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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Jul 29. 2024

성내동

내가 사는 동네 이야기

 타향민의 성지(聖地), 신림동에서 줄곧 지내다 성내동으로 이사 온 지 만 2년이 조금 넘었다. 이곳은 연고도 없고, 아는 이 하나 없는 동네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우연히 알게 된 누군가와 마치 오래 알고 지낸 듯이 막역한 사이로 발전할 때가 있다. 이 동네가 그렇다. 

 4년을 자리한 신림동에는 좀처럼 정을 들이지 못했다. 힘든 대학 강의와 자격증 공부를 마치고 집을 갈 때에도, 아르바이트에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올 때에도, 회사 업무에 시달리다 퇴근을 했을 때에도 신림동은 그리 따스한 존재가 아니었다. 다만 집에서 맞아주는 귀여운 강아지 정덕이와 친형과 지냄으로써 나눌 수 있는 담소가 그 동네의 생활을 안락하게 해주었다.

 반면에 고작 2년을 지냈을 뿐인 성내동은 때로는 고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이 동네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 동네는 고즈넉하다. 밤 9시만 되어도 고요가 내려앉는다. 그러나 고적하지는 아니하다. 거리 위에 노을마저 저물고 어둠이 자리하면 산책하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삐져나온다. 어떤 집은 강아지를, 어떤 집은 아이를 데리고 산책길에 나선다. 그들의 말소리는 적막을 깨긴 하지만 다정하다. 정겨운 거리에는 적막보다 다정함이 어울린다. 산책하는 이들은 대개 올림픽 공원을 향한다. 1개 동만한 공원이 집 근처에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공원이 동네를 고르는 이유 중 하나였다면 그것은 '잘 한 일'이 되었겠지만, 내가 이 동네를 선택할 당시 공원의 유무마저 고를 형편은 못되었으니 행운이라 하는 것이 맞겠다.

 올림픽 공원은 너른 크기만큼이나 다양한 생태계를 간직한다. 저마다 생존할 뿐인 무수한 생명체들은 나의 감정을 깨운다. 행여나 다람쥐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나무를 유심히 보게 된다. 그러면 발견하게 되는 나무의 이름 팻말. 예쁘고 소중한 강아지의 목에 이름과 비상연락망을 새긴 목줄이 달리었듯이 고웁게 달려있다. 공원은 계절마다 변신을 한다. 그 변신은 자연스럽다. 뽐내기 좋아하는 나르시시스트가 뿌린 향수처럼 코를 찌르는 인위적인 향이 아니다. 이를테면 좋아하는 여자애가 불러내어 머리를 두 번이나 감고 밖을 나온 남자애의 머리칼 냄새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그 변신은 사랑스럽다. 사랑하는 아내가 어느 날 눈썹칼을 들고 거울을 뚫어져라 보았다. 무엇을 하는가 했더니 어느새 눈썹을 다듬어 모양을 바꾸곤 어때? 하고 물어왔다. 그런 사랑스러운 변신이다. 

 봄이면 벚꽃길이 입구에서 반기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여름이면 한산한 고양이들이 영역싸움을 한다. 산책길 한가운데에 옹기종이 모여서 제들끼리 담소를 나누는가 싶다가도 왱!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놈이 멀리 달아나버리고 나머지 녀석이 쫓아 나선다. 그 소리에 매미는 더 크게 울어재낀다. 가을이면 곳곳에 자리한 숲속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낙엽이 종잇장처럼 우아하게 떨어진다. 모여진 마른 낙엽을 밟지 않으면 가을이 섭섭하다. 겨울의 올림픽 공원은 왠지 쓸쓸하다. 그 많던 동물들도 굴을 파고 숨었는지 보이질 않는다. 인적도 드물다. 덕분에 소복이 쌓인 새하얀 눈을 처음으로 밟는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아내와의 발 크기를 비교해 보며 꺄르르 웃어댈 수 있다. 올림픽 공원의 사계절 변신은 무엇 하나 기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동네엔 성당이 있다. 한국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빨간 십자가가 아니라, 은은한 주황빛을 발하는 종탑이 있는 성당이다. 주택가인 동네라서 그 종탑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멀리서도 우리 집이 있는 곳을 알 수 있다. 그 앞을 지날 때면 영화 '알로슈티'가 생각난다. 좋아하는 여인에게 제대로 고백하지 못하는 어느 청년의 슬픈 연주가 울려 퍼질 것만 같다. 종탑이 있는 성당 덕분에 날씨가 추워질 때면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진다. 올해의 크리스마스에는 종탑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 것이다.

 이 동네는 강동구청을 끼고 있다. 구청 주변으로는 소방서와 경찰서 등 관공서가 몰려있다. 그 덕인지 길이 깔끔하다. 정동길만큼 아름다운 거리는 아니지만, 널찍하여 걷는 맛이 있다. 구청을 가진 동네 주민으로서의 혜택은 그뿐인 줄 알았으나 가장 좋은 점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직원들이 먹여살린 인근의 식당들이다. 공무원의 얇은 지갑을 의식해서인지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깔밋한 음식을 내어놓는다. 토요일이면 아내와 식당 한 군데를 정해서 먹으러 다니는데, 아직도 가볼 곳이 많이 남아있다. 동네의 모든 거리를 속속들이 꿰차는 것도 좋지만, 앞으로 알아갈 곳이 많은 것도 좋은 일이다.

 서울이면서도 서울 같지 않은 성내동. 서울 사람들이면서도 서울 사람들 같지 않은 성내동 사람들. 나와 아내의 보금자리이면서 형과 정덕이도 살고 있는 이 동네가 나는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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