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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Aug 18. 2024

초딩, 집을 나가다.

 “너 진짜 짜증나게 왜 이래?” 아이 엄마는 잔뜩 화난 얼굴로 아이를 다그친다. 아이는 풀이 죽어 가만히 있고, 마리오네트처럼 엄마의 손길에 따라 움직여진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나 아파트 단지를 걸을 때면 흔히 마주하게 되는 광경이다. 마음대로 따라와 주지 않는 자녀를 키운다는 게 힘든 일인 줄을 짐작하면서도, 아이를 훈육하는 것이 아닌 짜증으로 대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계기로 삼곤 한다. 돌이켜보면 나의 어머니가 우리 형제에게 짜증을 내는 모습은 좀처럼 본 적이 없다. 우리 형제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도 다만 속상해하셨을 뿐, “너는 왜 그 모양이니?”, “생각이라는 게 있기는 하니?” 등, 부정적인 감정에 모욕적인 언사를 덧대어 우리에게 투척하는 법이 없었다. 그 덕에 우리 형제가 자존감 높은 사람으로 자랐음에 깊은 감사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긴 세월 숱한 응어리를 어디다 풀었는지, 속에다 묻지는 않았을는지 걱정도 된다.

 그런 어머니도 나의 투정을 받아주지 않고 언성을 높였던 적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쯤, 어머니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밀린 설거지를 하고 계셨다. 계기가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도 사소한 것이었나 보다. 나는 응석을 부리다 잘 받아들여지지 않자 홧김에 “나 (집)나갈래!”하고 외쳤다.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면서 현관을 향해 “그래라!”라고 답했다. 집을 나가겠다는 얘기는 나름의 초강수였는데, 전혀 통하지 않자 당혹스러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사나이로 태어나 뱉은 말을 지키지 않으면 고추가 떨어진다던 시대였다. 문을 있는 힘껏 열어젖히고 ‘쾅!’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막상 집을 나섰지만 갈 곳이 없었다. 아파트 단지 내의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발을 앞뒤로 구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해가 산너머로 숨고 땅거미가 슬그머니 올라왔다. 하원하는 아이들의 밝은 표정이 왠지 부러웠다. 어제만 해도 나는 그들과 똑같이 웃으며 집에 들어가 엄마가 차려준 밥을 맛나게 먹었었는데, 오늘의 나는 그들과 신분이 달라진 것 같았다. 이런 생각들로 나 자신을 처량하게 만들어야 엄마를 더욱 미워할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사위가 어둑할 때쯤, 이만하면 나의 기개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을까, 하는 합리화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실은 허기짐을 이기지 못한 것이지만, 적어도 고추가 떨어질 일은 없으리란 생각에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슬그머니 집에 들어와 자동으로 켜진 형광등 아래에 멀거니 서있으려니 심장이 콩닥대며 뛰었다. 어떤 꾸지람을 듣게 되려나, 나가 살지 뭣하러 들어왔냐며 비아냥을 듣지는 않으려나,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는 팔을 벌려 다가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엄마가 화내서 미안해.”라며. 명치께에 들어찼던 응어리 같은 무언가가 눈 녹듯 사그라지고, 그 자리에 울컥하는 따뜻함이 채워졌다. 사춘기에 들어서려는 나의 반항기 가득한 심지를 어머니는 따스함으로 간단히 꺾어버린 것이다. 나의 반항에 화가 났으면서도 되려 풀이 죽었을 나를 걱정해 쉽게 용서해 준 어머니의 모습이 이따금씩 떠오르곤 한다.


 이렇듯 용서를 받으며 자란 나였지만, 막상 남에게는 그리 관대하지 못하였다. 특히 후임들에게 나는 엄격했다. 하루는 맞후임 L군이 사고를 친 적이 있었다. 그날은 L군의 생일이었는데, 그가 저녁식사 후 경계근무를 서고 있을 때였다. 대대장님께서 친히 생일 축하를 전하고자 초소에 전화를 걸었는데 무전기 작동법을 몰라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대대장님은 큰 문제 아니라며 상황을 마무리하셨지만, 이를 보고받은 중대 간부님들이 “선임 근무자가 무전기 작동법을 모르는 게 말이 되냐.”면서 한 마디씩 꾸짖고 갔다. 이 소식을 들은 내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무전기 작동법을 알려준 것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L군을 어찌해야 할까 고심하다가 소대원이 모두 앉아있는 생활관에서 “물자창고로 따라와.”라며 그를 불러냈다. 이윽고 1평이 채 안 되는 좁은 창고에서 문을 닫고 그를 크게 꾸짖었다. L군은 울상이었다.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는 그였지만, 나는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화는 내뱉는다고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타고 번지는 화염처럼 더욱 커져간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이윽고 분노는 L군에 대한 한심함으로 바뀌었고, 우리는 결국 좋은 사이로 남지 못했다.


 직장인이 되어 살아가는 지금도 나는 이따금씩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그리고 용서받을 때마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무한한 감사를 느끼는 한편, 쉽게 용서해주지 못했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때, L군을 물자창고로 불러내어 “생일인데 사소한 실수 가지고 기죽지 마라.”라며 위로하고, 후임들 앞에선 혼낸 척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조금 관대하고 인자한 선임이었더라면 L군은 군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이 후회와 섞여 밀려오는 것이다. 남은 삶에서도 나는 아마도 무수한 실수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용서받지 못한다면 삶의 의지가 크게 꺾이고 말 것만 같다. 내 잘못을 용서받길 원하는 만큼, 남의 실수에도 관대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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