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는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카페 <Somewhere Deep>에서 친구 신비를 기다리고 있다. 가로수길에 올 때마다 이 카페 앞으로 지나다녔지만, 와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실내 분위기가 매우 고풍스럽다. 이런 분위기의 카페는 오랜만이고 최신 트렌드와 다른 분위기가 오히려 마음에 든다. 로스팅 한지 얼마 안됐는지 카페 안은 커피콩을 볶은 향으로 가득하다. 살짝 탄듯한 고소한 향이 좋다. 스마트폰에서 톡 알림이 울렸다. 지유는 톡을 확인한다. 신비에게서 온 톡이다.
『지유야~ 미안!!! 차가 너무너무 막혀. 15~20분 정도 늦을 것 같아. ㅠㅠ 조금만 기다려줘잉. 미안 미안』
『헉~! 신비 너, 진짜 가만 안 둔다~! ㅎㅎ 나 기다리게 하는 대신 나한테 뭐해 줄래?』
『뽀뽀해줄까??? 히히 ^^;;』
『야! 진짜 주글래??? 오랫동안 못 하고 있는 뽀뽀를 너랑 하고 싶지는 않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어여 와라잉!』
『좀만 기다려. 내가 커피랑 디저트 살게 ^^』
지유는 시간을 확인한다. 7시 17분이다. 적어도 7시 35분은 돼야 신비가 올 거 같다. 신비는 스마트폰으로 SNS에 올라온 사진을 본다. 어떻게 하나같이 즐겁게 지내는 사진만 올리는지 모르겠다. 삶이란 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즐겁지 않은 순간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어찌 보면 즐거운 사진만 올리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지유는 계속 사진을 넘겨보다 모르는 사람의 사진에서 멈췄다.
‘이 사람 누구지? 팔로우한 사람이 아닌데 왜 내 피드에 뜨는 건가?’
어떤 여자가 한강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다 셀카를 찍은 사진이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 유심히 봤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자전거 헬멧에 의류까지 제대로 갖춰 입고 타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랫동안 자전거 타기를 즐겨온 모양새다. 하얀색 헬멧을 쓰고 위에는 밝은 노란색, 아래는 짙은 네이비색 자전거 의류를 입었다. 헬멧 밑의 얼굴 반을 가리는 갈색 빛의 고글을 멋지게 쓰고 있다. 헬멧과 고글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 어떻게 생겼는지 가늠이 잘 안 된다. 그런데 혼자 자전거를 타는 것이 아닌가 보다. 사진 몇 장을 옆으로 넘기니 셀카뿐만 아니라 누군가 찍어준 전신 사진도 있다. 자전거와 함께 멋진 포즈를 취한 사진이다. 사진만으로는 키가 큰지 작은지 잘 모르겠고 자전거를 타서 그런지 몸매는 단단해 보인다. 그 여자 뒤로 석양이 지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해지는 풍경이 예뻐서 사진을 찍은 것 같다.
‘추천 계정이나 홍보 계정인가 보네. 멋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자전거 타는 거 힘들지 않나? 뭐 재미있으니까 타는 거겠지. 그래도 자전거는 내 스타일은 아니야.’
지유는 다시 자신이 팔로우 한 사람들의 사진을 넘겨가면서 본다. 이번에는 눈에 띄는 사진에서 멈췄다. 신비의 사진이다. 사진 속 신비는 멋진 사람들과 멋진 레스토랑에서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먹고 있다.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이고 분위기가 매우 독특하다. 테라스에 큰 나무도 있고 작은 화단도 보인다. 식당 안과 밖의 색감과 조명이 팀 버튼 영화에 나올 법한 동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사진 속 신비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딘가 현실적이지 않고 몽환적이다. 신비는 이런 곳을 어떻게 알고 가는지 모르겠다. 태그를 달아놓은 식당 이름이 <레스토랑 상크튀에르>이다.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식당인가 보다. 지유는 아예 신비의 계정으로 들어가 신비가 최근에 올린 사진들을 본다. 멋진 사람들과 어울리고,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환상적인 장소로 여행 다니는 사진으로 가득하다. 고등학교 친구인 신비는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좋은 학벌에 전문직이며 얼굴도 예쁘고 키도 큰 편이다. 거기다가 관리도 꾸준히 해서 보기 좋게 적당히 날씬하면서 볼륨 있는 몸매를 가졌다. 성격은 쾌활하고 말도 재치 있게 잘한다. 돈도 잘 벌고, 문화적 소양도 풍부하고, 인성까지 좋다. 그런 면면이 신비의 SNS에 다 묻어있다. 제기랄, 생각해보니 어디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완벽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신비는 누가 봐도 매력이 넘치고 화려한 삶을 살고 있다. 지유는 계속해서 신비가 올려놓은 사진을 본다.
