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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Jan 10. 2024

외할머니

핵분열과 외할머니와의 공통점

 사랑은 핵분열이다. 우라늄에 중성자 하나를 충돌시키면 중성자 2개로 분열한다. 쪼개진 중성자는 우라늄과 결합하여 또다시 중성자를 만들어낸다. 우라늄이 있는 한, 계속해서 중성자를 만들어내며 고온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사랑은 주는 만큼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다시 쪼개져 에너지를 발산한다. 상대방이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사랑을 만들어낼 수 있다. 주는 만큼 돌려받기를 원하는 것은 계약관계이지, 사랑이 아니다.

 나의 외할머니는 나를 사랑한다. 태어난 이래로 줄곧 사랑을 받기만 해왔다. 무인도에 세 가지만 가져갈 수 있을 때 무엇을 고르겠냐는 물음에 단 한 번도 외할머니를 끼워준 적이 없었다. 당신이 주는 사랑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많이 미안하여진다.

 외할머니는 부산 토박이다. 부추전을 부를 때는 정구지찌짐, 식혜는 단술, 연근조림은 연근쪼림이다. 서울서 나고 자란 아내가 처음 외할머니를 뵈었을 때엔 내가 통변을 해야만 했다. 나조차도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엔 어머니가 나섰다. 때로는 뉘앙스로 알아맞혀야 하지만, 할머니의 목소리가 만드는 운율이 나는 좋다. 할머니의 부산말이 역사적 사료로 남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외할머니는 부산 토박이다. 그래서 굴 넣은 김치를 잘하신다. 입맛 까다로운 형도 할머니 김치에 들어간 굴은 잘 먹는다. 할머니가 해주는 파전은 동래식이다. 큼지막하게 썰어둔 파 사이사이에 반죽을 부은 다음 계란물을 입힌 그 음식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한다. 어머니는 그것을 배워 내가 어릴 적부터 일 년에 두 번씩은 파전을 해주었다. 오징어가 들어간 그 파전을 초장에 찍어 먹는 날이면 그다지 바랄 것이 없었다.

 외할머니는 가진 것이 많이 없었다. 땅 한 마지기, 집 한 채도 소유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스물 쯤 되었을 때 할아버지와 정략결혼을 맺었다. 시집살이는 당신의 업이었다. 집안일을 해내면서도 부족한 돈을 버느라고 갖은 장사를 했더랬다. 만화방을 운영한 덕택에 엄마는 소녀의 감수성과 지성을 갖추었고, 당구장을 운영한 덕분으로 작은삼촌은 당구로 용돈을 벌었단다. 가진 것 없어 시작한 장사였으나, 자식들이 무언가를 얻었으니 밑진 것은 아니겠다. 그럼에도 당신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면 측은하다. 무엇보다 그 고됨을 알아주는 이 하나 없었을 것이 마음 아프다.

 외할머니는 손이 컸다. 한날은 행사지에서 번데기 한 컵을 먹었다. 고소한 그 맛이 좋아 국물까지 후루룩 마셨다. 그러고는 할머니에게 번데기가 좋다고 했다. 다음 번 명절에 할머니 집을 갔을 때, 내 몸통만 한 양은솥에 번데기가 가득히 삶아지고 있었다. 그 뒤로 번데기는 안 먹는다.

 외할머니는 걱정이 취미다. 할머니 집을 가노라면 우리가 어디쯤 왔을지 머릿속에 그려보신단다. 오다가 사고가 나지는 않을는지 걱정되어 이내 곧 전화를 거신다. 할머니를 뵙고 돌아오면 꼭 도착 전화를 드려야 한다. 이제는 그것이 귀찮지 않다. 오히려 할머니 목소리를 한 번 더 들을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다.


 외할머니는 몸이 아프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파킨슨병을 판정받으셨다. 몹쓸 병은 할머니의 손을 떨리게 했고, 날랜 걸음을 종종걸음으로 바꿔놓았다. 부축 없이 몸을 일으키기 힘들게 하고, 요리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할아버지가 식혜를 담그신다. 애석하게도 어릴 때의 그 맛은 나지 않는다. 그래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이 식혜가 그 식혜다 생각하며 마실 것이다.

 외할머니는 나에게 늘 주기만 하는 존재다. 이제는 할머니의 몸이 아파 굴김치를 담가주지도, 파전을 해주지도, 번데기를 해주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나에게 늘 사랑을 준다. 할머니의 생명의 초가 얼마나 남았을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서글퍼진다. 내게 다가와 안으며 반겨주지는 못하는 할머니지만, 내가 다가가서 안아드리면 된다. 중성자를 얻은 우라늄은 열렬히 타오른다. 받기만 한 나의 사랑은 할머니를 오늘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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