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대한 기억
자주 걷는 곳으로 길이 난다. 이 생각을 하면 등산객들이 새로운 경로를 발견하여 하나 둘 드나들다가 점차 길이 되는 그런 모습이 떠오른다. 세대가 달라서인지, 내게는 다른 듯 비슷한 경험이 있다.
어릴 적 살던 아파트엔 상가가 있었다. 상가의 후문 근처에는 둘리문구라는 허름한 문방구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종종 딱지나 유희왕 카드를 사곤 했다. 문제는 후문에 가려면 길을 빙 돌아 상가를 가로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린 나의 보폭으로는 꽤나 멀게 느껴졌다.
어느 날, 형이 지름길을 발견했다며 상가 코사마트 창고로 나를 데려갔다. 회색 슬레이트로 만들어진 간이 문. 창고 내부에는 종이상자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내는 뿌연 먼지 냄새가 담배연기처럼 자욱했다. 이렇게나 사적인 곳에, 그것도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에 들어선다는 것이 어린 소년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그래서 나란히 쌓인 박스 틈을 지날 때, 억지로라도 상자의 글자를 읽지 않으려 애썼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물심양면이란 말은 몰랐지만, 본능적으로나마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또 하나의 슬레이트 문을 열고 창고를 나서니 상가의 후문, 둘리문구가 나왔다. 무심코 지나치던 창고의 뒤가 내가 아는 익숙한 공간과 이어지는 것이었다니! 그날은 엄마에게 받은 용돈(아마도 오백 원이나 천원 언저리)을 맥주사탕이나 스폰지밥 쫀디기 따위의 불량식품을 사는 데에 모두 탕진하고, 지름길의 위대함을 온몸 깊이 새겼다.
동네 아이들 중 한 개척자가 발견하였을 창고 지름길이라는 신항로는 그렇게 알음알음으로 전파되었고, 아이들은 열심히 드나들었다. 그것은 시간을 단축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무언가 위험한 일을 해내고 있다는 모험심까지도 느끼게 하였다. 장담하건대, 그 나이 또래의 사내아이들 중 이러한 모험을 마다할 이는 없을 것이다. 개중에는 박스 안의 물건에 손 댄 녀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창고 문은 얼마 동안은 쇠사슬로 굳게 잠기었고, 쇠사슬이 풀린 얼마 동안은 잊힐세라 애용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창고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회색 슬레이트 문이며, 그 안에 쌓여있던 박스며 순식간에 증발이라도 한 듯 사라지고 없었다. 그 빈자리엔 원래부터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거무튀튀하게 때가 탄 보도블럭이 가지런히 깔려있었다. 상가 후문에 자리한 둘리문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 사건은 어린아이였던 나에게 가히 인상적인 것이었고, 내 주변 아이들도 다를 바 없었다. 실로 장안의 화제였다.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신항로의 개척과 신기루처럼 증발해버린 창고에 대해 신나서 설명했다. 엄마는 연신 말대답을 해주며 이야기를 끝까지 듣더니, ‘이제서야 철거했네, 순 나쁜 놈들.’이라며 사건을 일축했다. 전말은 이러했다. 원래 계획상 후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공용이었으나, 입주민이 들어서기 전부터 장사를 시작한 코사마트에서 불법점유하여 창고로 사용해온 것이다. 아이들이 줄기차게 드나드는 것을 눈여겨 본 몇몇 입주자가 길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민원을 제기하였고, 그제서야 행정절차가 시행된 것이었다.
아이들 중 누군가가 지름길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합심하여 그 길을 이용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길이 있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이것이 ‘자주 걷는 곳으로 길이 난다.’는 속담을 체감한 첫 경험이다.
요즘은 그 속담을 다시 체감하고 있다. 문장에서 말하는 길이란 비단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물리적인 의미의 길뿐만 아니라, 생각의 길 또한 아우른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가 중요하다는 것. 어쩌면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라도 깨달았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여기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몇 글자 기록해 보고자 한다.
며칠 전 허리를 삐어서 며칠을 드러눕다시피 지냈었다. 앉지를 못하니 책을 읽기조차 힘들었다. 산책도 가지 못했다. 그렇게 열흘 가까이를 허송세월로 보냈다.
열흘! 얼마나 아까운 세월인가. 20대의 열흘은 분명 노인의 일 년보다도 값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흘려보낸 세월이 고작 열흘이었을까. 평일은 힘들어서, 주말은 회복을 위해서 그저 살아만 있었을 뿐인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그동안 나는 어떤 발전을 이루었나? 필시 사상의 진척은 몇 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하루에 십분씩이라도 나를 위한 시간을 가졌더라면 지금 나는 더욱 발전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십분씩 투자하다 보면 하루 삼십분, 한 시간, 나아가 두 시간도 익숙해졌으리라.
소비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유튜브와 같은 재밋거리는 나를 계속해서 제자리에 있게 만든다. 그런데 그 자리가 고정적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세상이 앞으로 가기 때문이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와 다른 세상이 되어있다. 최소한 세상의 움직임에 발맞추려면 경제기사라도 읽어야 한다.
단편집을 읽었더니 단편 소재가 마구 떠올랐었다.
그다음으로 시집을 읽었더니 시상이 자꾸만 떠올랐다.
소설을 읽었더니 주인공을 구체적으로 정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생각은 물이다. 물처럼 계속해서 흐른다. 물이 가면 안 되는 곳에 둑을 쌓고 물길을 돌려야 하며, 올바른 곳으로 흐를 수 있도록 운하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호수를 만들 수 있고, 바다를 얻을 수 있다.
자주 가는 곳으로 길이 난다.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가 결국 나를 만든다. 그 생각들이 은연중에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을 때, 그것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나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기에 그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올바른 생각들로 머리를 가득 채우고 사는 것. 그것은 나를 만들어가는 수련이자 행복을 위한 지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