‘어떻게 매번 이렇게 좋은 곳만 다닐 수가 있는 건가?’
이때 누군가 지유의 어깨를 툭 친다. "지유야!"
사진을 집중해서 보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누가 부르는 소리에 지유는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으아! 깜짝이야."
카페에 있는 사람들이 지유를 쳐다본다.
신비다. "지유야, 뭘 그렇게 놀래?" 신비가 맞은 편 자리에 앉으면서 말한다.
"아 정말, 야! 놀랬잖아. 이 귀신 같은 년. 인기척이라도 좀 해. 진짜 놀랬다고." 지유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지유는 시간을 확인한다. 7시 22분이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 20분 정도 걸린다며, 5분밖에 안 걸렸네?” 지유가 물었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너한테 연락하고 여기 오는데 20분 정도 걸렸어.”
“그래? 내가 시간을 잘 못 봤나 보네. 기분에도 시간이 얼마 안 지난 거 같은데 말이지. 사진 보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몰랐나 봐. 주차는 어디다 했어?”
“이 건물 뒤에 주차장 있던데 거기다 댔어. 주차장이 붐빌 시간 같은데 이상하게 차가 별로 없더라고 쉽게 주차했어.”
신비는 아메리카노 두 잔과 조각 케이크 두 개를 사서 테이블에 올려 놓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다. 지유도 신비를 따라 사진을 찍는다. 둘이 함께 셀카도 찍는다. 두 사람은 각자의 SNS에 사진을 올리기 바쁘다.
“너 사진 보니까 맨날 좋은 데만 다니더라. 나도 좀 데리고 다녀.” 지유가 커피와 케이크를 먹으며 말했다.
“여기 너랑 같이 왔잖아.” 신비는 카페 안을 둘러본다. “여기도 좋은데. 뭐 특별히 좋은 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사진이 그럴 싸하게 나오는 거뿐이야. 여기 진짜 괜찮다. 모던한 느낌이 아니라 고풍스럽네. 무언가가 다채로운데 평면적이지 않고.” 신비는 카페 이곳 저곳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러니까 말이지. 이 카페 앞으로 매번 지나만 다녔지 와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야. 이렇게 괜찮을 줄 알았으면 진작에 와 볼 걸 그랬어.”
“오늘은 지오 안 만나?” 신비가 물었다.
“지금 일하는 중이야. 일 끝나면 바로 이쪽으로 오기로 했어. 최대한 일찍 끝내고 이리로 오려고 저녁도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사서 대충 때웠나 보더라고.” 지유는 지오가 SNS에 올린 삼각김밥을 먹으며 일하는 사진을 신비에게 보여주었다.
“너 빨리 만나려고 삼각김밥으로 저녁 대충 때우고 일하는 거야? 대단하다. 너희 둘이 사귄 지 얼마나 됐지?”
“대학교 4학년 때 만났으니까 7년 정도 됐네.”
“벌써 그렇게 됐나? 내가 너희 소개시켜 줄 때만 해도 둘이 이렇게 오래 만날지 몰랐어.”
“그러게 만난 지 꽤 됐네. 너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오를 좋아했다면서 왜 나를 소개시켜 준 거야?”
“그거야 지오가 나한테 관심이 전혀 없었고 나를 이성으로도 안 보니까 언제부터 나도 친구로만 생각하게 됐으니까. 그리고 당시에 너희 둘 다 사귀던 사람이랑 헤어지고 괴로워하길래 만나게 해줬는데 바로 사귀더라고. 그렇게 빨리 가까워 질 줄 몰랐어.”
