거에 타고 있던 여자는 달리던 속도에 의해 공중에 붕 떠서 앞으로 날아와 지유와 지오 앞으로 나뒹굴어졌다. 자전거 탄 여자가 앞에 떨어지는 것에 놀란 지유는 뒷걸음 치다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지면서 카페 유리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얼마나 심하게 부딪혔는지 "쿵"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지유는 바닥에 누워 아파하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고, 자전거에서 떨어진 여자는 오른쪽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고 있다. 가로수길이 완전히 아수라장이 됐다.
지오는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여자를 잠시 멍하니 쳐다보다 지유에게 다가갔다. "지유야! 괜찮아?"
"지오야. 머리가 아파." 지유는 힘 없이 말한 후 바로 기절했다.
지오는 주위를 둘러본다. 사고로 도로는 완전히 마비됐다. 다행히 주차장이 건물 뒤에 있어 건물 뒤 도로로 차가 빠져나가기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양팔로 지유를 안고 주차장으로 달려가 지유를 자신의 차 조수석 뒷좌석에 태웠다. 지오는 운전석으로 가서 시동을 걸었다. 출발하려는데 다리를 다쳐 괴로워하는 자전거 그녀가 생각났다. 지오는 잠시 머뭇거리다 차에서 내려 사고가 났던 곳으로 다시 달려갔다. 가로수길 도로는 여전히 양방향으로 꽉 막혀있고 사람들은 사고 난 차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그녀는 한 가로수에 기대앉아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다. 지오는 자전거 그녀를 보자마자 바로 뛰어갔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지오가 물었다.
“다리가 부러졌나 봐요.”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지금 제가 병원 응급실에 가는 길이거든요. 제 차로 병원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네?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앰뷸런스가 곧 오겠죠. 그때까지 기다릴게요. 고맙습니다.”
“여기 도로가 꽉 막혀서 앰뷸런스가 진입하기가 쉽지가 않을 거에요. 저는 어차피 병원 가는 길이에요. 그리고 제 차는 도로 뒤편에 있어서 바로 출발할 수가 있어요. 보니까 크게 넘어지셨는데 가능한 빨리 치료를 받는게 좋을 거 같아요.”
그녀가 지오를 빤히 쳐다본다. “아! 혹시 아까 여의도에서 사진 찍어준 분 아니세요?”
지오가 놀라서 그녀를 유심히 보면서 말한다. “아.. 아! 그분이세요? 맞네요. 어떻게 이런 일이.. 지금 제 여자친구도 병원에 빨리 가야 해서요. 같이 가시죠. 앰뷸런스가 여기 진입하는데도 오래 걸리겠지만 사고가 워낙 커서 수습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릴 거에요. 그러니까 저랑 같이 가요.”
“네. 그럼 신세를 질게요. 안면이 있는 분이시니까 안심이 되네요.”
지오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고 부축해서 주차장까지 갔다. 이동하는 동안 그녀는 다리 통증이 심한지 많이 아파했다. 운전석 뒷좌석에 그녀를 태우고 바로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지유가 눈을 떴다. 초점이 맞지 않은 것처럼 앞이 흐릿하게 보인다. 어떤 두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다. 불투명한 유리창이 앞을 막고 있는 것처럼 보여 얼굴이 식별되지 않는다. 정신까지 혼미하다. 여기가 어디이고 지금 무슨 상황에 놓여있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지유야, 지유야, 괜찮아?”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점점 초점이 맞아 또렷하게 앞이 보이고 두 사람 얼굴의 윤곽도 점점 뚜렷해진다. 엄마와 아빠가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주위를 둘러 본다. 침대에 누워있고 팔에는 링거가 꼽혀있다. 주위에 환자가 누워있는 침대가 많다. 의사와 간호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고 간다. 병원 응급실이다. 머리가 조금 아프다.
“아이고 지유야,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엄마가 지유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한다.
“지유야, 괜찮니?” 아빠가 말했다.
