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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Jul 21. 2023

우리 집은 투니버스가 안 나와요

 어렸을 적 우리 집에서는 투니버스나 챔프 같은 케이블 만화 채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에서 친구들이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시작하면 나는 언제나 그 이야기에 낄 수 없었다. 쓰레기를 나무로 바꾸는 힘!! 같은 소릴 해대면서 하늘 위로 손을 뻗는 친구들이 바보 같았지만 부러웠다. 갑자기 볼링 선수가 될 거라던 한 친구가 생각이 난다. 자신을 볼링 박이라고 불러달라던 친구였는데.. 어쨌든 나는 볼링 박이 만화에 나오는 대사를 자랑스럽게 외칠 때마다 어떤 만화를 따라 하는 건지 물어보곤 했다.


 나는 친구네 어머니가 깎아주셨기 때문에 억지로 먹어야 했던 사과나 배 같은 것들을 먹으며, 우리 집 티비보다 두 배는 큰 티비로 투니버스를 틀어놓고 친구 집에서 멍하니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당시에는 과일 자체를 안 좋아했고, 그저 고기만 탐했더랬다.) 투니버스에는 지상파 방송국들과는 차원이 다른 자유로움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 집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마냥 즐거운 세상이라는 유년 시절의 판타지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투니버스와 챔프가 나오는 집을 엄청나게 부러워했다. 이렇게 재밌는 것들을 매일 볼 수 있다니! 친구 집에서 알아낸 투니버스 번호를 우리 집 티비에 입력해봐도 나오는 건 무적코털 보보보가 아닌 자글자글한 노이즈 뿐이었다. 시끄러운 소리와 지직거리는 회색 화면이 원망스러웠다. “왜 안 나오지..?” 케이블 채널이 나오지 않는 집은 내 기억엔 우리 집밖에 없었다.


 친구집에서 만화를 보면 만화 내용이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한창 스토리가 진행 중인 만화의 맥락을, 중간부터 보는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드라마를 보는 엄마에게 내용을 물어보는 것처럼 친구에게 만화의 내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거냐고 물어봐도 기껏해야 초등학생밖에 안 되는 꼬맹이가 그런 질문에 조리 있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소파에 기대어 만화를 봤다. 그것마저도 너무 소중해서 친구와 노는 것보다 만화에 집중하곤 했다.

아버지는 내가 컴퓨터로 웹툰을 보고 있으면 싫증을 내시며 당장 끄라고 말씀하셨다. 만화를 보는 것이 철저하게 무익한 일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이었는지,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아버지 몰래 만화책을 자주 빌려봤다. 뭐든 막으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우리 동네 만화방에서는 300원에 한 권을 빌릴 수 있었다. (지금은 문을 닫았다. 추억이 사라졌다..)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이었는데, 3층쯤에 앉아서 빌려온 만화책을 읽었다. 차가운 계단에서 책을 읽다가 누군가 올라오거나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면 만화책을 가방 속에 넣고 천천히 올라가는 척을 했다. 그 소리의 정체가 엄마 아빠가 아니면 다시 3층으로 돌아와 만화책을 읽었다. 몇십 분이면 한 권을 다 볼 수 있었다. 계단에 앉아있느라 엉덩이가 너무 시리고 차가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재밌었으니까. 만화책 한 권을 다 읽고 늦게 집에 들어가면, 학교에서 뭔가를 하고 오느라 늦었다고 거짓말을 쳤다. 그렇게 해서라도 만화책을 읽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그 당시 사회가 만화를 얼마나 천대하는 분위기였는지를 생각해보면, 만화 보는 걸 막으셨던 아버지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만화책을 보면 내 친구들처럼 철이 없어질 것 같으셨을 테니. 그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셨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만화를 읽는 일보다는, 아버지가 만화 보는 걸 막으셨던 일이 내 정서에는 더 악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생각한다. 안 되는 게 많아서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무기력한 채로 살았다. 아버지가 만화 보는 걸 막으셨기 때문에 더욱더 만화책을 읽는 데에 몰두하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정책은 대실패라고 볼 수 있겠다.