“지오는 너처럼 괜찮은 애를 왜 이성으로 못 느꼈을까?”
“음.. 글쎄. 너무 어릴 때부터 봐서 일 수도 있고. 내가 초등학교 때는 진짜 인기가 없었거든. 아마 그 기억이 남아 있어서 그럴 수도 있어. 궁금하면 네 남자 친구한테 직접 물어 봐. 내가 지오 속을 어떻게 알겠어.”
“넌 어렸을 때도 예뻤을 것 같은데.”
신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니야. 전혀 안 예뻤어. 그나저나 너희는 만난 지 7년이나 됐는데 결혼 안 해?”
“결혼? 언젠가 하겠지. 아직 결혼 얘기가 오고 가지는 않아.”
“그렇구나. 할 때도 됐다 싶어서 물어 봤어.”
“그런데 신비야,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뭔데?”
”있잖아. 요즘 우리 회사에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어.”
신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유에게 묻는다. “정말? 어떤 사람이야?”
“옆 부서 사람인데 능력도 있고 여러 가지로 괜찮은 사람이야. 나한테 자꾸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서 차 마시자, 밥 먹자고 그래. 그것뿐만 아니라 일로도 어떻게든 나랑 엮어 보려고 그러고.”
“그 사람이 너 남자 친구 있는 것도 알고 있어?”
지유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당연히 알지.”
신비가 매우 진지하게 말한다. “음.. 나한테까지 말하는 거 보면 너 지금 흔들리고 있는 게 분명한데. 맞지?”
“아니야. 흔들리는 건 아니야.”
“내가 볼 때는 조금 흔들리거나 너도 관심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네가 전혀 관심도 없고 흔들리지도 않으면 나한테 말할 이유가 없잖아?”
“그렇다기 보다. 누가 나 좋다고 하니까 설레. 그런 거 있잖아. 괜히 설레고 내가 매력 있다는 걸 확인 할 수 있어서 기분 좋고 그런 거. 뭐.. 그 정도야.”
“내가 볼 때는 단순히 설레는 것만은 아닌데. 너도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게 분명한데. 그 남자 꽤 괜찮나 보다?”
“괜찮은 사람이기는 한데 네 말처럼 그런 건 진짜 아니야.”
“거 봐. 너도 괜찮게 생각하기는 하네. 궁금하면 밥이라도 한번 같이 먹어봐.”
“어떻게 그래? 지오는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오늘도 나 빨리 보러 온다고 삼각김밥만 먹고 일하고 있잖아.”
“그냥 밥 정도 먹을 수 있는 거잖아. 밥 한 번 같이 먹는다고 어떻게 되냐?”
“그래도 그건 아닌 거 같아.” 지유가 고개를 흔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설렌다면서, 괜찮아 보인다면서? 뭐가 두려운 거야? 밥도 같이 먹고 하다 보면 진짜 좋아질까 봐? 그러면 왜 안돼?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너도 관심이 있으니까 나한테 말을 했을 거잖아. 지유야,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해.”
“아니야. 그런 거 아니래도. 지오랑 오래 만나기도 했고 누군가가 됐든 나한테 호감을 보이면 기분 좋은 일이잖아. 딱 그 정도야. 진짜 설렘은 아니야.”
신비는 남은 마지막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면서 말한다. “야! 설레면 설레는 거 맞는 거야. 진짜 설렘이 아니라 건 무슨 개소리야. 하여간 소심하기는. 내가 볼 때 너도 관심이 아주 없지는 않은데 말이지.”
지유가 화제를 바꾼다. “그러고 보니 우리 꽤 오랜만에 만나는 거다. 너는 연애 안 하냐? 최근에 소개팅 안 했어?”
“한 달 전인가 했는데 그냥 그랬어.”
“하여간 까다로워 가지고. 그래 너는 까다로울 만도 하다.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으니.”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너라도 까다로울 것 같아.”
