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월 Jul 29. 2024

나의 두 아버지

나의 가족 이야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흠이자 상처이며, 틈이자 약점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생각을 열거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그것을 반추하는 일을 멈추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에 대한 이해가 나라는 인격체를 이해하는 단초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비교적 최근까지도 나는 내가 처해야만 했던 상황 속에서 꼼짝없이 혼란스러워하였다. 하여 이렇게나마 머리 위를 떠다니는 생각들을 글에 가두어둠으로써 그 일들을 형상화하고, 보다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다.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계속해서 글을 써나가는 것이 걸음마를 건너뛴 채 달리기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다시 걸음마를 떼어보려 한다.

[친부(親父)]

 나의 친부는 고인이다. 작고하기엔 젊은 나이이니 故人은 아닐 것이나, 나의 삶에서 내어줄 방 한 칸 없으니 古人이라 칭하는 것이 맞겠다. 그는 제법 딱한 사람이다.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그를 판단해 보자면 괜찮은 재주를 가졌으나 근성이 모자랐고, 선한 마음을 가졌으나 처세에 약한 사람이었다.

 나 어릴 적 그는 친구 같은 아버지였다. 메이플스토리 게임 캐릭터를 같이 키우기도 하고, 팡야나 마구마구 같은 게임도 함께 즐긴 기억이 난다. 친구들이 아버지와의 서먹한 사이를 얘기할 때면 나는 친구 같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썩 자랑스러웠다. 

 친부는 가끔 이북 출신인 당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친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친부가 국민학생쯤 되었을 때, 뒷마당에 있는 토끼를 지키라고 했었단다. 그는 토끼들이 깡총깡총 뛰어가는 것이 신기했던지 장대로 열심히 몰아세웠고, 이리저리 도망하던 토끼들은 스트레스를 받아 꼴까닥 쓰러져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날 저녁 친할아버지는 나의 친부에게 미친 듯이 화를 내었고, '너도 죽어봐라'면서 바닥에 눕혀 목을 졸랐다고 한다. 그의 눈이 흰자위로 가득 차고 게거품을 물때쯤에 그의 누이들이 달려와 아버지를 뜯어말렸고, 죽다 살아난 그는 캑캑거리며 아버지에 대한 원한을 품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친부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엔 부족한 아버지였을지 모르나, 적어도 그의 기준에서는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상당히 노력한 것이리라 짐작한다.

 그럼에도 친부에게 상당히 아쉬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부족한 그의 근성이다. 어쩌면 그것이 가정을 파탄으로 이끈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일을 쉽게 관두었다. 조선소의 일은 무척 고되다. 그러나 조선소에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딸린 처자식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에 순응할 줄 알아야 했으나, 나의 어머니가 어르고 달래어도 세 달, 길어야 일 년을 못 버티고 직장을 옮겨 다녔다. 그런 가정이 부유함을 누릴 리는 만무하였고, 나는 내외의 싸움을 지겹도록 지켜봐야 했다.

 나는 친부의 삶이 몰락해가는 과정을 여과 없이 지켜보았다. 부부 싸움에서 논리로 이길 수 없던 그는 결국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였다. 그래도 다정한 사람이라고 포장할 수 있었던 방패막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친부와 어머니는 결국 이혼하였다. 그 뒤로 몇 번쯤 그를 만나기는 하였으나, 그리 좋은 만남은 되지 못하였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친부보다 내가 더욱 어른스럽다고 여겨졌다.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다하였다. 古人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의부(義父)]

 나는 의부 손에서 자라지 못하였다. 다정하면서도 근면성실한, 어른다운 그에게서 자라지 못한 것이 아쉬울 때도 있다. 의부를 알게 된 지 이제 6년쯤 되어가는 것 같다. 타향살이를 하는 나는 그를 자주 만나지 못하였고, 일 년에 두세 번 남짓 만나는 것이 전부이니 여생에 백 번 이상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안타까우면서도 신기함을 알려준다. 그렇게 적은 만남을 가지면서도 아버지로서 대하는 나의 마음이, 그리고 아들로서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자못 신기한 것이다. 이것에 대해 여러 밤을 두고 생각해 보았다. 결국 어머니를 매개로 하기에 가능한 것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나의 어머니를 지극히도 존경하며 사랑한다. 그토록 원하던 이혼을 이루고 자유를 얻으셨었지만, 아플 때 챙겨주는 이 하나 없는 어머니의 삶은 퍽 위태로웠다. 그랬던 어머니에게 진정으로 사랑으로 대하고, 느지막이 만났으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는 의부의 정성에 나는 큰 감사함을 느꼈다. 그것이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었다. 아마 의부가 나를 아들로서 대하는 것 또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녀를 사랑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친부와 의부, 두 아버지를 둔 나의 삶은 일반과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둘 중 누구를 아버지로 섬길 것인가, 그것은 복잡하게 생각하면 끝이 없는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단순하게 결론지었다. 사랑을 모르는 시절의 어머니가 골랐던 사람보다, 지금 내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더 낫다. 천륜이니 피니 하는 그런 얘기는 무시하려 한다. 훗날 친부를 우연히 만나거나,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것은 연륜이 쌓였을 그때의 나에게 결정을 맡기고자 함이다.

 아무튼 나의 청소년기는 이러한 혼란의 상황에 흔들리고 엎어지는 나날이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도 가끔 있으나, 내 삶은 이미 길들여진 구두 같다. 뒤꿈치가 까지지는 않을는지, 약간 커서 헐떡이지는 않을는지 걱정시키는 새 신보다 정답지 않은가. 조금 얼룩지고 주름 생긴 구두일지라도 열심히 신어보려 한다. 함께 걸어보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문화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