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화감독의 매너리즘 탈출기 2

by 킥더드림

다음날 태호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혜지가 추천한 병원이 있는 건물 앞에 서있다. 건물 한 쪽 벽면에 입주한 업체들을 알려주는 작은 간판이 있다. 매끄러운 글씨체로 <3F 환상적인 정신건강의학과의원>이라고 쓰여있는 것이 보인다. 병원은 건물 3층 전체를 쓰고 있나 보다.
태호는 3층을 올려다 본다. '여기가 자신감을 올려주는 약을 처방해주는 곳이란 말이지? 혜지가 효과를 봤다고 하니까 사실이겠지.'
태호는 3층으로 올라가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 안을 둘러본다. 실내는 모던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다. 소파에 앉아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고 간호사들은 이리저리 바쁘게 왔다 갔다 한다. 여느 강남의 다른 병원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조금 특별한 병원이겠거니 한 생각은 그저 태호의 선입견에 불과했다. 태호는 접수처로 갔다.
"처음 오셨어요?" 접수원이 건조하게 묻는다.
"네 처음 왔습니다. 그런데 저.. 저는 강혜지씨 소개로 왔거든요.”
“누구요?” 접수원이 모니터를 보며 물었다.
“배우 강혜지씨 말하는 겁니다."
태호의 말에 모니터만 보던 접수원은 가늘고 날카로운 눈매로 태호를 쳐다본다. "아! 그러세요. VIP 추천이시군요. 잠시만요."
접수원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비밀스럽게 작은 소리로 얘기한다. 잠시 후 멋진 정장 차림의 여성이 나타나 태호를 어떤 방으로 안내했다. 방은 매우 고급스러워 보이는 벽지로 꾸며져 있다. 한 쪽에 엔틱한 소파와 테이블이 있고 테이블 위에는 최신호 패션잡지가 놓여있다. 태호는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여성이 명함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오진 실장입니다.”
“오진?” 태호는 명함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아차 싶었다. 하지만 실장은 못 들은 척 말을 이어간다.
“강혜지 배우님 소개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지금 진료 중이세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뵐 수 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간단한 개인정보 작성 부탁 드립니다. 차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커피와 차가 종류별로 다양하게 있습니다." 실장은 개인정보 카드와 볼펜을 태호에게 건넸다.
"그냥 물 한 잔 부탁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태호는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의 이름이 오진이라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 중 오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의사가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 스마트폰를 꺼내 메모해 둔다. 잠시 기다린 후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 책상에 하얀색 가운을 입은 여자 의사가 허리를 꼿꼿하게 바로 세우고 앉아있다. 책상 위에 있는 명패에 <원장 이수지>라고 적혀있다. 헤어스타일은 머리카락 끝을 자로 대고 자른 듯한 턱 밑보다 조금 아래로 내려오는 칼단발이며, 앙다물고 있는 입술 모양에 옆으로 긴 눈매는 날카롭기까지 하여 빈틈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인상이다. 수지는 진료실로 들어오는 태호를 빤히 쳐다본다. 태호는 수지가 자신을 무표정하게 너무 빤히 쳐다봐서 민망하다. 수지는 갑자기 옅은 미소를 짓는다. 웃으니 눈가에 매우 가는 주름이 졌다. 웃는 모습과 눈가에 진 주름이 그나마 인상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윤태호 감독님.. 맞으시죠?” 수지가 물었다.
“네 맞습니다. 저를 어떻게 아시죠?”
“영화에 관심이 많아요. 감독님 영화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알고 있습니다. 만나 봬서 영광이네요.”
태호가 쑥스러워한다. “아유, 감사합니다. 제 영화를 봤더라도 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보통 배우를 기억하지 감독은 잘 모르잖아요. 혹시 혜지가 미리 알려드린 거 아니에요?”
“하하. 아니에요. 원래부터 감독님 얼굴 알고 있었어요. 정말 감독님 영화 세 편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죠?”
“네.. 그게 혜지한테 듣기로..”
태호는 자신의 고민과 힘든 상황에 대해서 수지에게 자세히 말했다.
“흥행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전작보다 훨씬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계시네요.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시나리오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는다고 본인 스스로 생각하고 있고 자신감은 점점 떨어져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있고요. 우선 자신감부터 회복하고 싶은 거군요?”
“맞습니다, 선생님. 혜지가 선생님께서 처방해주신 약을 먹고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후로 자신을 믿게 됐고 안 되던 연기도 잘 되기 시작했다고.”
“자신감이 생기는 약은 저희 병원 부설연구소에서 직접 개발하고 제조하고 있습니다. 매우 특별한 약이죠.”
“아! 네!”
수지의 흐트러짐 없는 외모와 다부지고 명확한 말투는 신뢰성을 높이는 힘이 있다. 그 분위기에 홀려 남아있는 일말의 의심조차 사라졌다.
“자신감이 회복되면 아무래도 자기 확신이 생기기 때문에 막혀있던 시나리오 작성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우선 한 달 치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시나리오 쓴다고 책상에만 앉아있지 마시고 몸을 많이 움직여 주는 게 훨씬 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어요. 가령 청소를 한다든지 아니면 조깅, 줄넘기, 테니스 같은 운동이든지 무엇이 됐든 몸을 많이 움직여 주세요. 움직이는 게 뇌에 많은 자극을 주거든요. 혹시 술을 많이 드신다면 가급적 줄이는 게 좋습니다. 약은 하루에 한 알만 복용하시면 되고요. 그 이상 복용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으니 주의하세요. 그럼 한 달 후에 뵐게요.” 수지가 말했다.
태호는 진료실을 나왔고 유오진 실장의 안내에 따라 계산을 하고 약을 받았다. 약값은 꽤 비쌌다. 아무래도 이 병원에만 있는 유일한 약이다 보니 비쌀 수 밖에 없겠거니 했다.