신비가 발끈한다.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자꾸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너를 잘 아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우리가 얼마나 붙어 다녔냐? 최근에 일하느라 바빠서 자주 못 봐서 그렇지.”
“야, 알기는 네가 뭘 알아? 나도 내 자신을 잘 모르겠는데, 네가 나를 어떻게 잘 안다는 거야?”
이때 지유의 스마트폰 톡 알림이 울렸다. 서둘러 톡을 확인한다.
지유가 환한 표정으로 말한다. “지오다. 곧 도착한다고 하네.”
“지오, 지금 온데? 그럼 나는 이만 일어 날게.”
“뭐, 벌써 들어간다고? 지오 오는데 오랜만에 같이 얘기도 하고 그러자. 아님 어디 가서 술 한 잔 하던가.”
“아니야. 나 사실 속이 좀 안 좋아. 그래서 일찍 들어가려고.”
“속 안 좋은 애가 커피랑 케이크는 잘만 먹던데?”
“진짜 속이 안 좋아. 오늘 약속 취소할까도 했었는데 우리 못 본지 오래 됐잖아. 네 얼굴 보려고 온 거야. 지오는 다음에 보면 되니까 오늘은 이만 들어갈게.”
“그러게 안색이 갑자기 안 좋아 보이기는 하네. 할 수 없지. 그럼 먼저 들어가. 운전할 수 있겠어?” 지유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럼 걱정하지마. 운전 못 할 정도로 심한 건 아니야. 어쨌든 지유야, 미안해. 오늘은 먼저 들어갈게.”
“오랜만에 봤는데 아쉽네. 조만간 보자.”
신비는 손을 가볍게 흔들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떴다. 지유는 카페 유리문을 밀고 나가는 신비의 뒷모습을 본다. 그런데 신비가 카페 밖에서 누군가를 만난 것 같다. 멀어서 누구인지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지오를 만난 게 아닌가 싶다. 잘은 안 보이지만 키와 체형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지오가 맞는 것 같다. 두 사람은 한참을 얘기한다. 지유는 어릴 적 친구끼리 오랜만에 만나 할 얘기가 많은가 보다라고 생각을 하고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며 지오가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지유야!” 지오가 가볍게 지유의 머리를 만진다.
지유는 고개를 들고 신비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 지오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왔어? 야근하느라 고생했어.”
“자주 있는 일인데 고생이랄 것도 없지 뭐. 나한테는 익숙한 일이야.”
“우리 자리 옮길까?” 지유가 물었다.
“오늘은 피곤해서 그냥 여기 있다가 일찍 들어가는 게 어떨까?”
“많이 피곤하구나. 그렇게 하자. 나는 아무래도 상관 없어.” 지유가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
지오는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해 왔다.
“그런데 신비는 갔어?”
지유가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신비 갔잖아. 들어오기 전에 카페 앞에서 신비 못 봤어?”
“카페 앞에서? 못 봤는데. 나 들어오기 직전에 간 거야?”
“응. 신비가 카페 밖에서 누구를 만나서 얘기하길래 나는 당연히 그 사람이 너라고 생각했지. 멀어서 잘 안 보이기는 했는데 키도 그렇고 체형도 너랑 비슷한 거 같았는데. 지금 네가 입은 옷이랑도 비슷했던 것 같고.” 지유는 긴가민가하면서 말했다.
“나는 아닌데. 다른 사람을 나로 잘 못 봤나 봐.”
“아무리 멀어도 내가 널 못 알아 볼 리가 없는데 이상하네. 그렇지 않아?”
“그렇기는 한데 그럴 수도 있지.” 지오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오늘 회사에서 갑자기 바쁜 일 생겼어? 점심 때까지만 해도 일찍 퇴근할 수 있다고 했잖아."
"오늘이 우리 상무가 3주 정도 해외 출장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거든. 3시 정도에 인천공항에 떨어진 것 같더라고. 그랬으면 바로 집으로 가면 될 것을 사무실로 들어온 거 있지."
"와, 정말 대단하다. 3주나 해외출장 갔다 오면 많이 피곤할 텐데 굳이 사무실로 들어오다니. 대기업 임원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구나."
