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 수필
배가 불편하다는 아내를 위해 죽을 끓여본다. 먼젓번 아내가 일러준 대로 끓인 계란죽은 참 맛났더란다. 호기롭게 불을 올리고 흰쌀밥과 뜨거운 물, 썬 대파와 소금을 넣었다. 물이 졸아들면 보충해 가며 끓여본다. 잘 눌어붙는 냄비 탓에 쉬지 않고 휘휘 젓는다. 별거 없는 재료와 달리 시간은 적잖이 요하는구나. 한극에는 어김없이 상념이 배어든다.
어릴 적 아프다는 말 한마디면 뚝딱 쑤어지던 어머니의 계란죽. 어머니도 한참 동안 팔을 휘저으며 상념에 잠겼겠지. 과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내가 아프지 않기를, 끓고 있는 죽이 내 입맛을 돋우기를 바라지 않으셨을까.
얼추 쌀알이 풀어질 때쯤, 다음 재료를 생각했다.
이제 무엇을 넣더라?
그래, 그거였다. 냉장고 깊숙이 자리한 멸치액젓을 꺼내어 반 스푼 넣었다.
어라, 냄새가 고약하다. 전에는 이런 냄새가 난 적이 없었는데. 황급히 계란을 깨서 풀어보아도 고약한 냄새가 가시질 않는다. 핸드폰을 들어 레시피를 찾아본다.
아뿔싸, 멸치액젓이 아니라 참치액젓이구나.
애써 끓인 죽이 아깝긴 하지만, 하는 수 없이 모두 버리고 새로운 냄비를 꺼냈다. 이번엔 제대로, 다시 한번. 똑같은 과정 속에 어김없이 상념에 잠긴다.
요리란 참 섬세한 작업이구나. 제아무리 좋은 재료를 갖다 쓰고, 많은 시간을 들인다 해도 단 한 번, 잘못된 재료를 넣는 순간 엉망이 되고 만다. 아무리 오랜 기간을 만났더라도, 단 한 번의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이 결코 잊히지 않는 것처럼. 백 마디 감언미어보다 한마디 폭언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재료손질부터 상에 올리는 모든 과정에 신중함을 기하는 요리사처럼, 모든 순간을 섬세히 대하리라 다짐하여 본다.
먼 훗날, 눈 감는 순간에 미안한 마음 따위 추호도 없도록.
참치액젓을 넣은 계란죽은 맛있게 끓여졌다.
아내는 고단한 하루였는지 일찍 잠에 들었다.
한 김 식힌 죽은 여전히 바닥이 따뜻하다.
아마 백 년은 거뜬히 따뜻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