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호와 수지가 진료실에 마주 앉아있다.
“선생님, 5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약을 복용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 5년 약의 효과를 톡톡히 봤습니다. 자신감이 올라가고 제 자신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진도가 안 나가던 시나리오도 술술 써졌습니다.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모두 흥행에 성공했고 평단의 호평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염원하는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수상은 고사하고 영화제에서 초청조차 못 받았죠. 저의 심리상태는 5년 전으로 돌아갔어요. 자신감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고요. 다시 시나리오를 쓸 수 없게 됐습니다. 약을 먹고 있는데도 말이죠.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태호가 말했다.
“이해가 안 되네요. 아무리 쓰려고 해도 안 써지던 시나리오도 쓰게 됐고 그 이후로 짧은 기간에 영화를 세 편이나 만들었어요. 모두 흥행에 성공도 했고요, 좋은 평도 받았어요. 전부는 아니더라도 원하는 것을 많이 이루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죠?”
“더 창의적이고 더 예술적인 영화를 만들어야 해요.”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요?”
“아니에요. 그랬으면 해외영화제에 초청 받지 못 했을 리가 없죠.”
“감독님은 영화를 만드는 목적이 해외영화제에서 초청 받고 수상하는 것인가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태호의 눈빛이 흔들린다. “당연히 그게 목적이지는 않죠.”
“그럼 제가 볼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요. 감독님, 지금 잘하고 계신 거에요.”
“선생님, 아니에요. 선생님께서는 창작을 해보지 않아서 이해를 못 하시겠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저는 여기서 멈출 수 없어요. 더 좋은, 더 인정 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해요. 선생님! 지금 먹는 약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요. 5년 동안 더 좋은 약이 개발되지는 않았나요? 창의력을 끌어올리는 약은 없나요?”
수지는 날카로운 눈매로 태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창의력을 올려주는 약이요? 감독님, 세상에 그런 약은 없어요.”
태호는 실망한 기색으로 말한다. “그럼 선생님, 지금 복용하는 약의 양을 늘리면 어떨까요? 자신감이 더 늘어나면 그만큼 창의력도 높아지지 않을까요? 약을 두 배로 복용하면 창의력도 두 배가 될 것 같은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감독님처럼 6년 동안 약을 복용한 사람은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보통은 6개월, 길어야 1년이었어요. 너무 오래 복용했습니다. 이제 약을 중단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안 돼요. 선생님, 절대 안 돼요. 저는 확실히 약의 효과를 봤습니다. 약을 복용하고 한 달 후부터 자신감이 넘치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약을 중단하면 더 이상 영화를 못 만들지도 몰라요.” 태호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수지가 말을 하다 머뭇거린다.
“사실 뭐요? 선생님 사실 창의력을 높여주는 약이 있다는 건가요?”
“사실 자신감이 생기게 해주는 약도 없습니다. 6년동안 감독님이 드셨던 약에는 자신감을 생기게 하는 효능이 없어요.”
태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선생님, 그게 무슨 말이죠? 자신감을 생기게 하는 약이 없다니.. 제가 잘 못 들은 거죠?”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 그런 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도 안돼요. 저는 분명 효과가 있었단 말이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 약을 먹고 자신감이 올라 갔고 시나리오도 쓸 수 있게 됐단 말이에요.”
“죄송합니다. 그 약에는 그런 효능이 없습니다.”
“그럼 제가 5년 동안 복용한 건 뭔가요?”
“아무런 효과도 없고 몸에 유해하지 않은 위약 같은 거에요.”
“그럼 그 약을 먹고 자신감이 생긴 건 어떻게 설명하죠?”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위약 효과일 수도 있고, 그 동안 많은 고민 끝에 스스로 만족할 만한 아이디어가 나온 것일 수도 있죠.”
“말도 안돼요. 그 약이 가짜였다니.. 그렇다면 저를 또 속이고 창의력을 높이는 약이라고 처방해 주실 수도 있었잖아요! 위약 효과라도 볼 수 있게 말이죠.” 태호가 격앙되게 말했다.
“그렇다고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고 더 뛰어난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겠죠. 그렇다고 그게 창의력이 생기는 약이라고 믿고 먹은 효과는 아닐 거에요.”
“아아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영화를 다시 만들 수 없을 수도 있어요.” 태호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치 세상이 끝난 것 같은 표정이다. 태호의 표정을 보고 수지는 생각에 잠긴다. 태호는 말 없이 수지를 바라본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이상한 적막이 흐른다. 수지는 책상 서랍에서 외장하드 하나를 꺼냈다. 외장 하드를 책상 위 노트북에 연결한다.
“감독님, 이거 좀 보세요.” 수지는 노트북 화면을 태호의 방향으로 돌리며 말했다.
화면에 떠있는 외장하드 폴더에는 수 많은 PDF 파일이 있다.
“도대체 이게 뭐에요?” 태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동안 제가 썼던 영화 평론이에요.”
“영화평론이요? 선생님께서 영화평도 쓰세요?”