“응. 머리가 조금 아프기는 한데 괜찮은 것 같아. 응급실인가 봐. 나 여기에 왜 있는 거야?”
“기억 안 나? 지오 말에 의하면 교통사고 나는 걸 보고 놀라서 뒤로 넘어지다 머리를 부딪쳤다고 하더라. 그래서 기절했대. 기억 안 나는 거야?” 아빠가 말했다.
“아 맞아. 그랬었지. 얘기 들으니까 기억나. 차 사고가 크게 났었고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이 내 앞에 떨어지면서 내가 놀라서 뒤로 넘어졌어.”
“아이고 다행이네. 다행이야. 기억나는구나.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그러시더라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일 뇌진탕 검사 하자고 하시더라.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다고 걱정하지는 말래. 정말 다행이지 뭐야. 나는 네가 교통사고가 난 줄 알고 얼마나 놀랬다고. 정말 천만 다행이야. 링거만 다 맞으면 집에 가면 될 거 같아.” 엄마가 말했다.
“많이 안 다쳤다니 정말 다행이네. 엄마, 아빠 걱정하지마. 넘어져서 머리가 조금 부딪쳤을 뿐이야. 그나저나 지오는 어디 갔어? 지오가 나 병원에 데리고 온 거 아니야?” 지유가 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맞아. 지오가 데리고 왔어. 너 깨어나기 직전까지 여기 있었어. 지오가 다친 사람 한 명 더 데리고 왔는데 그 사람 보호자랑 잠시 얘기하러 갔어. 걱정하지마. 곧 올 거야.” 엄마가 말했다.
“나 말고 한 명 더 데리고 왔다고?”
“그래 자전거 타다가 사고 난 사람을 지오가 데리고 왔다고 하더라.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딱해서 데려왔나 봐.” 아빠가 말했다.
지오가 다친 사람 한 명을 더 데리고 병원에 왔다는 말에 지유는 기분이 좀 이상하다.
“어! 깨어났네. 지유야 괜찮아?” 지오가 지유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와 물었다.
“응. 난 괜찮아. 의사 선생님도 괜찮다고 했다며. 그런데 어디 갔다 온 거야?”
“혹시 기억나? 사고 날 때 자전거 타던 사람 차에 부딪혀서 다쳤던 거. 그 사람을 아무도 도와주지 않길래 병원 오는 길에 그 사람도 데리고 왔거든. 그 사람 부모님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라고. 그 분들이랑 잠시 얘기하다가 왔어.”
“그 사람은 괜찮아?” 지유가 물었다.
“다리도 많이 다치고, 머리에도 충격을 받았대. 그래서 검사를 해봐야 하나 봐. 우리 덕분에 병원에 빨리 올 수 있었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더라고.”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지유는 자신이 다쳐서 기절한 상황에 지오가 다른 사람까지 신경을 쓰고 병원에 데리고 온 것이 매우 못마땅하다. 링거를 맞는 동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내가 지오를 믿을 수 있을까?’
섭섭하다 못 해 짜증이 몰려오고 화가 난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링거를 다 맞고 병원에서 나왔다. 지유의 아버지는 지오의 어깨를 토닥이며 고맙다는 말을 한다. 어머니도 지오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며 다음에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했다. 지오는 겸손한 태도로 남자친구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부모님은 지오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이다. 다친 여자친구를 병원에 데리고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마운 일이지만 너무 당연한 일이기도 한 거 아닌가? 자신과 함께 그 여자를 도와줬다는 사실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지유는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고 그날 밤 한 숨도 못 잤다.

3개월 후. 지유와 지오는 여전히 예전과 같이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지유는 회사에서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호감을 표시하는 남자의 제안을 못 이기는 척 하면서 주말에 저녁을 함께 먹기로 약속했다.
지오는 신사동 가로수길 근처에 있는 자전거 그녀의 오프라인 가게를 찾아서 우연인 척 들렀다가 주말에 함께 자전거 타기로 약속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상한 가로수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