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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Aug 18. 2023

힙스터에 대한 고찰

 내 오랜 친우인 윤모 군이 어느 날 인스타에 “어느 Hipster의 고해성사”라는 글을 올렸다. 짧게 요약해보자면 코로나로 인해 외국인이 없는 평일 낮의 종로에서 본인과 본인 여자친구만 알고 있던 “지대방”이라는 찻집에 친구들(나와 이모군)을 데려감으로써 그 장소가 나만이 아는 장소, 나만의 힙이 아니게 되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누군가의 글에 출연한다는 건 분명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내가 경험한 일을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모 군은, 나만의 “힙”한 장소였던 “지대방”을 친구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소개하는 동시에 “지대방”이라는 공간이 힙의 본질에서 멀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힙이라 함은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 많아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을까. 다수의 지지를 받는 것은 그 특별함을 잃게 되는 것이다. "나"의 취향을 대변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힙한 것이란 알게 모르게 좋은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장소를 소개하는 일에 양가적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이 “힙스터”란 사람들은 이상한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다. 힙하다고 일컬어지는 장소를 찾아가 사진을 찍고, 해체적이고 전위적인 패션을 입고, 나만 아는 인디밴드를 대중에 빼앗기는 것에 분노하며, “힙”을 표방하는 물건들을 사서 두르거나, 독립영화나 홍콩 액션영화를 좋아하고, 빈티지한 물건이나 키치한 물건에 열광하고, 먼저 알았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낀다. 앞서 나열한 이상한 행동 양식들은 몇 년 전부터 유행이 되어 널리 퍼지는 중이다.


 힙스터가 칭하는 “힙”이란 “진짜”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힙스터들은 “진짜”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한다. 자신이 “진짜”가 되기를 원한다. 자본으로 탄생한 주류문화는 “가짜”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속해도 좋을 “진짜” 세상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그것은 교묘하게 “진짜”를 먼저 알고 있었다는 지적 우월감으로 이어진다. 그 지적 우월감이 간혹 힙스터를 역겹게 만든다. “나만 아는 밴드” 같은 것 말이다. 그들은 혁오와 새소년, 검정치마를 먼저 알았다는 사실을 은근하게 표출하려 든다. 본인 입으로 자신이 “힙”하다고 말하는 건 하수다. 알게 모르게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말투로서든, 직업으로든, 음악으로든, “힙”이 무엇인지 모르는 척해야 한다. 내가 “진짜”이기 때문에 “힙”을 알아본 것처럼 스스로를 세뇌해야 하고, 또 그렇게 보여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전달 방법은 옷을 잘 입는 것이다. 힙스터는 옷을 잘 입어야 한다. 패션이야말로 자신의 취향, 방향성, 혹은 지적 우월을 드러내는 가장 편하고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힙스터들이 좋아할 법한 옷들은 대부분 비싼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힙스터라는 21세기 히피들은 자본주의가 일구어낸 효율적 획일성을 더 비싼 돈을 들여 벗어나야 하는 모순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힙스터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새로운 것이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게 된 이후에는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거나, 정착하거나, 이 두 가지의 선택지가 생기게 된다. 여기서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 이들은 아직 자신만의 “진짜”를 찾아내지 못한 불안정한 존재들이다. 겉돌고 있는 동안에는 “진짜”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따르기만 할 뿐인 것이다. 재료일 뿐, 설계도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다 자신만의 “진짜”를 발견한 힙스터는 자신만의 “진짜”가 있는 곳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렇게 특정 취향에 정착한다 해도 그들의 새로움에 대한 열망은 멈추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힙스터의 기질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새로움을 찾는 일보다는 자신의 “진짜”에 가까운 무언가를 알아가는 일에 더욱 열중하게 되는 것이다.


 간혹가다 힙스터가 아님에도 힙한 사람들이 있는데, 오래된 이발소의 이발사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그렇다. 자신의 분야에 최선을 다하고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은 가히 “힙”하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힙”의 요건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힙스터라 부르는 건 어딘가 어색함이 느껴진다. 이발사 아저씨가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특성을 가지고 있진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다 보니 힙한 사람이 된 경우니까. “힙”을 쫓다 힙해진 사람과는 결이 다른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힙”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힙스터들은 무엇을 위해서 비틀즈나 GD 같은 유명인을 따라 하는가. 따라 할 사람이 없어져 버린 정말 힙한 사람들은 무엇을 향해서 살고 있는가. 그 모든 의문에 대한 내 생각을 힙스터들이 “힙”의 본질에 다가가는 과정을 공전 현상, 그러니까 위성과 행성, 항성과 은하계 간의 공전 현상에 빗대어 설명해보고자 한다.






김성일의 힙동설


 천체 = 취향, 생활 양식, 관념을 포함한 가치. 위성, 행성, 항성, 은하계를 포함

 달 = “힙”을 선망하는 개인. 지구에 가고자 한다. 위성.

 지구 = “힙”의 모습을 갖춘 불안정한 힙스터. 태양에 가고자 한다. 행성.

 태양 = “힙”의 전형으로 다른 이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개인 혹은 힙스터. 우리 은하의 중심으로 가고자 한다. 항 성.

 우리은하 = “힙”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낸 관념, 우리은하보다 무거운 무언가로 가고자 한다. 은하.