“혹시 영화평론가 중에 지인랑이라고 아세요?”
태호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수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럼요. 당연히 알죠. 설마 선생님이.. 에이 아니죠?”
“네 맞아요. 제가 지인랑이에요.”
태호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한다. 그냥 수지의 얼굴만 바라본다.
수지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놀라셨죠? 제가 지인랑이라는 걸 아무한테도 밝히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감독님이 주신 이메일에 답장도 안 했던 거고요.”
“왜.. 도대체 왜 제 영화에 대한 태도를 바꾼 거죠?” 태호가 물었다.
“태도를 바꾼 게 아니라 제가 본대로 평을 썼을 뿐이에요.”
“그렇죠. 태도를 바꾼 건 아니죠. 선생님이 처방해주신 약을 복용하고 만든 세 편은 왜 안 좋아하는 거에요?”
수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한다. “음.. 재미가 없어요.”
“재미가 없다고요?”
“영화가 너무 선명해요. 너무 선명해서 재미가 없어요. 최근에 연출한 세 편은 누구나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영화에요. 너무 선명해서 관객 입장에서 전혀 생각할 여지가 없어요. 보이는 게 전부이거든요. 두 번째 봤을 때 전혀 새로운 걸 발견할 수 없었어요. 감독님이 만든 처음 세 편은 장르의 규칙을 따르면서도 중간 중간에 예상치 못하게 장르 밖으로 튀어나가는 순간이 있어요. 그 순간은 영화를 따라가던 관객을 완전히 소외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그 효과는 관객으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하고 생각하게 만들죠. 최근 세 편의 영화에서는 이런 재미가 전혀 없어요. 미학적으로 스타일이 진일보했다는 평도 있던데 얼핏 그렇게 보이는 거에는 저도 동의해요. 하지만 그 스타일만 가지고 영화가 좋아지지는 않죠.”
태호는 수지의 말을 듣고 머리 속이 하얘졌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또 보고 나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거군요. 충격적이네요.”
“네 맞아요. 지나치게 관객과 평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다 보니 영화에서 감독님만의 개성이 녹아 들어간 이미지가 사라졌어요. 이미지는 증발하고 선명한 줄거리만 남아 있어요. 감독님! 자신감이 바닥이라고 해서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감이 넘쳐흐른다고 해서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닌 거 같아요. 자신감 보다는 생각을 멈추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지인랑 평론가를 만나면 무언가를 얻을 줄 알았어요.”
“감독님, 저는 예술은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미가 있어야 해요! 우리의 뼛속을 파고들고, 내장을 뒤집어 놓고, 뇌 신경을 마비시키고, 온 몸을 전율로 휘감는 시각적, 청각적 황홀함을 주는 쾌감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런 재미는 궁금증과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하는 거고요. 저는 감독님의 일곱 번째 영화를 보고 오르가즘을 느끼고 싶어요.”
“선생님 얘기를 들으니 더 이상 약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태호는 진료실에서 나왔다.
태호는 양재천에 조깅을 하러 왔다. 지난 5년 동안 조깅할 때는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코스를 같은 방향으로 뛰었다. 왜 그랬는지 이번에는 같은 시간에 같은 코스를 반대 방향으로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호는 평소와 다르게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같은 길을 반대 방향으로 뛰고 있을 뿐인데 낯설고 새롭게 느껴진다. 평소와 해가 떨어지는 방향이 달라졌다. 오른쪽에 있던 것은 왼쪽에 있고, 왼쪽에 있던 것은 오른쪽에 있다. 내리막은 오르막이고, 오르막은 내리막이 됐다. 아주 작은 변화가 커다란 낯섦으로 다가온다. 태호는 그 동안 조깅을 마치면 바로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조깅을 마치고 처음으로 양재천을 자세히 둘러본다. 양재천에 이렇게 다양한 꽃과 나무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도심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새가 날아다니고 꽃의 꿀을 따기 위해 쉴새 없이 날갯짓을 하는 벌새도 있다. 천 안에는 새끼 손가락만한 물고기도 있고 팔뚝만한 잉어도 살고 있다. 단란해 보이는 귀여운 오리 가족도 살고 있고, 본심을 숨긴 채 고고한 척 홀로 서있는 왜가리도 눈에 띈다. 폭이 좁은 양재천에 이런 다양함이 있다니 놀랍다.
태호는 조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했다. 노트북을 들고 집 근처 조용한 카페로 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다. 마음이 평화롭다. 이런 평화로움을 느껴본 게 언제인가 싶다. 일곱 번째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딱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시나리오가 술술 써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러던 와중 카페 안에 비틀스의 <Get back>이 나온다. 카페에서 들은 많은 노래 중 유독 <Get back>이 귀에 꽂힌다. 태호는 시나리오 쓰기를 멈추고 음악을 감상한다.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유쾌하게 이러 저리 흘러 다니고 태호는 거기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들며 <Get back>을 즐긴다. 노래를 듣고 있다 보니 태호는 비틀스가 왜 이렇게 알 수 없는 가사를 썼는지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