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월 Jul 29. 2024

재미에 관하여

재미에 관한 고찰


며칠 전, 야근을 하고 오후 아홉시 반쯤 회사 뒷문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던 때였다. H식당 안을 보니 점심때 식사를 나르던 아주머니가 여전히 일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내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사적으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점심때 장사를 하려면 아침 일찍 나와서 발주한 식재료를 수령하고, 손질하고, 또 반찬을 담그고 그것을 통에 담고, 그릇을 준비하고 매장을 청소하고. 그런 분주한 오전을 보낸 뒤에는 걸걸한 아저씨들을 상대로 뜨거운 김이 얼굴에 확, 수증기를 끼얹는 국밥을 수없이 날랐을 터이다. 그렇게 밤 아홉시 반이 된 지금까지 계속해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측은지심이 들게 한 것이다. 저렇게 열심히 사는 것은 보기 좋으나, 그렇다면 삶을 제대로 즐기기나 할 수 있으려나? 그렇게 아등바등 살기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아침 일찍 나와 밤늦게 돌아가면, 정작 하고 싶은 일은 대체 언제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결국 창조주에 대한 원망까지 닿았을 때, 비로소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바닥창이 딱딱하고 뒷굽이 살짝 닳은, 자주 닦지 못하여 광택을 잃은 구두. 이 구두 안에 갇힌 양말은 땀으로 축축했고 그 양말을 젖게 만든 내 발은 오늘 하루 종일 분주했다. 일곱시쯤 집을 나서 5호선과 7호선을 갈아타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떡하고 버티느라 안간힘을 썼으며, 차갑고 딱딱한 플랫폼과 뜨거운 아스팔트에 구두를 담금질하며 나를 사무실로 이끌었다. 사무실에서는 딱딱한 구두 대신 말랑한 슬리퍼로 갈아입었으나, 문서작업을 끝낼 때마다 출력물을 가지러 가고, 보고를 드리러 팀장님께 가고, 또 허기진 배를 채우러 식당엘 가고... 똑같은 업무를 오후까지 반복하다 결국 야근까지 하고서야 다시 딱딱한 구두를 입고 지친 몸을 집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었다. 문득 내 자신도 저 측은한 아주머니와 다를 바 없구나,라는 생각 절반과 아냐 그래도 내 삶은 조금 다르지 않나,라는 생각 절반이 머리를 채웠다. 어릴 적 자주 하던 공상으로 동물과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두 종을 딱 잘라 절반으로 구분할 수 있는 명제를 찾기 위해 고민하던 그것처럼, 나는 그 아주머니와 나의 열심 사이를 구분 지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내가 아주머니를 보았을 때 측은한 마음이 든 것은 그가 하는 일에 ‘재미’가 빠져있을 것이라 으레 짐작한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와는 좀 다르지 않나라고 생각한 것 또한 나는 나의 일에서 재미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결론에 이른 이상 아주머니가 실지로 재미를 느끼고 있느냐 아니냐는 중요치 않게 되었다. 그보다 오래전부터 궁금해왔던 그 무엇, 바로 사람을 살게 하는 가장 중요한 무엇이 바로 재미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어나 활동하고 자면서 에너지를 충전한다. 그러한 하루의 반복은 우리의 일상을 형성하고, 그러한 일상이 겹겹이 쌓여 삶을 형성한다. 그러니 하루를 잘 보내는 것이 곧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그럼 하루를 잘 보내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바로 재미를 느껴야만 하는 것이다. 재미란 양념장 같아서, 지루하게도 반복되는 일상에 재미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그것이 좋은 일상이 되고, 회상했을 때 돌아가고 싶은 향기를 그윽이 남긴다.

찬찬히 살펴보면 꽤 많은 존재들이 재미를 추구한다. 고양이는 재미를 위해 쳇바퀴를 돈다. 강아지는 산책이 발광할 만큼 재밌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출근길에 유튜브를 보며 재미를 충족한다. 그런 현상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노인석의 할아버지는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며 젊은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실은 그의 재밋거리다.

재미.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누군가에겐 한심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을 오타쿠라고 비하하기도 하고, 유명 카페를 찾아다니는 사람 또한 비하의 대상이 되곤 한다. 내가 힙합에 빠져 고현동과 옥포동을 왕래하며 공연을 하던 중고등학교 시절엔 나를 욕하던 어른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묘미는 언제 빛 발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에 있지 않나. 나는 회사 면접 때 그 랩으로 좋은 인상을 보여주었고, 아직까지 잘 다니고 있다.(비록 야근이 잦긴 하지만) 만약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 사라지고 모두가 생존에의 투쟁만 이어간다면 그보다 삭막한 세상이 또 있을까. 그보다 살기 싫은 세상이 또 있을까.

 나는 재미가 중요하다는 이 논리를 통해 기호의 손발을 잘라 토르소를 만들어버리는 세상에 조금은 반항을 해보고 싶다. 지친 발은 나를 집으로 이끌었고, 지친 아주머니는 집에 들어갔을 것이다. 간밤에 충전한 에너지를 모두 소진시키는 매일의 반복이, 측은함으로 끝나느냐 행복으로 추억되느냐는 내가 느끼는 재미에 달렸지 않나. 모두가 저마다의 재미를 추구하는 지구. 나도 나만의 재밋거리를 위해 힘써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