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에 대한 고찰
문화는 피고 지는 꽃이다. 동서고금의 무수한 문화는 그렇게 존재하였다가, 어느새 사라지기를 반복하여 왔다. 어떤 문화는 사장되어 전설로만 남았고, 어떤 문화는 거름이 되어 비슷한 형태로나마 현재까지 전해진다. 나는 가끔 어떤 것이 문화가 되는지, 문화와 비문화를 구분 짓는 그 경계는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문화란 본디 한 떨기 꽃잎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연약하여 미풍에도 날아갈까 염려되는 존재이다. 나의 아내는 사진을 잘 찍는다. 전문적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구도를 담는 감이 좋다. 함께 여행지에 가면 뜬금없는 장소에 나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는다. 나는 머쓱하여 바보 같은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괜히 멋쩍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멋쟁이 포즈를 취해본다. 그렇게 찍고 난 후 사진을 확인하면 내가 봤던 것과는 다른 경관이 사진에 담겨있다. 신통할 따름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장소를 옮기려 걸음을 떼려는 그 순간이다. 어느새 우리의 뒤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고, 가다 돌아보면 그곳은 포토존이 되어있다. 나는 이것이 문화가 탄생하는 순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언급하였듯이 이 문화는 한 떨기 꽃잎에 불과하여 금방 시들고 만다. 하루가 지나면 새로운 관광객들로 채워질 것이며, 그들은 그곳에 좋은 포토존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지나칠 것이다. 만약 누군가 SNS에 업로드하여 많은 사람이 해당 장소를 알게 되거나, 관리인이 포토존 팻말을 세운다면 그것은 꽃잎을 계속해 생성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문화는 이렇듯 우연히 피고 지고, 또다시 피우며 그 향기를 후세에 전하는 것이리라.
문화는 다채로울수록 아름답다. 나는 이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의 유행어' 따위를 듣고선 때로는 아연실색, 종종 칠색 팔색하곤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고쳐야 할 점이다. 젊은 문화는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 나이가 들어도 감각이 젊은 사람은 멋을 풍긴다. 여러 문화를 받아들인 그의 그릇이 다채롭고 향기로워지는 것이다. 새로운 문화를 존중하는 마음을 길러야겠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모던하우스에서 크리스마스 식기와 소품들을 몇 개 샀다. 돌아오는 길엔 전자 오르골 기능이 있는 스노우볼도 하나 샀다. 좁은 집에 벌써부터 크리스마스가 소복이 쌓였다. 불을 끄고 반짝이는 전구와 소품들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해 보았다. 크리스마스를 챙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나라의 전통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이내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문화란 본디 어우러지는 것임을 망각한 것이다. 잠시나마 그렇게 생각한 내 자신을 반성했다. 전통을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전통만을 사랑하는 것은 옹고집에 불과하다.
2015년 겨울, 아내와 함께 유럽여행을 하던 중의 일이다. 체코 프라하의 '팔라디움'이란 복합 쇼핑몰에서 우리는 어느 식당을 골라 들어갔다. 그곳은 대다수가 그렇듯 파스타와 피자를 내어놓는 가게였다.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 감자튀김과 함께. 우리는 파스타 하나, 피자 하나를 시켜서 나눠 먹고 있었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외국인 커플이 피자를 두 판 시켜 각자의 것만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서로 나눠 먹는 우리가 보기 좋았는지, 무어라 말하더니 서로의 입에 피자를 넣어주고는 재밌다는 듯 키득대며 웃었다. 그것을 보는 우리 또한 즐거웠다. 우리는 문화의 전파자가 되었으며, 그들은 샐러드 볼이 되었다. 문화는 그렇게 전해지고, 어우러지며 다채로워진다.
아직도 고집스러운 전통주의자, 보수주의자인 나는 멋을 풍기려면 한참 멀었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수많은 문화를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젠가는 사장되어 버릴 그 꽃잎을 노래하여 향기나마 후세에 전하고 싶다. 나의 고향에선 편 뽑기를 할 때에 '앤디 씬디 씬디, 위로(아래로)'라고 하였다. 도대체 누가 지었을지 모르겠는 이 구문을 아직도 거제도의 아이들은 부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