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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Jan 10. 2024

본질에 대하여

농촌의 삶에서 본질을 찾다

 스무 살 대학시절, 친구 몇 명과 함께 룸메이트 H군의 고향에 간 적이 있다. 강원도 홍천군 내면 창촌리. 농사를 짓는 부모 아래에서 자란 그는 보기 드물게 순수한 청년이었다. 그가 자란 환경을 두 눈으로 목격하니, 그의 순수성과 청초함에 납득이 갔다. 그와 나는 가정환경에 있어서 일종의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그로 인해 유대감이랄까, 동질감이랄까. 형제는 아니지만 형제처럼 지낼 수 있었던 그런 친구였다. 녀석은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나는 반도의 끝자락 섬마을에서.. 부푼 기대와는 조금 달랐던 상경살이와 녹록지 않은 현실에서 그런 동지가 있다는 것은 작게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와 나는 진중한 얘기를 곧잘 하였다. 기숙사 샤워실에서 차가운 물을 튀기며 놀다가도, 2층 침대에 누워 힘든 현실이나 막연한 미래 같은 얘기를 나누며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런데 처한 환경에 불만을 토로하던 나와는 달리, 그는 그보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줄곧 하였던 것 같다. 그것이 그를 존경스러워하는 부분이다. 어쩌면 매캐한 연기가 가득하고, 비철이나 철판을 깎는 소리가 만연한 공업도시에서 자란 나와는 달리, 커다란 산골짜기와 맑은 실개천이 흐르는 강원도에서 자란 것이 원인일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그의 고향을 거닐며 그의 현재를 형성한 발자취를 기꺼이 맞이하였다.

 우리는 어느 널찍한 계곡에서 슬리퍼를 타고 흘러갔다. 미끈한 돌이 미끄럼틀 같아서, 그 하류에 몸을 맡기고 두둥실 떠가는 놀이에 우리는 일곱 살 아이들만큼이나 신나했다. 늘상 바닷물에서만 수영하던 나는 물에 빠지고 그 물을 먹어도 짜지 않다는 사실이 생소하고 놀라웠다. 계곡이 좋다는 걸 그제서야 안 것이다. 그러곤 굴다리 밑에 들어가 납작하고 평평한 바윗돌 같은 것을 찾은 다음 고인돌처럼 괴어놓고 아래에다 불을 피웠다. 한 번에 한 점씩밖에 굽지 못하는 작은 불판이었지만, 시장을 반찬 삼아 먹던 고기 한 점이 얼마나 맛나던지. 곧이어 H군의 아버지가 송어회를 포장해다 주었다. 털털거리는 포터를 몰고 온 그가 용맹한 아가멤논처럼 느껴졌다. 아무튼 산해진미가 따로 없었다. 좀처럼 말이 없고 무뚝뚝하시다던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친구들이라며 챙겨주시는 모습이 볕처럼 따스했다.

 다음 날 우린 H군의 부모님이 경작하시는 밭에 일을 도우러 갔다. 밥값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엔 쥬키니라는 애호박 같은 것을 수확할 시기였다. 실하고 큰 녀석들을 똑 비틀어서 담으면 되는 것인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세심하고 여린 그 농작물은 자그마한 압력에도 손톱자국이 생겨서 상품가치가 떨어지게 되었다.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우리가 수확한 것 중에 못쓰게 된 것이 많아 H군의 어머니께서 다음엔 데려오지 말라고 하셨단다. 그래서 추억 속에서나마 창촌리를 가끔 방문하고 있다.

 마을의 유일한 치킨집인 처갓집양념통닭에서 H군의 동네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기도 하고, 건설 중에 부도가 나서 텅 빈 건물로 남아있는 한 폐아파트에서 담력 체험을 하던 그 시절의 여름. 그 경험은 내게 있어 시골에서 자라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게 해준 고마운 것이 되었다.


 요즘은 서울이란 도시에서 살며 삶의 본질에 대해 자주 생각해 본다. 많은 문명의 이기에 익숙한 나는 이것들로부터 벗어날 용기가 없지만, 그럼에도 세속적인 이것들이 과연 삶을 이루는 본질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사람들은 20대에 얼마를 모아야 하고, 30대엔 어떤 것을 소유해야 하며, 40대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정하고, 조언하고, 정언한다. 소위 말하는 '정답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답은 과연 언제부터 존재했는가? 최근 박완서의 '나목'을 읽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그 소설에는 많은 등장인물이 생존에 급급했다. 그때엔 살아남는 것이 곧 삶인 시대였던 것이다. 20대 때엔 얼마를 모아야 한다는 정답이 과연 70여 년 전에도 적용이 될까? 나는 그러한 의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를 맞이한 것이 길어야 50년인 이 나라에서, 언제 다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이 땅에서, 그러한 정답을 말하고 지침으로 삼는 것이 옳은 것일까?

 나는 농촌에서 자라진 못하였으나 그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 그것은 히말라야산맥에 오르지 않고도 힘든 줄을 아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농촌에 사는 그이들처럼 새벽 발자욱 소리를 농작물에 들려주는 부지런함을 떨지 못하고,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 분주히 채비하는 그 준비성을 갖지 못한 사람이다. 나는 도시에 살며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나가 여름이면 에어컨 바람을, 겨울이면 히터 바람을 맞으며 앉아있다 집에 돌아온다. 그렇게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는데, 나는 쌀을 살 수 있고 야채와 과일을 사서 겨울을 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외할머니는 손자의 이 생활을 큰 자랑이자 더할 나위 없는 복으로 여기신다. 나는 몸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지 않고, 엄살도 심하고 귀찮음이 많은 성격인지라 지금 나의 생활에 만족하는 편이다. 만족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삶을, 이 감사한 삶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앉아서 돈을 벌고 앉아서 글을 쓸 수 있는 이 여유로운 시스템에 언제까지 속할 수 있을는지,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런 점에서 농촌의 삶에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자연에서 직접 먹을 것을 얻고, 땔감을 얻고, 인분이 거름이 되어 다시 먹을 것을 얻는 그 환원적 구조의 놀라움. 또한 세대를 거듭하고 그 세대는 마찬가지의 궤도를 공전하는 것이 우주의 행성들이 일정한 영역을 공전하는 것과 닮은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만약 내일 세계가 멸망하고 인류는 다시 원시시대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면, 내가 지금껏 배우고 삶의 무기로 삼아왔던 능력은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때는 농경인이 최고의 기술자가 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인간이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것이면서, 삶의 본질과 가장 맞닿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래도 삶에 있어 '정답'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냉소를 띠어야만 할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정답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은 그저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봄이 오면 씨앗을 뿌리고 가을이 오면 수확을 하는, 그렇게 한 해 두 해 지나며 세대를 거듭하는 그것이 인류가 거쳐온 길이고, 또한 걸어가야 할 길일 것이다. 그렇기에 정답에 근접한 삶이 아니라도 가치가 있는 것이리라. 여름이면 몸이 녹아 퍼지고, 겨울이면 몸을 둥글게 말아 귀여움으로 먹고사는 강아지의 생명이 소중하듯, 모든 삶은 난 것만으로 소중함을 함께 지니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무수한 목숨들이 피고 지었듯, 나의 삶은 한 떨기의 꽃잎에 불과할 것이다. 그저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목숨들과 삶의 소중함을 공유하며 행복한 일들로 행복한 日들을 만들어 가는 것. 행복함이란 책 하나를 엮는 것이 나의 삶의 소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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