 우리은하 바깥 = 우리의 지성과 의식으로 특정할 수 없는 무언가

 빛 = 가치에 대한 인지를 가능케 하는 감각

 마찰력 = 감정, 가치 판단,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



 우주에서는 마찰력이 거의 없어 천체가 공전하는 힘을 거의 잃지 않지만, “힙의 세계”에서는 감정, 가치 판단, 열망 등이 공전 중인 힙스터에게 마찰력을 일으켜 자신보다 더 무거운 질량을 가지는 가치에 도달하게 된다. 소용돌이 모양을 그리며 중심으로 가려는 힘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러다 그 중심에 도달하면 그 가치와 한 몸이 되어 또 다른, 더 무거운 질량을 가지는 가치를 향해 공전하게 된다.


 누구나 현재 자신의 취향, 생활 양식보다 더 괜찮아 보이는 가치를 모방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러다 다른 위성이나 행성, 항성에 더 가까워지고, 그 가치가 더 괜찮아 보이게 될 경우, 힙스터는 궤도를 틀어 다른 행성을 공전하기 시작한다. 패션으로 예를 들면, 아메카지를 추구하다가 워크웨어로 방향을 트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전 궤도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추구하는 가치에 다가가기는 어려워진다. “힙”의 전형으로 다른 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는 것이 “힙”의 모습을 갖추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힙”의 근본인 추상적 개념, 가치에 가까워지려는 존재가 되는 것이 “힙”의 전형으로서 다른 이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되는 것보다 어렵다.


 우리는 사랑, 평온, 자유, 아름다움과 같이 유명한 가치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 뜻을 안다고 해서 그 개념에 다다를 수는 없다. 평온한 삶을 추구한다고 해서 영원히 평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비교적 평온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될지는 몰라도 진정한 평온을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달과 지구, 태양이 우리 은하 중심부에 다다를 때까지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관념이 가진 엄청나게 무거운 질량에 이끌려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한들, 세상이 우리에게 그 무거운 관념, 가치에 도달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은하를 관측할 수 있다고 해도, 그곳에 가기에는 그 거리가 너무 아득하다. 그것은 “힙의 세계”에서의 힙스터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우리은하 또한 무언가를 향해 공전하고 있다. 그 무언가도 다른 무언가를, 다른 무언가도 또 다른 무언가를 향해 공전한다. 그 모든 공전의 중심이 어디인지는, 작디작은 존재인 우리로서는 모를 일이다.


 힙스터들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걸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느 날 지구 같은 행성이 수억 수천 개 발견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모두 지구와 비슷한 환경과 지성체를 지닌 행성이고 지구와 별다를 것이 없다면, 우리 지구는 생명체가 발생할 수 있는, 확률적으로 말도 안 되는 천혜의 환경이 우주에서 유일한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인류가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 여태 느껴본 적 없는, 상당히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다른 행성의 생명체에게 동질감을 느낄 수도 있고, 두려움, 공격성, 혹은 거부감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드러낼 거부감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힙스터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보고 자신이 유일한(혹은 고유의)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 그것이 왜 거부감을 일으키는가 함은, 본인과 비슷한 것들을 보면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혐오의 감정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왜 자기혐오가 생길까? 자신은 자신의 단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다른 이의 모습을 보고서는 자신의 단점, 허물을 상대에게 투영시켜 본인과 동일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동일시를 하는가? 자신이 유일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 생각, 다시 말해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보고 자신이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본질적인 “힙”에 다가서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자신밖에 없다. 아무리 비슷하고, 비슷하다 한들 모두는 고유의 삶과 기억을 각각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분명 유일한 존재임에도, 많은 힙스터들이 본인 존재의 유일함을 의심하는 것으로 “힙스터의 끝나지 않는 굴레”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계속 비슷한 질량을 가진 천체로 공전의 대상을 옮길 뿐, 새로운 유행거리를 찾아 헤맬 뿐, 더 무거운 질량으로의 접근이 불가하게 된다.


 그런 힙스터들은 자신의 “힙”이 유행하게 되면 먼저 발견해냈다는 지적 우월을 자랑하고는 다시금 아직 유행하지 않은 “힙”을 찾으러 간다. 이런 힙스터 생활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진짜 “힙”의 근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자신의 지적 우월을 뽐내는 일에 열중하는 헛짓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실제로는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깨닫고, “힙”의 근원에 대한 고찰, 그리고 무거운 가치로의 병합을 통해 자신이 무거운 질량을 가짐으로써 작은 천체의 인력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그와 동시에 무거운 질량을 가진 자신보다 더 무거운 질량을 가진 가치, 힙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에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인간의 모습을 모방하는 데에 그치지 않게 되고, 보여지는 것을 중시하는 삶에서 가치를 중시하는 삶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져 공전의 대상이 바뀌게 되면, GD의 옷차림, 유명 댄서의 나무꾼 수염, 래퍼들의 G바겐을 마냥 선망하고 모방하기만 하는 삶에서 벗어나 사랑이나, 평온, 자유와 같은 특정한 “관념”에 집중하는, “진짜”에 가까운 삶이 된다. 쉬지 않고 다양한 가치를 찾아다니고 탐닉하다 종국에는 평화와 사랑을 노래했던 존 레논을 예로 들 수 있겠다.


 apex 힙스터란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정말 중요한데, 관념에 대한 생각, 도달하고 싶은 막연한 자신만의 이미지를 스스로 좇기 시작하면, 생각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므로 저마다의 오리지널리티가 형성된다. 그것은 편의를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낸 사상에 따르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게 “진짜”에 가까운 삶, “관념”에 가까운 삶, “자신만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깨닫고 달, 지구, 태양으로 돌아간 후, 더 나아가 “힙”의 근원에 대한 고찰을 통해 우리은하로의 회귀를 꿈꾸는, “힙”의 정점에 서 있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자신이기를 바라고, 스스로 행하며,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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