"사무실에 오자마자 부장들 싹 불러서 회의를 하더라고. 회의가 한 5시 조금 넘어서 끝났나? 아무튼 회의 끝나자마자 숙제가 떨어졌지 뭐야. 내일 11시까지 각 시장별 실질적인 하반기 예상 수요를 자료로 만들어서 보고하라는 거지. 사실 이게 몇 시간 만에 만들 수 있는 자료는 아니거든. 그래도 빨리 끝내고 지유 만나려고 미친 듯이 자료 찾고, 폴란드 법인에 전화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잽싸게 만들었어. 나 잘했지?"
"하하. 그래 잘했어. 갑자기 퇴근 직전에 보고서는 무슨 보고서래? 내일 오전까지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갑자기 시켜서 짜증 나겠다."
지오가 웃으면서 말한다. "괜찮아.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뭘. 그래도 오늘은 폴란드 법인이 바쁘지도 않고 협조적이어서 빨리 끝낸 편이야. 예전에는 밤새 보고서 만들었는데 상무가 술 먹고 다음날 출근 안 한적도 있어. 그런 적도 있었는걸."
"말도 안 돼. 어쨌든 오늘 수고 많았어." 지유가 지오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지오는 지유를 보며 말없이 웃는다.
“그런데 지오야, 저녁으로 삼각김밥만 먹었는데 배 안 고파? 디저트라도 좀 먹는 건 어때?”
“아니야. 커피면 돼. 오늘 낮에도 많이 바빠서 점심을 엄청 늦게 먹었거든. 그래서 삼각김밥 먹은 걸로도 충분해. 별로 배 안고파.”
“그래도 밤 늦게 배고플 수도 있을 텐데. 그런데 얼굴이 진짜 좀 피곤해 보이기는 한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는 게 낫겠다. 이렇게 얼굴 본 건만도 어디야.”
지오가 웃으면서 말한다. “그래 보여? 일찍 퇴근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 떨어져서 스트레스 받았나 봐. 그리고 빨리 끝내려고 완전 집중하면서 일했거든. 그럼 오늘은 이만 일어나자. 내일 금요일이니까 우리 내일 만나서 편하게 맛있는 것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그러자. 그래도 지유 얼굴 보니까 피곤이 좀 풀리는 것 같아.”
“하하. 다행이네.”
지유와 지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출입문으로 걸어간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분명히 저 출입문 밖에서 너랑 신비랑 얘기하는 걸 본 것 같은데.” 지유가 말했다.
“잘 못 본 거 같은데. 난 신비 그림자도 못 봤어.”
“이상하네. 내가 무언가에 홀렸었나?”
“에이, 홀리기는.. 나도 그럴 때 가끔 있어. 다른데 집중하다 보면 무언가를 잘 못 보거나 착각하는 경우 엄청 많지.”
지유와 지오가 카페를 나왔다.
“아, 그리고 우리 회사 사람이 신용산 근처에 괜찮은 맛집이 있다고 하더라고. 내일 거기 한번 가보자.” 지오가 말했다.
“그래? 나야 좋지.”
“맛집을 정말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거든. 그 사람 말로는 신용산 주변에 은근히 맛집이 많다고 하더라고”
“신용산 주변에? 전혀 몰랐네. 친한 사람이야?”
“응. 김선호 선임이라고 최근에 같이 일하면서 친해졌어.”
“그렇구나. 그 분한테 다 알려달라고 해. 우리 신용산에 있는 맛있는 식당 하나도 빼지 않고 다 가보자.”
“그래. 알았어.” 지오가 지유를 보며 웃으면서 말했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건물 뒤 주차장으로 걸어간다.