 만화방에서 가장 처음으로 골랐던 만화책은 "나루토"였다. 소년만화 주인공이라는 게 다들 그렇듯이 "나루토"의 주인공 나루토는 멍청한 녀석이었다. 남들 다 하는 분신술도 못 하고, 장난만 쳐서 마을 어른들에게 엄청 깨지고, 멍청하다는 핀잔을 들고, 모종의 이유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피하는, 그런 불쌍한 녀석이었다.

그래도 걔는 주인공이라 그런지 악동이지만 착하고, 언제나 자신을 믿어주는 동료들이 생겼으며, 피나는 노력을 통해 강력한 기술들을 습득해냈고, 아무리 강한 적이 있어도 어떻게든 이겨냈다. 그 어떤 고난이 있어도 나루토는 언제나 핵심을 꿰뚫어내는 힘이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선택을 믿고 남들이 두려워하는 길을 당당하게 걸어 나갔고, 호쾌하게 적을 쓰러뜨렸다.


 그걸 보고 생각했다. 나도 저런 영웅적인 면모가 있진 않을까.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고, 숙제 안 해서 손바닥이나 맞고, 친구도 없고, 쉬는 시간에 이어폰 꽂고 엎드려나 있고, 여자친구도 제대로 있어 본 적이 없는 나에게도, 뭔가 잘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나도 몰랐던 내재된 어떤 힘으로 학교에서, 세상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루토는 내게 해답을 제시해주는 듯했다. 너가 아무리 멍청하고 실수투성이라도 해낼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것들.. 덕분에 나는 습관적인 무기력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나루토처럼 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쉽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멍청하고 기억력도 좋지 않은 건 비슷하지만 나에게는 노력의 재능도, 혈통의 우월함도 없고, 핵심을 꿰뚫어내는 힘도 없기 때문이다. 만화에서는 몇 년 동안 수련하는 장면을 몇 페이지로 퉁쳐주던데, 왜 나는 그렇게 안 해주냐고 젠장~

 그렇게 내가 소년만화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더랬다.


 내 인생이라는 게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밝히는 나루토가 아닌, 나뭇잎마을 주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주민13, 주민57 이 정도의 조연도 못 되는 사람. 침울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인생도 나쁘지만은 않겠다.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면 되겠다. 내가 싫어했던 부류, 평범한 사람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 어딘가 씁쓸하다. 헛꿈 꾸지 말라는 의미에서 만화를 보지 못하게 하셨던 거였나. 슈퍼맨이 되겠다고 아파트 베란다 창문에서 뛰어내릴까 봐. 그런 게 걱정되셨나, 하면 아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인이 되고 나서, 어릴 적에 보고 싶었던 만화나 애니메이션들을 찾아서 본 적이 있다. 잔뜩 기대하고 봤건만, 더럽게 재미가 없었다. 떴다! 럭키맨이나 무적코털 보보보, 배틀짱, 유희왕같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유치한 만화들을 이제는 재미있게 볼 수가 없었다. 초등학생 때 봤다면 분명 재밌었겠지. 나도 만화 대사를 외치면서 학교를 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다니지 못한 것이 아쉬운 일인지 다행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덕분에 내 철없음이 크게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SNS를 보다 보면, “추억의 애니메이션 모음”이나 “추억의 투니버스 애니메이션 명곡 달빛천사! 질풍가도!” 이런 게시글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댓글에서는 추억이라면서 서로를 태그하며 생난리를 친다. 그 모습을 보면 기분이 되게 이상해진다. 같은 세대의 공공연한 공감대에 공감할 수 없다는 게 서운한 걸까. 내겐 없는 추억들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무슨 이유에선지 지상파 방송만 나왔던 우리 집 티비 덕분에 모두가 추억이라 부르는 것들을 나는 추억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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