태호는 집으로 돌아 오자마자 약부터 먹었다. 당장 자신감이 생기리라는 기대감은 없다. 집안을 둘러본다.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유심히 보니 구석구석이 완전 엉망이다. 집 전체를 청소하고 너저분하게 있는 짐과 옷들도 깔끔히 정리했다. 청소를 마치고 나니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됐다. 의사의 조언대로 규칙적으로 조깅을 하기로 한다. 시나리오가 완성될 때까지 술도 끊을 것이다. 온전히 시나리오 쓰기에만 집중하기로 다짐한다. 좋은 영화만 만들 수 있다면 무엇을 못한단 말인가?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지 3일째 되는 날 태호는 집 근처 양재천에서 조깅을 하고 있다. 집 주변에 이렇게 조깅하기 좋은 곳이 있는 줄 몰랐다. 많은 사람들이 걷고, 뛰고, 자전거를 타며 오고 간다. 한참 달리고 있는데 혜지로부터 전화가 온다. 뛰는 것을 멈추고 가뿐 숨을 몰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헉헉헉.”
“감독님, 뭐 하세요? 운동 중이세요?”
“응. 혜지구나. 지금 조깅하는 중이야.”
“그렇구나. 감독님, 병원 다녀오셨다면서요?”
“그럼 다녀왔지.”
“약 드시고 계세요?”
“당연히 먹고 있지. 비싼 돈 주고 샀는데 믿고 먹어 봐야지. 이제 3일 밖에 안돼서 효과는 아직이야.”
“3일만에 효과가 생기지는 않고요. 저는 2주 정도 후부터 서서히 효과를 봤던 것 같아요. 그럼 조깅 계속하시고요. 감독님, 그리고 우리 다음주에 밥 한번 먹어요.”
“좋지.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자. 다음주에 보자.”

태호는 혜지보다 늦게 3주 후부터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말로 어디서부터 나오는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약통 안에 복용 중인 약을 하나 꺼내 유심히 살펴본다. 새끼손톱 만한 크기의 평범해 보이는 알약이다.
‘정말 이 약을 먹고부터 자신감이 생겼단 말인가?’
어느 순간부터 시나리오가 술술 써지기 시작했고 자신의 이야기에 확신도 들었다. 관객도 평단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다. 해외영화제 공식경쟁부문에 초청도 받고 수상도 할 수 있다는 믿음도 생겼다. 태호는 쉴 틈 없이 시나리오를 써나갔다. 약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챙겨 먹는다. 매일 조깅도 빼먹지 않고 한다. 먹고, 자고, 뛰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롯이 시나리오 쓰기에만 몰입한다. 시나리오를 한 달 만에 다 썼고 한 달 정도 고민하면서 수정했다. 일 년이 지나도록 단 한 장도 제대로 못 썼던 시나리오를 불과 2개월 만에 완성했다. 마음에 든다. 태호는 이렇게 단기간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약을 복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태호는 완성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제작자를 만났다. 제작사 측은 시나리오가 아주 잘 나왔다며 매우 만족해 했다. 일정 기간 숙고 기간을 거쳐 영화를 제작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촬영 스태프를 꾸렸고 배우도 캐스팅 했다. 혜지가 주인공이고 남자 주인공도 인기배우로 캐스팅 됐다. 꽤 큰 금액의 투자도 받았다. 시나리오가 좋다고 다 영화화 되는 것도 아니고 제작 결정이 나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로 좌초되는 경우도 많다. 태호의 이번 영화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잘 맞아 떨어져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프리프로덕션 포함 크랭크업까지 1년 정도 걸렸다. 태호는 편집하면서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보니 마음에 든다. 영화가 개봉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다음 작품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자신감이 생기는 약은 계속 복용했고 이번에도 시나리를는 막힘 없이 술술 써내려 갔다. 이렇게 태호는 두 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고 5년 동안 총 세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세 편 모두 크게 흥행에 성공했고 초기 세 편에 호의적이지 않던 평단들의 반응은 완전히 돌아서서 호평 일색이었다. 바라던 대로 흥행과 평단의 평가 둘 다 붙잡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태호는 세 편의 영화의 결과에 대해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 자신이 가장 원했던 해외 유수 영화제에 셋 중 단 한 편도 수상은커녕 초청도 받지 못 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자신을 그렇게 혹평하던 평론가들을 다 돌려세웠지만 해외영화제에서는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태호는 자신의 기대대로 되지 않은 것에 너무 화가 났다. 어떻게 해야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모든 평론가들이 태호의 영화를 안 좋게 평을 할 때 유일하게 호평한 지인랑 평론가가 최근 세편에 모두 혹평했다는 사실이다. 태호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 사람이라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떻게든 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통해 필명으로 활동하는 지인랑 평론가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그런데 영화 잡지나 평론지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영화 평론가들도 그가 누군지 모른다. 지인랑은 원고는 철저하게 이메일을 통해서만 주고받고 업무 외의 내용은 일절 소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영화계에서 지인랑 평론가를 직접 만나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태호는 그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 자신을 소개하고 만나고 싶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어떠한 답도 받지 못했다.
‘해외영화제에서 내 영화가 왜 먹히지 않을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도대체 왜? 왠지 지인랑 평론가는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만날 방법은 없고.. 어떻게 해야 하지?’
태호는 5년 전과 똑같은 실의에 빠졌다. 시나리오가 써지지 않고 아이디어가 다시 고갈됐다. 5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신감이 생기는 약을 꾸준히 복용했다. 오늘도 복용했다. 이제는 이 약만으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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