이때 뒤에서 자동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스팔트 바닥에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끼이이이이익”하는 마찰음이 너무 커서 도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
자동차 급정거하는 소리에 놀란 지유와 지오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양방향 모두 1차선인 가로수길 도로에 지유와 지오가 걸어가는 건너편 차도에서 달리던 자동차 한 대가 중앙선을 침범했다가 급정거를 하는 동시에 원래 차선으로 방향을 돌리는 과정에서 뒤따라 오는 차와 충돌했다. 마침 반대편 차선에서 달리던 자동차는 중앙선을 침범한 차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급하게 꺾으면서 급정거를 하였고 달리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보도블록 위의 가로수를 강하게 들이받았다. 가로수를 받은 차 뒤로는 어떤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앞차가 90도 가까이 방향을 틀어 가로수에 부딪히는 바람에 차체가 가로로 도로를 완전히 막아버린 상황이 됐고 자전거는 속도를 충분히 제어할 여유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사고 난 차 옆을 받아버리고 말았다. 자전거에 타고 있던 여자는 달리던 속도에 의해 공중에 붕 떠서 앞으로 날아와 지유와 지오 앞으로 나뒹굴어졌다. 자전거 탄 여자가 앞에 떨어지는 것에 놀란 지유는 뒷걸음 치다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지면서 카페 유리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얼마나 심하게 부딪혔는지 "쿵"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지유는 바닥에 누워 아파하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고, 자전거에서 떨어진 여자는 오른쪽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고 있다. 가로수길이 완전히 아수라장이 됐다.
지오는 넘어진 지유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지유야! 괜찮아?"
"지오야. 머리가 아파." 지유는 힘 없이 말한 후 바로 기절했다.
지오는 주위를 둘러본다. 사고로 도로는 완전히 마비됐다. 다행히 주차장이 건물 뒤에 있어 건물 뒤 도로로 차가 빠져나가기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양팔로 지유를 안고 주차장으로 달려가 지유를 자신의 차 조수석 뒷좌석에 태웠다. 차를 몰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지유가 눈을 떴다. 초점이 맞지 않은 것처럼 앞이 흐릿하게 보인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 불투명한 유리창이 앞을 막고 있는 것처럼 보여 얼굴이 식별되지 않는다. 정신까지 혼미하다. 여기가 어디이고 지금 무슨 상황에 놓여있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지유야, 지유야, 괜찮아?”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점점 초점이 맞아 또렷하게 앞이 보이고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도 점점 윤곽이 뚜렷해진다. 지오가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주위를 둘러 본다. 침대에 누워있고 팔에는 링거가 꼽혀있다. 주위에 환자가 누워있는 침대가 많다. 의사와 간호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고 간다. 병원 응급실이다. 가로수길 카페에서 나오다 교통사고가 나는 걸 목격했고 뒤로 넘어진 것이 기억났다. 머리가 조금 아프다.
지오가 지유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한다. “지유야, 정신이 들어?”
“응. 머리가 조금 아프기는 하는데 괜찮은 것 같아. 응급실인가 봐?”
“맞아. 응급실이야. 기억날지 모르겠는데 우리 바로 앞에서 교통사고 나는 걸 목격하고 놀라서 뒤로 넘어졌고 그때 머리를 부딪치면서 기절 했어. 바로 병원으로 왔어.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셨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일 뇌진탕 검사 하자고 하시더라고.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다고 걱정하지는 말래. 링거만 다 맞으면 집에 가도 될 거 같아.”
“사고 난 거 기억나. 많이 안 다쳤다니 다행이네.”
“부모님께는 내가 전화 드렸어. 응급실 오시면 너무 놀라실 것 같아서 안 오셔도 괜찮다고 간단하게 치료받고 집에 바래다 주겠다고 말씀 드렸어. 걱정 안 하시게 내가 잘 얘기했어.”
지유는 지오를 보면 눈웃음을 짓는다. “그랬구나. 고마워.”
지유는 지오의 잡고 있는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자신의 옆에 있는 지오를 보니 따뜻하고 든든한 마음이 든다. 갑자기 지오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회사에서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한 사람에게 흔들리고 설렜던 게 너무 미안하다. 이런 미안한 마음은 살면서 처음 느껴본다. 만나는 사람이 있어도 누군가에게 설레는 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사실을 지유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한 감정이 지유의 마음을 계속 지배했고 알 수 없는 죄책감마저 몰려왔다.
링거를 다 맞고 병원에서 나왔다. 지오는 지유를 반포동 집에 데려다 주었다.
3개월 후. 지유와 지오는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상견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