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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Jul 29. 2024

할아버지의 눈물

나의 가족 이야기

 지난주 토요일은 할아버지의 생신이었다. 다른 일정이 있어 할아버지께 찾아가지도 연락도 드리지 않은 나는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복숭아와 전병을 댁으로 보내드렸다. 잘 먹겠다는 할아버지의 음성이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온다. 나는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산과 서울의 먼 거리는 나의 죄책감을 덜어주지만, 그보다는 남아봤자 얼마나 남았을까 하는 할아버지의 생의 양초가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할아버지는 갤로퍼를 몰았었다. 뒷자리의 짐칸에 장판을 깔아 사람을 태울 수 있게 개조한 투박한 차였다. 나와 형은 뒷자리에 앉기를 좋아했다. 앞을 향해 앉는 좌석이 일반인데, 모로 앉아 덜컹이는 갤로퍼의 뒷자리는 놀이 기구 같았다. 창문에 달린 철로 된 손잡이를 움켜쥐고 엉덩이가 들썩일 때면 마냥 좋았다. 우리를 차에 태울 때마다 할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백만 원이다이!"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덜컥 겁이 났다. 세뱃돈을 다 모아도 십만 원을 넘기기 힘든데, 백만 원은 너무 큰 거금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우물쭈물하던 차에 엄마와 외할머니가 웃는 모습을 보고서야 장난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나는 어렸을 때도 넉살이 꽤나 좋았다. "커서 갚을게요!" 하고 미래의 나에게 떠넘겨버린 것이다. 할아버지는 특유의 너털웃음을 치고는, "그래! 내 기억해둔다이!"하고 엑셀을 밟았다. 할아버지의 갤로퍼는 이후에도 여러 번 탔지만 갚아야 할 돈은 백만 원 고정이었다. 만기일이 없던 나의 채무는 그렇게 일 년 십 년 지나며 없던 일이 되었다. 아니, 사라지며 애정이 되어 가슴속에 남았다.


 할아버지는 목수였다. 옛날 집에는 미닫이문을 만들 때 나무로 살을 만들고, 그 위에 풀을 발라 창호를 붙였다. 할아버지는 문에 꽃문양도 양각으로 새기고, 못질 없이 조립만으로 튼튼하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졌다. 그 기술로 공장장도 되었고, 부산에서 제일로 쳐주는 장인이었다는 게 할아버지의 큰 자부심이다. 그래서 금사동 집엘 가면 할아버지가 손수 깎아 만든 바둑판과 바둑알 통, 미닫이문이 있었다. 그것들은 할아버지의 자부심만큼이나 진한 나무 향을 뿜었다. 내가 기억하는 금사동 냄새는 어쩌면 나무냄새인지도 모른다. 그 나무냄새나는 집은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핑그르르 돌 정도로 그립다. 물론 그때의 건강한 할아버지 할머니, 왕할머니가 그리운 것이겠지만.


 하루는 할아버지에게 어쩌다 목수가 되었냐는 질문을 했다. 할아버지는 "먹고살라고 했지. 그때는 기술 배우는 게 제일로 출세하는 거였다."라고 하셨다. 평소 역사를 배울 때에도 당시의 생활상에 유독 관심이 가는 나로서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할아버지의 기억이 무척이나 궁금했고, 보물처럼 진귀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직후는 어땠냐고 들뜬 마음으로 여쭈었는데, 잠시 생각을 하던 할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게 아닌가. 할아버지는 말수가 무척 적은 분이셨다. 말로써의 애정표현은 전연 없었고,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을 이용해 내 허벅지나 팔뚝살을 꼬집는 게 유일한 애정표현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시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더욱 놀란 것은 우리 어머니였다. 어머니도 할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아무튼 할아버지는 눈물을 닦으시며 "많이 힘들었지. 5살 6살 되는 어린 나이에 기차역에서 신문을 팔다가 경찰이 떴다는 소리가 들리면 기차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숨고 했으니까."라며 어린 시절을 회고하셨다. 혈육의 고난기를 듣는 것은 교과서로 접한 그때 그 시절과는 다른 생생함으로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괜히 힘든 기억을 들추어낸 것 같아 죄송스럽기도 했다. 그 시절을 겪은 할아버지가 여전히 부산에서 생존해 계신다는 것은 놀랍고 감사한 일이다.

 한평생 가족을 먹여살리느라 고생하시고, 정략결혼으로 만났으나 누구보다 사랑꾼인 할아버지.(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자기♥로 저장해두셨다) 누구보다 멋쟁이시고, 말수가 많아진 지금은 귀엽기까지 한 할아버지. 이다음 부산에 내려갈 때면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바둑이나 두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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